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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54화 (154/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54화

케이는 잠시 눈을 감고 엘우드 밀을 떠올려보았다. 그 사이 프란시스가 말했다.

“그래, 예쁘장하게 생긴 사내 말이다. 너도 아는구나. 아마도 갸흐통 사람인 것 같았지. 왕비랑 생김새가 비슷했으니 말이야. 하얀 피부에 은발 같은 금발, 초록색 눈동자……. 아름다운 생김이지.”

하얀 피부, 은발 같은 금발, 초록색 눈동자.

케이는 그 아름다운 사내 옆에 서 있을 엘리자베스를 떠올려보았다. 몇 번을 떠올려봐도 언제나 둘은 잘 어울렸다. 삐뚜름한 코에 탁한 눈동자와 갈색 머리를 가진 케이 하커가 엘리자베스 옆에 서 있는 상상과는 달리.

케이는 마차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달콤하고 고통스러운 상상 속에서 빠져나왔다. 케이는 재킷 자락을 여미며 마차에서 내렸다.

잔뜩 성난 얼굴의 보비들이 케이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 중에서도 경사 하나가 케이의 뒤에 서 있는 프란시스를 보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왕자님께서 그런 명을 한 적은 없다고 하더군요, 궁전지기께서.”

프란시스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세상에. 그럴 리가요…….”

케이가 프란시스를 돌아보자 프란시스는 눈알을 도르르 굴리며 뭔가 생각하는 듯 과장된 얼굴을 하다가 천천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그렇네요. 그러고 보니. 이제 보니 왕자님께서는 그저 저에게 마차를 내어주실까 여쭤보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사양했구요. 제가 착각을 했군요. 경사님. 이를 어쩌나.”

보비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케이가 피식 웃었다. 프란시스가 말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지 않습니까? 우리 아들은 순순히 당신들에게 호송되어 왔고 당신들은 취조인을 모셔왔어요. 그 과정에서 약간의 매너를 지켰다고 해서 당신들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가자, 토비!”

프란시스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재빠르게 마차에 다시 올라타 문을 닫았다. 쾅, 소리와 함께 경사가 욕지거리를 뱉었다. 케이는 그 경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으악! 이게 뭐 하는……!”

“미안하게 됐군. 방금 쥐가 기어 가길래 당신 발목이 물릴까 봐 그랬소. 요새 쥐 때문에 옮는 전염병이 창궐을 한다던데.”

“뭐, 뭐요?!”

경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얼굴을 구기면서 제 정강이를 부여잡았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쥐가 나올까 두려운 듯 바닥을 살피며 걷기 시작했다.

‘쥐새끼 같은 자식.’

케이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보비들을 따라 걸었다.

* * *

쾅쾅쾅!

한 여자가 레트니 애비뉴 2번지의 대문을 손으로 마구 흔들었다. 그 바람에 철제 문이 쾅쾅거리며 큰 소리를 냈다. 엄청난 힘이기도 했거니와 엄청난 굉음이었다.

저택에서 곧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대문에 서 있는 여자를 보더니 정원을 단숨에 가로질러 와 대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바깥에 서 있던 여자, 엘리자베스가 문을 열어준 여자, 앰버의 품으로 쓰러지다시피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엘리자베스가 헐떡거리며 말했다.

“미안해요. 갈 곳이 생각이 안 나서요. 뒤에 미행이 붙지 않은 것 같긴 해요. 확인했어요.”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냉정한 얼굴로 애비뉴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엘리자베스는 지난 6일간 무척 수척해진 앰버의 얼굴을 보았다. 앰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행이 붙었어도 상관없어요. 지금 상황이 그렇게 나쁘게 돌아가진 않는 것 같으니까.”

“네? 그게 무슨…….”

“일단 들어와요, 엘리자베스! 몸이 얼음장처럼 차요!”

앰버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어깨에 기대어 정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렸다.

“로킨트로 가보고 싶었는데 혹시…… 혹시 미행이 붙을까 봐요. 너무 무서워서…… 그래서…….”

“잘했어요. 정말 잘했어요. 엘리자베스.”

앰버는 안쓰러운 목소리로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도닥였다. 앰버가 문을 열려고 하는데 에드워드가 먼저 문을 열었다. 앰버는 놀란 눈의 에드워드에게 얼른 눈짓을 했다. 그러자 에드워드가 담요를 가지러 재빨리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으로 들어선 앰버는 현관문을 잠그며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파편 더미에서 미끄러졌다는 얘길 들었어요. 괜찮은 거예요? 다시 병원으로 가지 않아도…….”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미끄러졌다는 말은 케빈이 지어낸 것이리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케빈과 말을 맞춘 적이 없었으므로 자세하게 그 얘기를 할 순 없었다.

그녀는 일어나 보니 병원이었고 병원에서 눈을 뜨자마자 보비들이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케빈을 만난 것은 궁에 도착한 뒤였다.

“……괜찮아요. 그것보다는…….”

엘리자베스는 벌벌 떨리는 손가락으로 냄새나는 재킷 자락을 여몄다. 며칠 동안 갈아입지 못한 재킷을 보고 있으니 현실감각이 살아났다. 앰버가 엘리자베스가 재킷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 말했다.

“우선 씻기부터 하는 게 좋겠어요. 피곤하죠? 뜨거운 물을 받아놓을 게요. 옷도 갈아입고 또…….”

“아뇨. 아니에요. 그런 것보다는…….”

엘리자베스는 숨을 불규칙하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역설적으로 그 말을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팔을 잡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앰버의 실크 가운이 그녀의 손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케이는……. 케이는 죽었나요?”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네? 내가……. 내가 보낸 쪽지 못 받았어요?”

“받았어요. 하지만 혹시 그 사이에 잘못됐을 수도 있고 또 앰버가 거짓말을 했을 수도…….”

엘리자베스는 말을 멈추고 앰버를 올려다보았다. 간절한 눈이었다.

앰버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며 앰버답지 않게 정돈되지 않은 붉은 곱슬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그러고는 잠시 후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났다. 그 바람에 그녀의 몸이 신발장에 부딪혔다. 하지만 앰버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케이는 멀쩡해요.”

앰버의 표정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당신을 의심하는 것처럼 들렸다면 정말……. 하지만 나로서는……. 그러니까 정말……. 정말인가요? 케이가 멀쩡하다는 거. 정말…….”

앰버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멀쩡해요. 정말이에요. 몇 시간 전에 내가 직접 로킨트로 가서 확인했어요. 물론 케빈이…… 당신이랑 같은 연구실에 있는 그 사람 말이에요. 그…… 그 사람이 세균 감염 때문에 너무 가까이서 볼 순 없다고 해서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혈색도 좋아보였고 경과가 좋다고 했어요.”

앰버는 더듬거리며 말했고 말할 때마다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멀쩡하다는 말에 안도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앰버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곁에 다급하게 쪼그려 앉았다.

“괜찮아요? 머리가 아프거나 그런 거 아니에요? 병원으로 당장…….”

“……흐흑…… 흑…… 팔은요? 케이의 팔은…… 팔은…….”

엘리자베스는 뿌예진 시야로 더듬거리며 앰버의 팔을 잡았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사방이 구분도 되지 않았다. 앰버의 목소리가 그 안개 같은 세상 어디선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운이 좋았다고. 깨끗한 곳에서 처치하니까 새살이 돋아서 팔은 자르지 않아도 되겠다고 케빈이 그랬어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다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앰버가 당황한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하려고 들었지만 허사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썩어가던 팔과 고름, 그리고 피를 떠올렸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몸을 떨던 케이도 떠올렸다.

“나 때문……. 나 때문이에요. 나만 아니었어도 그런 상황까지 가지 않았을 거예요. 내가 실력이 없어서.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서. 나는 의사가 되면 안 됐는데. 그랬는데…….”

내가 미래에서 본 몇 가지 지식을 억지로 꿰맞춰서 의사라도 된 척 굴었기 때문에—

그래서 케이 하커를 죽음의 위기로 내몰았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엉엉 울었다. 사탕을 빼앗긴 어린 아이처럼 바닥에 주저앉아서 말이다. 그러자 앰버가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나 때문이에요. 엘리자베스. 전부 나 때문이에요. 내가 두 사람을 사지로 내몰았어요. 내가 아니었다면 엘리자베스가 이런 일을 겪을 필요가 없었을 거예요. 케이도 그렇고요……. 그러니까 전부…… 전부……. 나 때문이에요.”

앰버마저 울기 시작했다.

“흐흑…… 흐흑…….”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훌쩍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앰버의 울음소리가 엘리자베스를 정신 들게 하는 촉매제와 같은 역할을 했다.

앰버 모건이 울다니!

시야가 조금씩 맑아지자 엘리자베스의 눈에 두세 걸음 뒤에 서서 담요를 들고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드워드가 보였다.

앰버의 품에 안겨 있던 엘리자베스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에드워드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에드워드가 얼른 담요를 엘리자베스에게 건넸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빨개진 얼굴을 보고 그녀의 눈물을 살짝 닦아주면서 그녀에게 담요를 둘러주었다.

“우, 울지 마요.”

엘리자베스는 과연 이 말이 지금 그녀의 입에서 나오기에 적절한 말인가 싶으면서도 이 아름다운 여자가 제 앞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니 그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뱉고 말았다. 그러자 앰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내가 전부 잘못했으니까, 내가 용서를 빌게요.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어요.”

앰버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 앞에 정말로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하얗게 질려서 고개를 저었지만 앰버는 멈추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겁에 질려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에드워드를 보았지만 에드워드는 어느새 앰버와 똑같이 눈이 새빨개져서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 대체!’

이 망할 놈의 혁명가들은 왜 이렇게 눈물이 많단 말인가!

아까까지 울고 있던 그녀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정말 미안해요. 애초부터 내가 두 사람 인생에 끼지 않았으면 두 사람은 지금보다 행복했을 거예요. 전부 내 잘못이에요……. 내가 케이를 애초에 이 일에 끌어들인 사람이에요. 케이는 혁명 따위에 관심 갖지 않고 엘리자베스와 영원히 행복할 수도 있었는데……. 내가 옆에서 계속 바람을 넣은 거예요. 그래요. 나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왠지…… 아뇨. 아니에요.”

엘리자베스는 무릎을 꿇은 앰버가 하는 말의 반은 못 알아들었지만 그녀의 마음만큼은 알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이 여린 혁명가가 과연 어떻게 될지 잠시 궁금해졌다.

이전 생에서의 앰버 모건은 대체 어떻게 되었던 것일까. 그녀의 인생 궤적도 엘리자베스를 만나 변하거나 악화되거나 가속될까?

엘리자베스가 그런 고민 속에서 뭔가 위로의 말을 건네려고 할 때였다.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검은 얼굴의 낯익은 남자가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

엘리자베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어색한 레본어로 말했다.

“……그 치료사로군.”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이름을 떠올려보았다.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나는 것은 단 하나, 이 남자가 이 저택에서 자신과 함께 의료 행위를 한 적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 의사로군요.”

엘리자베스의 말과 동시에 에드워드가 말했다.

“아루쉬.”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그 이름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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