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52화
3장
꼬박 2일간의 취조 내내 엘리자베스는 스스로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그 2일 동안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꿈을 여전히 구분하지 못했다.
전부 거대한 거짓말인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도, 그러나 자신은 죽지 않았다는 것도—
그리고 전생에서처럼 불타 죽어버린 로버트 하커도.
엘리자베스의 몸은 오히려 전보다 더 쌩쌩하고 날아갈 것 같았지만 정신 건강은 바닥을 기었다. 그녀는 꿈속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악몽을 꿨다. 불타기 시작하는 로버트 하커,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윌리엄 조쉬, 썩어가던 케이의 팔.
케이 하커. 그는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취조를 하루 마치고 나자 발신인을 알 수 없는 쪽지가 그녀 앞으로 전달되었다.
[‘그’는 멀쩡해요. 가장 궁금한 게 이거일 것 같아서. 지켜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가 머무는 작지만 편안한 침대가 있는 방으로 온 쪽지였다.
3개월하고도 보름 전에 기존의 경찰 청사가 불탄 후, 리오든 경찰청 소속 보비들은 건물을 보수하여 쓰면서 새로운 장소를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건물에서 의회 청사에 있던 국회의원들을 조사받게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조지 왕자의 명 때문에 그녀를 포함한 의회 청사에 있던 귀족과 자본가들은 컬로든 궁에 딸린 별채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궁의 철통같은 경계를 뚫고 전달한 쪽지치고는 참으로 약소한 내용이 아닐 수 없었지만 쪽지의 수신자가 쓴 말대로—
‘그’는 멀쩡해요.
엘리자베스는 이 문장 하나로 남은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대부분의 국회의원의 취조는 그래봤자 30분을 넘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엘리자베스에 대한 취조는 같은 내용으로 몇 시간씩 이어졌고 결국은 이틀을 꽉 채웠다.
엘리자베스를 취조한 이는 경찰청 소속으로 보이지 않는 왕궁 스타일의 신사복을 입은 사내들이었다. 물론 엘리자베스가 그들을 경찰청 소속이라고 여기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복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어쨌든 무정부주의자들의 요구서 따위를 읽는 데에 동원되었던 엘리자베스에게 과할 만큼 매너를 지켰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
특히나 그 호칭.
엘리자베스는 앰버로 추정되는 이가 쓴 쪽지를 받고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린 다음 날 아침, 미간을 찌푸리며 상대에게 물었다.
“저는 이제 클레몬트가 아닌데요.”
그 말에 상대가 다정하게도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건 모르는 바지요? 불운하게도 아직 병중에 계신 국왕 폐하의 뜻을 받들어 조지 왕자님께서 엘리자베스 양의 복권을 추진 중에 계시니까요.”
조지 왕자님. 국왕 폐하.
엘리자베스는 궁내의 사정을 알고 있다는 듯이 구는 상대를 보며 이 상대가 어느 쪽의 사람일지 가늠해봤다. 왕자인가. 국왕인가.
남자는 엘리자베스에게 과할 정도로 친절할 뿐 아니라 그녀를 몰아붙이지도 않았고 그녀의 진술 대부분을 믿는 듯했다. 그녀가 윌리엄 조쉬와 친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이런 과격한 혁명가인 줄은 몰랐다고 한 것이나, 케이 하커의 행동에 대해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 것 모두 말이다. 특히나 뒷부분에 대해서는 오히려 기묘하게도 케이에게 유리하게 느껴지는 방향의 유도심문을 하기도 했다.
“케이 하커 씨가 국왕 폐하와 눈을 마주치는 것 같은 그런 낌새를 채진 않았습니까? 마치…… 모종의 협의를 한 것처럼 말입니다.”
모종의 협의?
누구와 누구의 협의 말인가. 사냥꾼과 제물 사이의 협의?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상대가 던져주는 떡밥이 아무리 수상하더라도 믿지 않을 재간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것…… 같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대답하며 쪽지 속의 내용을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았다. 지켜보고 있다. 걱정하지 말아라. 그 쪽지 속에는 진술을 어떤 방향으로 해 달라는 요구나 지시는 없었다. 그 말은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구명을 위해 과한 계획을 세우거나 헛된 모략을 꾸밀 필요가 없다는 뜻인 것 같기도 했다. 쪽지를 보낸 이가 앰버가 확실하다면, 그리고 케이 하커가 위험에 처한 상황이라면, 그래서 케이 하커의 혐의를 벗기기 위해 판을 뒤집을 만한 진술이 필요하다면 앰버는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쪽지에 진술 방향을 적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케이 하커가 위험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케이 하커는 레본의 국왕에게 칼을 꽂은 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나를 살리기 위해서.’
엘리자베스는 그의 헛된 계획을 머릿속으로 생각해보며 절망했다. 국왕을 찌르고 적들을 교란 시키고 솔튼 빌리스를 이용해 엘리자베스를 탈출시키려고 했다니. 멍청한 자식. 나는 절대로…….
절대로 너 없이는 혼자 나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케이 하커는 엘리자베스를 믿는 법이 없는 남자였다.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에 분노했고 그러면서도 케이 하커가 멀쩡하다는 말이 거짓일까 봐 절망했다.
이 남자가 엘리자베스에게 이토록 관대한 이유가 사실 케이가 이미 죽었기 때문이라면 어떡하지. 앰버가 그저 엘리자베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어쩌지. 네가 없는 세상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을지, 계속 살아가고 싶기는 한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는데.
엘리자베스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절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케이의 죽음에 대한 작용 같은 게 아니었다. 목적을 잃은 삶의 주체가 느끼는 고통이었다.
이제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유로도, 케이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도, 케이의 불행을 목도하겠다는 변명으로도 살아갈 수 없었다. 이제 케이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일찌감치 죽는 게 나았을 것이다. 몰록의 힘이 그녀를 지배하기 전에 말이다. 그리하여 모두의 운명을 이렇게 나쁜 쪽으로 바꿔놓지 않았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 지금 당장 죽을 수는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잘못된 진술을 하거나 그로 인해 뒷조사를 당하면 앰버 모건이 꾸미는 참정권 운동가들이 의심을 받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란시스. 어느샌가 엘리자베스의 삶의 큰 동반자가 된 그녀는 지금 불안정한 상태였다.
어제 아주 짧은 시간 면회할 수 있었던 케빈은 프란시스가 조금 불안정하니 혹시라도 약이나 가루, 연초나 술 같은 것을 그녀가 잘 숨겨놓는 장소가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가 약을 태우기 위해 뒤졌던 장소들을 생각나는 대로 다 말해줬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가 보고 싶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품 안에서 오랫동안 울고 싶었다. 그로 인해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것이…… 어쩌면 그것이 그녀의 새로운 삶의 지향점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살아남기 위해 이틀 내내 그녀를 취조하는 상대의 정체를 고민했다. 정보는 상당히 희박했다. 그리고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100% 확신할 순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가 조지 왕자의 심복이라는 데에 걸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중태에 빠져 있다는 레트니가 자신의 심복으로 하여금 이렇게 철저히 조사하도록 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조사가 조지 왕자의 휘하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건데—
그럼 조지 왕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엘리자베스는 별로 창의적이지 못한 질문들에 꼬투리가 잡히지 않을 법한 대답만 해가며 이틀을 버텼다. 그럼에도 고문이나 강압적인 수사는 일체 없었다. 전에 경찰청에 잡혀갔을 때에 비하면 너무 손쉬운 진술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이틀 만에 풀려났다. 왕실 정장을 입은 사내가 그녀에게 취조가 끝났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도무지 사내의 말을 믿지 못했다.
“뭐라구요……?”
“취조가 끝났다는 말입니다. 나가셔도 좋습니다, 레이디. 아, 마차를 가지고 오지 못하셨지요? 왕립 병원에서 바로 옮겨지셨으니 말입니다. 왕실 마차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사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하마터면 왜냐고 물을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어디로 가야할지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로킨트 저택으로 가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왠지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왕실 놈들을 믿을 수가 없었고 꼬리를 붙인 채로 프란시스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마차를 사양하며 말했다.
“저는 걸어갈 겁니다. 학술원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는데 걸어서 금방이거든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시군요. 동행이 필요하신가요?”
“아뇨. 괜찮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걸어서 천천히 별채를 나섰다. 하지만 걸음은 결국 빨라져 종래는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이전 생에서 아버지의 공개 재판 소식을 들었던 날처럼 그녀는 헉헉거리며 컬로든 궁 정원을 달렸다. 근위병으로 추정되는 이가 엘리자베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 * *
케이 하커가 보비들에게 둘러싸인 채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정원에는 마차와 함께 토비, 그리고 프란시스가 서 있었다. 케이에게 시종일관 비꼬는 말투로 일관하던 경사 하나가 프란시스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부인, 죄송하지만 리오든 경찰청 호송용 마차가 나가는 길을 막고 계십니다.”
프란시스는 경사의 말에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던 모자를 쓰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을 호송용 마차 같은 데 태울 수 없으니 길을 막고 있는 겁니다, 경사.”
내 아들.
프란시스의 말에 케이의 눈썹이 꿈틀했다.
경사가 말했다.
“부인. 단단히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프란시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부인이라니! 내가 이혼한 것을 모르는 이가 리오든에 있던가요? 심지어 로버트 하커는 죽었어요! 그런데 왜 내가 부인입니까?”
프란시스의 말에 보비들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경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케이 하커 씨가 대체 왜 부인의 아들입니까?”
경사의 질문에 프란시스가 케이 하커를 노려보았다. 프란시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경사에게 말했다.
“케이 하커는 지금 아프고, 어른은 마땅히 아이를 보호해야 하니까 그렇죠.”
거구의 남자를 아이라고 일컫는 데에 주저함이 없는 프란시스를 보며 경사들이 ‘역시 마녀가 미친 게 맞다’며 수군거릴 때였다. 프란시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잘 들어요. 나는 조지 왕자님을 알현하고 오는 길입니다. 이 조사의 책임자가 조지 왕자님이더군요. 왕자님께서는 제가 제 아들을 제 마차로 궁으로 데리고 가는 것 정도는 허락해주셨어요. 만약 내 아들을 호송용 마차에 태우면 그건 왕자님께 항명하는 겁니다.”
보비들은 프란시스의 말을 들으며 비웃고 있었지만, 마지막 말에는 전부 웃음기를 거뒀다. 어느 경사가 뭔가 항의하려고 들자 프란시스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궁금하면 확인해보셔도 좋겠군요, 경사. 하지만 나라면 그러지 않을 거예요. 대신에 조용히 호송용 마차를 끌고 하커가의 마차를 따라오겠지요. 그걸로도 이틀을 꼬박 기절해 있던 남자와 이 늙은 여자를 감시하기엔 충분할 테니까.”
프란시스의 마지막 말과 동시에 토비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프란시스는 고고한 몸짓으로 토비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고는 마차에 탔다.
보비들 중 아무도 그들을 말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