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50화
탕!
탄환은 표적의 어깨를 살짝 스치는 정도였다. 그러나 몰록이 느끼는 고통은 꽤 컸던지 신음을 흘렸다. 몰록은 탄환이 스치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케이를 물고 있던 이빨을 벌려 풀려난 케이가 스르르 쓰러졌다.
엘우드는 이를 악물었다. 엘우드가 또다시 방아쇠를 당기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 케빈이 엘우드의 머리채를 잡고 당겼다.
“이 미친 삼촌아! 네가 뭘 쏘는지 아냐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엘리즈라고, 엘리즈!”
“엘리즈가 누군데 대체!”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케빈이 엘우드의 머리채를 잡고 뒤흔드는 사이에 산탄총이 잘못 발사 되었다. 탕! 케빈이 놀라서 뒤로 나자빠졌다.
엘우드가 멍한 얼굴로 케빈을 보았다.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그 여자는 그……. 그 이상한 공녀잖아. 나랑 같이 논문을 썼다고 신문에 난……. 난 그게 네가 한 짓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냐?”
케빈이 뭔가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찌이잉—
햇살이 마치 바늘처럼 케빈의 눈동자를 찌르고 들어왔다. 케빈이 눈을 가늘게 뜬 그 짧은 순간 두 사람이 서 있는 파편이 만든 언덕배기로 뭔가가 뛰어올랐다.
하얀 털, 붉은 눈동자, 그리고 거대한 몸집.
케빈은 대체 저 안에 엘리자베스가 어떻게 들어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녀의 영혼은 얼마나 몸을 굽히고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리며 얼마나 고통스러워할까.
케빈이 그런 감상에 빠져 있는 사이에 엘우드가 몰록의 몸에 치여 순식간에 케빈의 옆을 스쳐 바닥으로 떨어졌다.
파편더미의 높이와는 관계없이 저 반대쪽은 다이너마이트 폭발 크레이터로 인해 움푹 파여 있었기 때문에 낙하 높이가 엄청났다.
케빈은 몸을 돌려 외쳤다.
“엘우드! 안 돼!”
하지만 그건 이미 엘우드가 몰록의 품에 안겨 낙하하기 시작한 때였다.
저 망할 삼촌!
케빈이 손을 뻗었다. 닿을 리가 만무했다.
쿠궁!
엄청난 낙하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케빈의 시야를 뿌옇게 채웠다. 케빈은 숨조차 쉬지 못하고 두 생명체의 낙하지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와 엘우드가 죽었어.
케빈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케빈의 머릿속에 다른 가설이 떠올랐다.
몰록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케빈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다급하게 엘우드가 떨어뜨린 산탄총을 찾았다. 그것은 파편 더미 위에 잘 안착해 있었다. 케빈은 어설픈 손놀림으로 산탄총을 먼지 구덩이 쪽으로 겨눴다.
조금씩 안개 같은 먼지들이 걷히기 시작했다.
케빈이 침을 삼켰다.
이윽고 먼지가 걷히고 난 뒤 두 개의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망토에 뒤덮인 하얀 피부에 빛나는 금발을 가진 남자와…….
길고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가녀린 여자였다.
“흐흑…….”
케빈은 그것을 보는 순간 울기 시작했다.
케빈은 숨을 겨우겨우 내뱉었다. 케빈은 뒤를 돌았다.
“잭! 스윈든! 도와줘……. 흐흑……. 흐흑……. 여기 공녀님이…… 공녀님이…… 쓰러지셨어…….”
잭이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공녀님? 공녀님이 거기 있어? 괴물은?”
케빈이 힘이 풀린 다리로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괴물은 없어……. 괴물은 가버렸어. 사라졌어.”
여기엔 공녀님뿐이야.
케빈은 자신이 엘리자베스를 죽일 뻔했다는 사실에 더 펑펑 울었다.
소리 내 울기까지 하는 케빈의 등 뒤에서 뭔가가 움직였지만 케빈은 잭이 걸어오는 소리에 정신이 팔려 이상한 기척은 느끼지 못했다.
* * *
꿈을 꿨다.
그의 꿈속에는 엘리자베스가 나왔다. 그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케이의 꿈속에는 대부분 엘리자베스가 나왔다. 열아홉 때는—물론 자의는 아니었지만—엘리자베스를 향한 더러운 망상으로 침대 시트를 적시기도 했고 약혼하고 나서는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질려버려 떠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므로 케이에게 엘리자베스가 나오는 꿈은 언제나 악몽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악몽이라기보다 정말이지 이상한 꿈이었다.
특히나 엘리자베스의 목소리는 들리는데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고개를 들 때마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얼굴이라는 점에서.
“자해행위를 하는 중인 거야?”
꿈속에서 케이 하커는 케이가 거울을 통해 볼 때보다 훨씬 더 기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케이는 자신의 삐뚤어진 코를 거울을 통해 마주하는 게 싫어 제 얼굴을 오랫동안 보지 않았지만 제 얼굴이 평소에 어떤 모습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리오든의 공장 노동자의 얼굴. 대체로 피로에 쩌들어 있고 품위라곤 찾아볼 수 없으며 거친 피부만큼이나 거친 말투를 쓸 것이 분명해 보이는 하층민의 얼굴 말이다.
그러나 꿈속에서의 케이는 달랐다.
“그렇겠지. 귀족 나리들께서는 노동자들처럼 숯 검댕을 묻히거나 음식냄새를 풍기며 돌아다니지 않으니까.”
케이는 피로가 아니라 열등감에 쩌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고—
“잘 하는 짓이야. 안 하던 짓을 하니까 탈이 나지.”
얼굴에는 다급함을 잔뜩 안고 있었으며—
“우린 보통 부부들과는 달라. 알고 있잖아.”
무엇보다도 하층민의 말투가 아닌 귀족의 말투를 흉내 내고 있었다. 그것도 안간힘을 써서.
케이는 자신이지만 자신이 아닌 상대의 목소리를 들으며 로킨트 저택으로 추정되는 곳의 소파에 앉아 있는 역할이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내내 케이의 귓가에는 엘리자베스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다른데? 너는 하고 싶지도 않은 결혼을 내가 공작가의 힘으로 억지로 강요했으니까?”
엘리자베스가 울먹거릴 때마다 케이 하커의 위장이 울렁거렸다.
케이는 자꾸만 부부, 결혼 따위의 말이 나오는 것을 들으며 이 꿈속 세계에서는 케이와 엘리자베스가 결혼한 부부일 거라고 추측했다.
케이 하커는 자신의 욕망이 만들어낸 세계의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 그 와중에 저런 일그러진 표정을 하며 저런 열등감에 쩌든 말을 내뱉는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만들어놓은 망상 속에서도 멍청한 짓 밖에 할 줄 모르는 케이 하커라니.
케이는 자신이 거대한 모순 속에 살고 있다고 여겼다.
“건방진 자식.”
그리고 어디선가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케이 하커는 격하게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랬다. 케이 하커는 건방진 자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후로는 건방진 자식이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생활을 망치는 광경이 지루하게 펼쳐졌다. 꿈속의 케이 하커는 엘리자베스가 만들던 손수건을 찢어버리고 건방진 표정과 삐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차가 준비됐습니다, 주인 나리. 마님.”
곧 시선이 움직였다. 케이와 엘리자베스 간의 짧은 대화가 이어지고 메리가 다시 문을 노크했을 때는 문이 활짝 열렸다. 메리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뭔가를 말하자 꿈속의 광경은 3층에서 계단으로, 계단에서 2층으로 바뀌었다.
메리가 속삭였다.
“너무 울지 마세요. 마님. 아시다시피 나리께서는 표현에 서투신 편이에요. 분명 아기님이 찾아오시면 두 분 사이가 좋아지실 거예요.”
메리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조소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 하커는 나와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해. 그 아이가 불행할 거니까. 불행한 생명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기 싫은 거지.”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와 동시에 꿈속의 장면이 또 살짝 바뀌었다. 방 안의 풍경이 차례대로 비춰지다가 마지막으로는 한 여자가 보였다.
기다란 금발에, 하얀 피부, 귀족적인 혈통을 자랑하는 파란 눈을 가진 여자. 그러나 그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도 비탄과 슬픔에 젖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여자.
케이는 그 여자의 이름을 알았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하지만 이름은 말이 되어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 꿈은 케이에게 목소리를 허락하지 않은 듯 했다.
여자의 등 뒤에서 메리가 그녀의 옷을 하나하나 벗기기 시작했다. 페티코트를 벗고 코르셋과 속바지만 남은 차림의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거울을 볼 때마다 궁금해져. 케이 하커의 눈에는 대체 내가 어떻게 보일지.”
거울?
케이의 머릿속이 뒤흔들렸다. 조인 코르셋 위로 드러난 말랑한 윗가슴과 하얀 쇄골 따위가 케이의 눈에 들어왔다.
이건 대체 무슨 망상일까.
그랬다.
케이가 보고 있는 것은 거울이었다.
그렇다면 케이는 꿈속에서 엘리자베스인 것이었다.
메리가 말했다.
“충분히 아름다우신 걸요. 정말이에요. 어머, 이쪽에 바느질이 튿어졌어요. 새로운 코르셋으로 바꿔드릴게요.”
“아름다움의 문제가 아니야……. 정말이지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림과 동시에 메리가 능숙한 손길로 엘리자베스의 코르셋 끈을 풀어냈다.
툭.
엘리자베스의 코르셋이 땅에 떨어졌을 때였다.
케이는 꿈에서 깨어났다.
* * *
케이가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익숙한 천장이었다. 케이는 몸을 일으키고 이곳이 로킨트 저택 3층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이 아직 꿈속에 있는 게 아닐지 의심했다.
하지만 꿈과 다른 것은 3층에 있는 것은 제 무의식이 멋대로 상상해낸 엘리자베스의 나신 따위가 아니라 케빈 퍼킨이라는 것이었다.
케빈은 물을 따르다가 케이의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았다.
케빈의 눈이 커졌다.
“일어났어요?”
케빈의 물음에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끔찍한 갈증과 배고픔을 느꼈다. 속도 울렁거렸다.
“물……. 물 좀.”
케이의 말에 케빈이 얼른 물컵을 케이에게 내밀었다. 케이는 물컵 한 잔을 순식간에 비웠다. 갈증이 채워지자 배가 고팠다. 속이 울렁거리면서 배가 고프다니.
케이는 흔치 않은 일에 황당해하며 케빈에게 먹을 게 없는지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케빈이 먼저 촉촉한 빵을 내밀었다. 케이는 어떻게 그렇게 제 맘을 꿰뚫어보는지 물어볼 새도 없이 빵을 삼키듯 먹어 치웠다.
케빈은 그런 케이 옆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케이를 가만히 보았다. 케이는 빵을 세 개쯤 먹어치우고 물 한 잔을 더 마신 뒤에야 케빈의 그런 표정을 눈치챘다.
케이가 중얼거렸다.
“표정이 왜 그래?”
“아뇨. 그냥…….”
케이의 얼굴에 빗금이 갔다. 케이의 머릿속에 불길한 상상이 가득 찼다. 케이가 말했다.
“내가 얼마나 잤지?”
“이틀 정도…….”
“…….”
케이는 이불을 들췄다. 그러자 여전히 제 몸통에 붙어 있는 팔과 다리가 보였다. 둘, 둘. 숫자는 전과 동일했다. 천운이었다.
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케빈이 이불을 더 멀리 치워주었다. 케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쩡하게 일어설 수 있다. 그 말은…….
케빈의 표정이 어두운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란 말이었다.
케이가 케빈의 멱살을 쥐었다. 케빈은 힘없이 케이에게 거의 들어올려지다시피 해 한쪽 벽면에 몰아붙여졌다.
“큿……!”
케빈이 짧은 신음을 내뱉자 케이가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분노한 목소리에 케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케빈이 머리를 헝클였다.
“공녀님은 살아 있어요. 살아 있다구요. 진짜로…… 지금은…….”
지금은?
케이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