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55화
아루쉬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들고는 엘리자베스에게 인사하고 주저앉은 앰버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에드워드가 앰버를 일으켰다. 아루쉬는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큰 고초를 치렀다고 들었습니다. 괜찮나요?”
어색한 발음과 억양이었지만 결코 문법에 어긋나는 문장은 아니었으므로 엘리자베스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놀란 것을 티내지 않으며 말했다.
“당신도…… 앰버의 ‘친구’인가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아루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에드워드와 앰버를 보곤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아루쉬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이 악수를 청하는 것임을 알아채고 머뭇거리다 그 손을 잡았다. 아루쉬가 말했다.
“당신도 앰버의 ‘친구’죠? 그럼 우리도 친구가 되겠군요, 엘리자베스 양.”
나도 앰버의 ‘친구’인가? 엘리자베스는 아루쉬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앰버와 케이, 그리고 에드워드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의회 청사가 무너지고 국회의원들 중 여럿이 죽었으니 다시 찰스 아이드 이후 왕정복고 시대처럼 의회주의가 철저하게 폭격을 맞게 될까? 이 사건의 여파는 레트니의 생사와 이후 레트니의 후계자가 될 사람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비슷한 사건이라고 해서 늘 같은 결과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퀴닌이 겨우 6개월 일찍 개발되었다는 이유로 새로운 무역회사가 만들어지고 레본을 뒤흔들어놓은 것처럼, 비슷한 사건도 어느 때에 그 일이 벌어지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를 낼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그런 고민으로 머리가 시끄러워 멍청하게 서 있는 사이 아루쉬가 응접실에 앉아 있는 에드워드와 앰버에게 걸어가더니 말했다.
“케이 하커가 경찰청에 출두했어요. 컬로든 궁 앞에서 보았습니다.”
아루쉬의 말에 앰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리자베스 역시 시선을 돌려 아루쉬를 보았다. 에드워드가 다급하게 물었다.
“보비들한테 붙잡힌 건가요?”
아루쉬는 에드워드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붙잡혔다고 보기엔 좀 애매한 구석이 있겠죠. 케이 하커는 로킨트에서 온 것 같았고 심지어 자기 가문의 마차를 타고 왔어요. 호송용 마차를 타고 온 다른 귀족들과는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저 아루쉬라는 이국의 남자가 ‘호송용 마차’ 같은 말은 어떻게 아는 것일지 궁금했지만 그런 것을 물어볼 순 없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팔다리도 성해 보였고 심지어…….”
아루쉬가 피식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아루쉬를 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응접실 한구석에 앉았다. 아루쉬가 미소를 숨기지 못하며 엘리자베스를 돌아보았다.
“보비 하나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차더군요.”
아루쉬가 웃으며 하는 말에 엘리자베스가 어이가 없어서 같이 웃었다.
“보비의 정강이를요?”
‘미친놈.’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국왕 시해 미수범으로 붙잡힌 주제에 보비의 정강이를 걷어차다니. 케이 하커는 역시 이상한 놈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터져 나오는 실소를 어쩌지 못하고 웃었다.
에드워드가 중얼거렸다.
“울다가 웃으면…….”
“에드워드!”
앰버가 얼른 에드워드의 팔뚝을 꼬집었다. 앰버는 에드워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숙녀한테 실례될 말은 하지 말아요. 엘리자베스 양은…….”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계속 웃었다. 그녀의 눈은 아직도 눈물로 번들거렸음에도 그녀는 계속 피식거리며 중얼거렸다.
“진짜 넌 미친놈이야……. 넌……. 정말…….”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다가 한순간 웃음을 멈추고 아루쉬를 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에는 아까 실소를 참지 못했던 이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절망과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럼 이제 케이는 단두대로 가는 건가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아루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에는 앰버가 대답했다.
“그건 모를 일이죠.”
앰버의 대답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케이가 레트니의 어깨를 찔렀어요.”
엘리자베스가, 3개월 전까지만 해도 국왕의 조카였던 여자가 국왕을 ‘레트니’라고 부르자 에드워드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엘리자베스가 붉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봤고, 그 자리의 수많은 귀족들과 자본가들이 다 봤어요.”
엘리자베스는 팔짱을 끼고 코를 훌쩍거렸다.
이 미친놈이, 나를 한 번 구해보겠다고 레본의 국왕을 찌른 것이다.
레본은 이오페아에서도 가장 왕정이 강력한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서 국왕을 시해하려들다니 케이 하커에게 살 길은 없다고 볼 수 있었다.
그때 앰버가 한숨을 내쉬며 재떨이 위에 놓인 기다란 담뱃대를 들어 불을 붙였다. 앰버는 담배 연기를 길게 빨아들이고 내뱉으며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 자리의 귀족들과 자본가들 중에 신시 주식회사에 지분을 가지지 않은 자들은 없어요. 대부분이 빚을 내서 한 투자일 거고 그 중 누가 케이 하커를 망하게 하고 싶겠어요.”
앰버는 담뱃대를 든 손을 나른하게 소파 팔걸이에 걸치며 말을 이었다.
“물론, 자신들이 죄를 조금이라도 경감시키고 싶은 무정부주의자들이라면 다르겠지만.”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정부주의자들 중 생존자가 있나요?”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가 말했다.
“딱 두 명이 살아남았어요. 조지의 군대가 본보기로 살려둔 거죠. 처형대에 올리려고. 한 명은 대장이고 또 한 명은 윌리엄 조쉬예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고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윌리엄 조쉬! 그 얄궂은 남자가 살아남았다니!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말대로 조쉬야말로 처형대로 가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 조쉬의 운명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케이 하커를 걸고넘어질까요? 그들이?”
“글쎄요. 그럴 일은 없을 걸요. 조지가 그걸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조지 왕자한테는 케이 하커가 반드시 필요할 거라는 말이죠. 왕위 계승을 위해서.”
“그 신시 주식회사 때문에요? 하지만 거기엔 레트니의 돈도 들어가 있어요.”
엘리자베스가 앰버의 논리를 깨부수자 앰버가 고개를 저었다.
“비단 신시 주식회사 때문만은 아니에요. 오늘 로킨트에 갔다 와서 나와 에드워드가 또 들른 곳이 있어요. 웨스트 리오든에 있는 한 변호사 사무실이에요.”
변호사 사무실? 엘리자베스는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앰버의 논리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헤맸다. 그 사이에 앰버가 말했다.
“그 변호사에게 로버트 하커가 죽기 전에 유언장을 남겼다고 하더군요. 물론 공증도 이미 받은 상태라 문제도 없구요. 켄드릭은 소송을 하겠다고 불같이 날뛰긴 하겠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로버트 하커가 케이에게 자신이 살던 저택과 마차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남겼어요.”
“뭐라구요?”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와 아루쉬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알고 있던 얘기인 듯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로버트 하커가 케이 하커에게 전 재산을 남겼다고?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비틀렸다.
그녀의 전 시부는 그럴 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켄드릭이 아무리 망나니 같이 굴어도 장남이 빈털터리로 지내는 꼴은 절대 지켜보지 못할 사람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길게 담배 연기를 뱉어내는 것을 보며 그녀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무슨 짓을 했어요?”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피식 웃었다.
“무슨 짓을 하다뇨. 그냥 유언장을 확인했을 뿐이에요. 물론 이면계약서 한 장이 더 있긴 했지만 그건 불법적인 거라 처리했죠.”
“이면계약서?”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는 재떨이에 재를 털어내며 말했다.
“네. 켄드릭이 노름에 빠져 돈을 날릴까 싶어 케이 하커에게 전 재산을 주겠다고 해놓고 케이에게 이면 계약서를 쓰게 했더군요. 그 이면 계약서는……. 우리가 처리했어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머리털이 삐죽 서는 것을 느꼈다. 앰버의 얼굴에선 아기처럼 울던 아까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수척해진 그녀는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서 붉은 머리카락을 퇴폐적으로 쓸어넘기며 엘리자베스를 고양이 같은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로버트 하커를 위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죠. 평생 일궈온 공장을 켄드릭이 날린다면 로버트가 하늘에서도 눈을 감기 어려울 테니까.”
이 망할 혁명가들.
엘리자베스는 앰버와 에드워드, 그리고 아루쉬의 눈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이들은 역시 계략에 능한 자들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팔에 돋은 소름을 숨기기 위해 팔짱을 끼었을 때 앰버가 말했다.
“그러니 이제 레본의 경제를 쥐락펴락할 만한 엄청난 규모의 하커 사 소유의 공장들, 그리고 부지들, 심지어는 하커 사 그 자체까지도 케이 하커의 것이에요. 내일 로버트 하커의 장례식이 있을 거라는 기사가 났더군요. 거기에서 이 모든 사실이 발표될 거예요. 그리고 조지는 그보다 한 발 빨리 이 사실을 알게 될 거구요. 우리가 신문 기자들에게 약간의 힌트를 주었으니까.”
앰버는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아 마신 뒤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니콜슨 공작은 선더렌에 커다란 공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죠? 이미 갸흐통과 거래도 하고 있구요. 그런 공작이 호시탐탐 조지 왕자의 왕위 계승을 넘보고 있는 이 시점에 조지 왕자가 케이 하커를 놓고 싶어 할까요? 조지 왕자가 케이 하커에게 무슨 짓이든 하는 순간 공작이 케이 하커를 조지의 손에서 강탈하고 싶어 할 거예요.”
“그게…… 이게 무슨…….”
엘리자베스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혼란스러워 하며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앰버가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자베스를 내려 보았다.
“무슨 말이긴요. 엘리자베스. 이제부터 케이 하커를 손에 넣는 자가 왕위를 갖게 된다는 뜻이죠. 레본의 경제를 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을 테니 말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케이 하커를 해하려고 하는 자본가와 귀족이 있을까요? 그런 자가 있다면 조지 왕자가 분명 케이 하커의 앞에 서서 그들을 쳐내려고 할 거예요.”
앰버는 그렇게 말하곤 마지막으로 쇠마개로 담뱃대의 불을 껐다. 앰버는 담뱃대를 다시 재떨이 위에 올려놓고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이만 올라가서 쉬어요, 엘리자베스. 우린 내일부터 바쁠 거예요. 내일은 장례식장에 가야 하니 말이에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앰버를 보며 말했다.
“내가…… 내가 이 말 했나요?”
“무슨 말이요?”
“당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에요. 정말로요.”
“고마워요. 칭찬이죠?”
앰버가 고양이 같은 눈꼬리를 치켜뜨며 웃었다.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는데.
엘리자베스는 갑자기 몰려드는 탈력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