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혼하러 돌아왔다 153화 (153/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53화

케이는 마차에 오르자마자 프란시스에게 물었다.

“정말 조지 왕자를 보고 왔습니까?”

프란시스는 케이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케이를 보며 물었다.

“그럼 내가 왕자님을 알현한 사실을 거짓으로 보비들에게 지어냈을 거라는 거니?”

“모를 일이죠. 지금 내 세상은 거짓과 음모, 위험한 비밀 따위로 가득하니까.”

케이의 말에 프란시스가 의아한 눈으로 케이를 보았다.

“무슨 뜻이니?”

“알 것 없습니다.”

케이의 대답에 프란시스는 한숨을 내쉬며 눈으로 케이를 훑었다.

“몸은 괜찮은 거야? 네가 왕립 병원에 누워 있을 때만 해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건 엘리자베스도 그랬지만.”

엘리자베스라는 단어에 케이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케이는 붉은 눈동자를 가진 괴 생명체를 떠올렸다. 그 안에 엘리자베스의 영혼이 있었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그 전에—

그런 종류의 폭주가 엘리자베스의 생명에는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인가?

케이는 당장이라도 마차를 돌려 케빈의 멱살을 잡고 싶은 것을 참았다. 좀처럼 보기 힘든 편인 케이 하커의 인내심은 엘리자베스가 경찰청에 잡혀 있다는 소식 덕에 발휘되고 있었다. 그가 날뛰면 엘리자베스가 위험해질 수 있으므로.

“하지만 그 아이는 정말 강해.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고 했는데 금방 털고 일어났어. 덕분에 경찰 조사도 금방 받게 되긴 했지만…….”

프란시스는 흐린 눈으로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프란시스를 힐끔 보았다. 케이는 그녀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눈치채고 프란시스의 손을 아주 잠깐 잡았다. 그리고 프란시스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그것을 놓았다. 벌레라도 만졌다는 듯이.

“……아버지는 생각만큼 고통스럽지 않게 갔어요.”

케이는 도무지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쏟아냈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거짓말들을 전부 그대로 말이다.

“과호흡이 와서 질식으로 죽었어요. 비명은 짧았고…….”

케이는 그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듯 은은한 조소를 띈 프란시스의 옆모습을 보며 자괴했다. 대체 왜, 그 거지 같은 인간의 죽음으로 인해 산 사람들이 거대한 짐 덩어리를 안은 것처럼 고통스러워야 한단 말인가. 왜 세상은 결국은 짐을 많이 진 사람이 계속해서 짐을 더 질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었단 말인가.

케이는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신문에서 뭐라고 했든 그건 다 거짓말입니다. 질식하기 직전에 아버지의 눈은……. 그 눈은…… 하늘을 보고 있었고 마치 천국을 향한 듯…….”

그 순간 케이의 손을 프란시스가 낚아챘다. 프란시스는 붉어진 눈으로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옥에 떨어졌겠지. 눈은 천국을 보고 있었더라도 그 다리는 반드시 지옥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었을 거다, 아가. 걱정하지 마라.”

프란시스가 그렇게 말하며 케이를 아가라고 불렀으므로 케이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미친 여자. 이 미친 여자. 케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쥐었다.

케이는 회색 재 가루가 되어 흩날리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조그마한 창 너머로 흘러들어오던 그의 아버지.

‘벼룩 새끼.’

‘사생아를 먹이고 재워줬더니 은혜를 모르는구나.’

‘그 공녀 년을 반드시 구워 삶아와. 그년이 우리를 왕족의 인척으로 만들어줄 거야.’

케이는 아버지의 끔찍한 죽음 앞에서도 조금도 그를 연민하지 못했다.

로버트 하커가 케이 하커에게 저지른 가장 큰 만행은 바로 이것이었다. 케이의 영혼을 타락시켰다는 것.

엘리자베스는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했지만 진짜 괴물은 그런 게 아니었다. 케이는 잇새로 흘러나오는 실소를 뱉어내며 붉어진 눈으로 프란시스에게서 제 손을 빼냈다. 케이의 증오에 찬 눈을 바라보던 프란시스가 말했다.

“조지 왕자에게서 네 아버지의 시신을 인계받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 갔다 온 거야. 직접…… 직접 시신을 수습할 생각이 없다고 했더니 왕실 화장터에서 화장을 해서 뼛가루를 전달하겠다고 하더구나.”

그랬다. 그런 불명예스러운 죽음에도 산 사람들의 노고가 들어가는 것이다. 케이는 아버지의 불탄 시체를 거두고 어딘가에 담아 옮긴 뒤에 보관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넌 이게 무슨 뜻인지 아니?”

프란시스가 갑자기 물었다. 케이는 지친 얼굴로 프란시스를 볼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프란시스가 말했다.

“조지 왕자가 너와 척을 질 생각이 없다는 뜻이야. 너, 그리고 나를 로버트 하커의 유족으로 여긴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물론 켄드릭이 노름에 빠져 연락이 되지 않았던 탓도 있겠지만.”

프란시스의 말에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프란시스는 말을 계속해서 이어가며 마부석으로 통하는 마차 창문을 열었다.

“하지만 척은 지지 않더라도 얼마나 적극적으로 행동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야. 심지어 레트니는 아직 죽지 않았어. 물론 곧 죽을 거라고들 하더구나. 하지만 너도 알지 않니? 사람의 명줄이란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 확실하게 못을 박아놔야지. 토비! 얼마나 남았니?”

“이제 몇 분 후면 도착해요, 마님.”

토비의 대답을 들은 프란시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창문을 닫았다. 프란시스는 창문을 닫자마자 케이를 보았다. 케이가 피로에 지친 얼굴로 말했다.

“……조지 왕자에게 거래를 시도하란 말이군요.”

“그래. 조지 왕자를 볼 수 있는 순간이 올 거다. 반드시 그에게 거래를 시도해. 넌 가진 게 많아. 특히나…….”

“무역회사 지분 같은 거요.”

케이는 비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조지 왕자가 원하는 것이 과연 무역회사의 지분일까.

케이는 울렁거림이나 갈증 따위가 살짝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차분해진 머리로 케이는 어떻게든 생각을 하려고 했다.

흰 색 털, 붉은 눈동자, 황소 같은 몸집. 이런 것 말고—

뽀얀 피부, 금발의 머리카락, 푸르고 신비로운 눈동자. 이런 것도 말고 말이다.

하지만 생각이 이어지려고 하면 언제나 엘리자베스의 말들이 떠올랐다.

‘사랑해…….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하지 않는 데에는 젬병이야.’

그건 거짓말이었을까? 아니면 이번에도 거짓말을 가장한 진실이었을까?

케이는 그런 생각들 속에 갇혀 도무지 굴러가지 않는 이성을 억지로 굴려가며 말했다.

“니콜슨 공작. 레트니의 동생 말입니다. 공작이 최근 움직임을 보이던가요?”

케이의 질문에 프란시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래. 얼마 전에 신문 인터뷰도 했고 요새 레트니에게 병문안을 가장 많이 가는 사람이야. 항간에서는 조지 왕자의 왕위계승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소문도 있어.”

케이는 프란시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조지 왕자도 공작을 탐탁지 않아 하긴 마찬가지일 거구요.”

케이는 프란시스를 바라보았다. 프란시스의 눈에는 아까 살짝 고인 눈물 같은 것은 완벽하게 사라진 뒤였다.

“공작이 신시 주식회사에 지분이 좀 있어요.”

“좀?”

프란시스의 눈썹이 꿈틀하는 것을 본 케이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좀’ 가지고는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누굴 닮았기 때문에 웃은 것이었다.

계략과는 가장 거리가 먼 듯한 맑고 순수한 얼굴을 하고도 거짓과 음모, 계략에 능한 여자. 아름다운 얼굴로 위험한 상대와 맞서 싸울 때는 언제나 불의를 자처하는 여자.

하지만 케이는 자신의 인생을 불행으로 빠뜨린 두 여자가 닮았다고 여기는 스스로가 싫어서 얼른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조금이라고 하기엔 꽤 많죠. 그 많은 자금이 전부 어디에서 나왔는지 궁금할 정도니까요. 신시 주식회사에 가진 지분을 아는 것만으로도 조지 왕자에게는 기회가 될 겁니다. 그리고 조지 왕자는 작은 기회를 큰 힘으로 만들 줄 아는 남자죠.”

케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차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마부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비였다.

“거의 도착해가요……. 도련님, 잘 다녀오셔야 해요.”

얇은 나무 벽으로 전달되는 토비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케이가 나무 벽을 주먹으로 톡톡 쳤다.

“그래, 이 꼬맹아. 남자가 되려면 멀었구나. 이깟 일로 떨다니 말이다.”

“치…….”

프란시스가 긴장된 얼굴로 케이를 보았다.

“정말 잘 할 수 있는 거니? 정말?”

케이는 프란시스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곤 프란시스의 주머니를 가리키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 궐련 전부 가져다 버리세요. 별로 좋지 않은 냄새가 나니까요.”

“……하나만 피운 거야.”

“그래도요.”

케이의 말에 프란시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잔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건강하게 나와야 해. 반드시. 물론 그렇게 많이 피를 흘리고도 살아 있는 걸 보면 너는 앞으로도 건강할 것 같다만.”

케이는 프란시스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다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왕립 병원에서는 저를 어떻게 빼낸 겁니까?”

제 아무리 귀족이라도 국왕을 찌른 범인을 쉬이 자택으로 돌려보내줬을 리가 없다. 그건 분명 프란시스가 한 일이리라.

“나도 이제 공장장이야. 그 정도 돈은 융통할 데가 있단다.”

“제가 변제해드리죠. 얼마입니까.”

“됐어.”

프란시스는 그렇게 말하다가 케이의 표정을 보고 머뭇거리며 말했다.

“……경찰 조사를 무사히 마치면……. 그러면 그때…….”

케이는 단호하게 재킷 안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 엄청난 액수를 써서 프란시스에게 내밀었다.

“이건 너무 많…….”

“그리고 하나 더. 멜니아에 있는 제 신탁도 알려드리죠.”

“케이 하커!”

프란시스는 케이가 지갑 속에서 꺼내는 종이를 보며 하얗게 질렸다. 케이가 지금 자신에게 미리 상속을 하려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케이가 오만하고 건방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신탁의 돈 절반만 있어도 내 인생을 망친 두 여자가 행복하게 살기에는 넉넉한 돈일 겁니다. 나머지 절반은 엘리자베스에게 처분하라고 하세요. 그 여자가 그걸 어디에 줘야 할지 알 거예요.”

그건 앰버와 에드워드, 그리고 아루쉬의 망명자금으로 따로 모아둔 것이었다. 케이가 저 안에서 나오지 못한다면, 그리고 무슨 약이라도 먹고 헛소리라도 중얼거려 그들의 이름을 분다면 필요할 돈이었다.

케이는 재킷 안주머니에 독약을 숨겨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늦었다.

마차가 멈췄다. 토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시스가 케이의 팔을 잡았다. 케이가 그것을 떼어내며 프란시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어때 보이던가요.”

케이는 엘리자베스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며 가슴에서 끔찍한 통증을 느꼈다.

“괜찮았어. 의사도 괜찮다고 했고. 아마 지금도 괜찮을 거야. 다만…… 그 아이랑 같이 떨어진 남자는 머리에 문제가 좀 있다고 하더구나.”

“같이 떨어진 남자?”

케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 케빈이랑 아는 사이 같으니 너도 알지도 모르지. 엘우드 밀이라던가. 그 사람은 머리에 문제가 있다는 걸 보니 엘리자베스는 천운이었던 게지. 얼마나 다행이니.”

케이가 프란시스의 말을 들으며 삐뚤빼뚤한 미소를 지으며 마차 좌석에 몸을 기댔다. 그가 중얼거렸다.

“그래요. 엘우드 밀 말이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