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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56화 (156/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56화

케이 하커는 꿈을 꿨다.

그의 꿈속에서 케이는 또다시 한 여자가 되었다. 케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한 여자 말이다.

인형 같은 옷을 입고 인형 같은 머리를 하고 그림처럼 앉아 있던 한 여자. 그러나 여자는 케이의 꿈속에서 인형도, 그림도 아니었다. 여자는…….

“엘리즈! 내가 수술 도구를 똑바로 소독해놓으라고 했지!”

“해, 했는데요!”

“그럼 대체 여기 붙은 이 피딱지는 뭐냐!”

여자는 이를테면 종 같은 것이었다. 엘리자베스와 종이라니. 케이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에 꿈을 꾸면서도 이것이 얼마나 허황한 망상인가 싶어 우스웠다.

여자는 하루 종일 빈민들로 추정되는 더러운 냄새가 나는 환자들 속을 허우적거리며 뛰어다녔다. 여자의 하루는 물을 데우고 기구를 소독하고 물을 버리고, 또다시 물을 데우는 것으로 가득 찼다.

케이는 문득문득 우물가에서 물을 긷기 위해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물에 비칠 때,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고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를 질끈 묶고 얼굴에는 숯 검댕을 묻힌 엘리자베스는 몰락했으나 한때는 왕족이었던 여자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심지어 여자는 어느 날 밤엔 담을 넘기도 했다. 그녀를 ‘엘리즈’라고 부르는 남자가 그녀를 잔뜩 혼낸 날이었다. 그녀는 훌쩍거리면서 어설픈 솜씨로 동네 고양이들을 다 깨우면서 담을 넘어 뛰어가며 계속 중얼거렸다.

“엘 선생……. 이 또라이 같은 자식. 앞으로 넘어져도 뒤통수가 깨져라……. 엿 먹어라……. 엿 먹어…….”

여자는 미친 사람처럼 뛰면서 중얼거리다가 또 미친 사람 멈춰 섰다. 여자는 뒤를 돌았다. 어두운 골목길에 옅은 연기가 흘러나오는 더럽고 지저분한 벽돌집을 보던 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야. 또라이는 아무래도 나인 것 같아…….”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넘어온 담장 쪽으로 걸어갔다. 비척비척 걷던 여자는 낑낑거리며 한참 담을 올랐다. 여자가 아슬아슬하게 담장 위에 몸을 걸쳤을 때 여자의 시선에는 까마득한 바닥이 보였다.

“설마 무섭냐?”

그때였다. 여자의, 엘리자베스의 시선에 망토를 휘감은, 검은 까마귀 가면을 쓴 기이한 남자가 들어온 것은.

케이는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왜인지 모르게 엘리자베스와 저 가면의 사나이가 친밀한 사이일 것 같다는 예감을 느꼈다. 어느새 꿈속에서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감정과 동화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건 어떤……. 예지 같은 것일까.

사실 그 어느 쪽도 아니고 그저 망상에 불과할 확률이 더 높겠지.

케이가 그렇게 생각할 때, 남자가 가면 아래로 쿡쿡 웃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가만히 보고만 계시는 거예요!”

“그럼 내가 밤중에 몰래 도망치는 녀석을 도와주기까지 해야 된다는 거냐?”

“……제, 제가 도망치는 거 알고 계셨어요?”

“몰랐겠냐! 너 때문에 수도원 근처 고양이들이 얼마나 울어댔는지! 70세 사제님까지도 네가 도망가는 걸 알더구나!”

엘리자베스는 훌쩍거리며 담장 위에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케이는 남자가 계속 웃는 것을 들었다. 가면 아래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그 얼굴을 알 것만 같았다.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겠지.

케이는 쓸데없이 정답을 맞추는 자신을 저주했다.

“……근데 왜 안 붙잡으셨어요! 제가 쓸데없는 조수라서요……?”

조수? 케이는 그 단어를 의아하게 느꼈다.

“참내. 넌 지금 내가 여기 왜 나와 있는 거 같냐?”

“왜 나와 계신데요?”

“너 잡아오려고 나와 있잖냐! 당장 뛰어내려!”

가면 쓴 남자가 팔을 활짝 벌렸다. 엘리자베스는 남자를 보더니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다시는……. 다시는 멍청이라고 안 하실 거예요?”

“내가 왜! 넌 멍청이잖아!”

남자는 당당하게 외치더니 엘리자베스를 재촉했다. 그녀가 벌벌 떨며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자 남자는 엘리자베스를 붙잡아 사뿐하게 내려주기는커녕 함께 무너져 내렸다.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몸 위로 쓰러져서 쿨럭거리는 남자에게 말했다.

“잡아주시는 거 아니었어요?”

“여, 여자들은 다 기, 깃털처럼 가벼운 거 아니었냐……?”

“그럼 깃털이지 여자겠어요!”

엘리자베스가 다 찢어진 바지자락을 걷어올리자 그녀의 하얀 무릎이 드러났다. 하얀 무릎은 온통 까진데다가 먼지가 묻어 있었다.

“으…….”

엘리자베스가 신음을 흘리자 남자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뒤 남자는 웬 유리병과 물수건을 가지고 오더니 여자의 무릎을 살살 닦아주고 알코올로 소독하기 시작했다.

“멍청하긴. 왜 돌아왔냐?”

“……옷을 놓고 가서 돌아온 거거든요.”

“뻥치긴. 넌 성격이 물러서 문제다.”

“……좋으시겠어요. 제 성격이 물러서 노예처럼 부려먹을 조수도 생기고. 엘 선생님은 대체…….”

엘리자베스가 훌쩍거리며 소매로 코를 닦았다. 남자는 가면 아래에서 더럽다는 듯이 혀를 찼다. 꿈속에서도 케이는 궁금했다.

왜 케이의 무의식은 남자의 가면 아래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 이것 역시 케이의 무의식이 케이를 엿 먹이는 방식 중 하나일까?

엘 선생. 수도원.

케이는 이 꿈이 어디에서 기원한 망상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요. 수도원. 둘이서 수도원에서 빈민 치료를 하다가 만났다던데. 하여간 그 삼촌도 여기저기 싸돌아다닌다니까.’

엘우드 선생과 엘리자베스의 관계에 대해 케빈 퍼킨이 해주었던 말이었다.

“오늘만 해도 두 명이나 죽었잖아요. 저는 그런 건……. 그런 건 정말 못 견뎌요. 제가 멍청해서…….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소독을 못 해서……. 그래서 죽은 것 같고……. 그런데 선생님은 대체 어떻게 그렇게 멀쩡하신 거죠?”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 선생이 말했다.

“뭔 소리야. 누가 그래? 내가 멀쩡하다고.”

엘 선생은 들고 있던 수건을 내려놓고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눈을 통해 까마귀 가면에 있는 기괴한 고글 속 엘 선생의 눈을 보려고 했다. 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난 지금 개 같은 상태다. 엘리즈. 내가 살릴 수도 있었던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미칠 것 같지. 그런데 하나만 묻자. 너 대체 왜 돌아왔냐?”

엘리자베스는 엘 선생의 질문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연기가 흘러나오는 지붕을 바라보았다.

“제가…… 오늘 선생님이 소독하라고 한 환자를 다 못 본 것 같아서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 선생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런 거다. 오늘 내가 개 같은 상태라고 해서 내일 볼 수 있을 환자를 놓칠 순 없지. 그럼 또 개 같아지는 거잖아. 끊임없이 개 같기만 한 상태로 살아가는 거잖냐.”

케이는 그 순간, 엘리자베스의 눈으로 엘 선생을 보았다. 가면 속 얼굴조차 알 수 없는 이 이상한 남자를.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나도 그분처럼 살 수 있으면 좋겠어.’

‘존경은 너무 과해. 그냥 그분을 이해하게 된 거야. 그분의 상황이나 기분 같은 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분의 선택들이 얼마나 어려웠을지도 알게 된 거야.’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감정이 존경과 이해, 연민과 동경, 그리고……. 사랑 속에서 방황하는 것을 느꼈다. 케이는 이 꿈이, 이 망상이, 케이 스스로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만든 거대한 지옥 같다는 생각을 했다.

너의 사랑을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오다니. 그만한 저주가 어디에 있겠나.

엘리자베스.

케이는 눈을 떴다.

* * *

케이가 눈을 떴을 땐 능글맞은 얼굴의 한 남자가 케이의 앞에 서서 짧게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크흠.”

주위를 살펴본 후에야 케이는 자신이 다시 취조실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케이는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조지 왕자에게 했듯이 예의를 갖춰 인사할 뻔한 자신을 막았다. 그 거지 같은 꿈을 꾸기 전까지만 해도 밤새 취조를 받다가 새벽에 조지 왕자를 알현하고 온 참이라 정신이 없었다.

케이는 조사실의 딱딱한 나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조지 왕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옅은 갈색 머리를 정갈하게 정리하고 몸에 딱 붙는 옷을 입은 조지 왕자의 푸른 눈은 케이로 하여금 엘리자베스를 떠올리게 했다.

속내를 알 수 없도록 신비로운 그 눈동자는 케이와 밀담을 나누는 내내 순진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 탓에 오히려 케이가 불안한 마음으로 조지 왕자의 속내를 염탐해야 했다. 조지 왕자는 부드러운 얼굴로 케이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그의 말을 의심하며 찌르고 들어오는 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더욱 케이는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했다. 조지 왕자의 관용이 위장인지 아니면 같은 편에게 보이는 호의인지.

조사실로 돌아오자마자 꾸벅거리며 졸고 말다니. 안 그래도 밤을 샌 데다가 완벽하게 회복하지 못한 케이의 몸은 그런 지리한 머리싸움 속에서 점점 지쳐갔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악몽을 꾸고 말았다.

케이는 미간을 찌푸리고 남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시간이.”

“아직 아침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피곤하셨던 모양이군요. 아마 한 시간쯤 주무셨을 겁니다.”

케이는 남자의 이름은 몰라도 그가 조지 왕자 쪽의 사람이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알현실에서 내내 동석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저 남자가 조사실에 들어왔다는 것은 조지 왕자가 케이의 제안에 대한 결단을 내렸다는 뜻이었다.

조지 왕자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케이는 이대로 단두대에 끌려갈 것이다.

케이는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남겨질 사람들에게 이 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몰라 초조했다.

남겨질 사람들, 그 중에서도 한 여자 말이다.

케이는 눈을 감으면 늘 눈꺼풀 위를 떠다니는 한 여자를 떠올렸다. 자신이 꾸었던 악몽 속에서 엘 선생을 보며 뛰었던 여자의 심장을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그것은 악몽이 아니라 길몽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건 예언 같은 것이다.

내가 없는 세상 속에서도 너는 행복할 거라는 예언.

그렇다면 나쁘지 않았다.

“시신을 수습하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도무지 온전한 형태로 시신을 전달할 길이 없어서 어제 프란시스 부인의 동의를 얻어 왕실 화장터에서 화장을 했습니다.”

케이는 남자가 신사다운 간질거리는 억양으로 자신에게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자는 케이의 앞에 뚱뚱한 항아리를 올려놓았다. 케이는 그것을 보면서 한참 멍하니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것이 로버트 하커라는 것을 알았다.

케이는 제 눈앞에 있는 옥색의 펑퍼짐한 항아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저 안에, 한 사람이 구겨져 들어간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해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그러나 꾹 참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이것이, 조지 왕자님의 결정입니까?”

남자는 케이가 자신의 아버지의 유골함 앞에서도 미동도 하지 않자 조금 놀랐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곤 케이의 건너편에 앉았다. 남자가 말했다.

“조지 왕자님의 결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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