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49화
케이가 헛소리를 하기 시작한 것은 케빈과 잭, 스윈든이 서로 갈라진 직후부터였다.
스윈든은 이 거구의 남자가 처음 입을 열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기뻐했다.
“……케이…… 케이에게…….”
스윈든은 밝은 목소리로 잭에게 말했다.
“잭. 이 남자가 정신을 차리려는 것 같은데? 이제는 내가 들지 않고 혼자 걷게 해도 되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잭은 스윈든의 말에 여전히 축 늘어져 있는 케이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야, 누가 봐도 여전히 정신이 없잖아.”
잭이 그렇게 말하며 케이의 얼굴 옆으로 손가락을 가져다댔을 때였다. 케이가 또 다시 입을 열었다.
“내 편지……. 내 편지가 너에게……. 갑작스러울까…….”
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괜찮수? 이봐요. 정신이 드는 거요?”
잭의 물음에 케이는 살짝 눈까지 떴다. 스윈든이 밝게 말했다.
“거봐! 정신이 드는 것 같다니까!”
그러나 스윈든의 밝은 목소리 사이로 케이가 말했다.
“너에게 갑작스러울까 봐 걱정이야.”
“뭐요? 나한테 뭐가 갑작스럽다고?”
잭이 그렇게 물었을 때였다. 갑자기 스윈든의 뒤쪽에서 파도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잭과 스윈든이 둘 다 놀라서 뒤를 돌았다. 그러자 천천히 잭과 스윈든의 발 아래로 뭔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줌 줄기처럼 시작된 옅은 물의 흐름이었으나 잭과 스윈든은 수개월간의 지하로 생활로 알고 있었다.
“누가 물을 틀었어!”
“누가 물을 틀었어!”
잭과 스윈든의 목소리가 동시에 지하수로에 울려 퍼졌다. 잭은 재빨리 스윈든에게 케빈이 돌아간 길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위로 가는 길은 저쪽이 제일 빨라! 빨리!”
스윈든이 허겁지겁 케이를 업고 발을 놀리기 시작했을 때에도 케이는 중얼거렸다.
“……나, 나는 언제나 너를 보고 있었는데, 너는 나를 단 한 번도 봐주지 않았으니까…….”
케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스윈든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말했다.
“이 사람 이상해! 아까부터 자꾸 나한테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하는 것 같은데? 헛것이 보이는 거 아니야? 내가 보니까 사람은 죽기 전에 늘 헛것이 보이는 것 같아. 몸에서 영혼이 반쯤 떠나기 시작했다는 증거지! 이 남자, 당장 케빈에게 보여줘야 돼!”
잭이 외치자 스윈든이 더더욱 공포에 질린 얼굴로 뛰기 시작했다. 사람이 죽으면 순식간에 온몸의 구멍이 열려서 온갖 분비물이 스윈든에게로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젠장! 이거 이제 한 벌 남은 건데!”
“지금 그딴 게 문제야?”
“그럼 뭐가 문젠데!”
“공녀님이 아끼는 남자라잖아! 너 공녀님이 누군지 잊었어?”
“우리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주신 분이지! 이 옷을 선물해주신 분은 아니고!”
스윈든은 그렇게 말하며 속도를 냈다. 잭은 옷 때문에 속도를 내는 스윈든이 어이가 없어서 뒤뚱거리며 통로 저편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스윈든의 뒷모습을 보며 실소했다. 잭은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보았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왔다.
대체 누가 이제는 쓰지 않는 하수도로 물을 흘려보내게 지시한 걸까?
조지의 군대일까? 지금이라도 무정부주의자들이 도망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잭은 불길한 얼굴을 하고 스윈든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도 스윈든의 등에 업힌 남자의 입에서는 계속 헛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때문에 내 세상은 매일매일 더 나아져. 너 때문에 행복이 뭔지, 설렘과 충만함이 뭔지 배워가는 요즘이야, 케이 하커.”
스윈든과 잭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남자는 계속해서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스윈든이 헉헉거리며 말했다.
“이젠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는데?”
잭은 스윈든의 뒤를 쫓으며 어설프게 성호를 그렸다.
잭은 생각했다.
’신이시여. 저 남자를 도우소서.’
하지만 사실 잭은 신을 믿지 않았다.
남자는 무신론자 두 명이 자신을 위해 신에게 기도하는 동안 계속해서 자신의 기도문을 외웠다. 지난 3개월을, 혹은 지난 2년을, 아니 그냥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를 만난 이후의 생애 전체를 견디게 해주었던,
케이 하커의 기도문을.
케이 하커의 기도문은 이렇게 끝났다.
“사냥꾼들이 내 얼어붙은 시체를 발견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거니까, 꼭이야. 꼭.”
“으아아아! 뛰어, 뛰라고! 물이 계속 차잖아!”
잭의 비명소리 속에서 케이 하커는 중얼거렸다.
“너의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케이는 눈을 떴다.
파란 하늘이 케이를 맞이했다.
케이는 이곳이 천국일지 지옥일지 생각했다. 지옥이라면 이곳에는 로버트 하커가 있으리라.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눈을 감아야 했던 그의 아버지. 그러나 거기엔—
“이봐요. 괜찮수?”
“아까부터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예요!”
잭과 스윈든뿐이었다.
케이는 자신을 둘러싼 잭과 스윈든의 얼굴이 여러 개로 겹쳐 보이는 것을 보며 다시 눈을 감았다.
* * *
“엘우드 밀! 엘우드으으으으 미이이이이일!”
그리고 다시 떴을 때는 그 이름이 들려왔다.
엘우드 밀.
엘리자베스가 닮고 싶다고 한 남자 말이다. 케이는 이곳이 지옥이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그렇다면 엘우드 밀이라는 남자도 지옥에 온 것일 테니 말이다.
케이는 이제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는 몸을 움찔거리며 일으켰다. 상체를 살짝 일으켰을 뿐인데 온몸이…….
찢기는 것 같았다.
케이는 직감했다. 절대로 살 수 없을 것이다. 감이 좋지 않았다. 온 몸의 마디 하나하나가 그의 몸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고 열감 때문에 상황 파악이 전혀 되지 않았다. 감각은 무뎌져서 고통이라는 것도 뭉텅이로 다가올 뿐이지 어디가 아픈지도 알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케이가 몸을 들자 잭이 케이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이봐요. 아직은 일어나면 안 돼요. 피를 많이 흘렸다구요. 앗. 으윽…….”
그때 잭이 케이를 만류하려다가 뒤에 있던 파편에 손바닥이 그어졌다. 꽤 깊이 베인 듯 찐덕한 피가 바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케이가 뭔가 말하려고 할 때였다.
“잭. 저거, 저거!”
스윈든이 케이와 잭의 뒤쪽에 있는 뭔가를 가리키며 손을 떨었다.
케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케이는 잭이 스윈든에게 자신을 맡기고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잭은 품 안에서 작은 단검을 꺼냈다. 하지만 잭은 도무지 검을 써본 적이 없는 사내인 것 같았다. 케이는 잭이라고 불린 이 사내가 당장이라도 검을 떨어뜨릴 듯이 쥐는 것을 보며 어렵사리 뒤를 돌았다. 그러자 붉은 눈 한 쌍과 눈이 마주쳤다.
당장 날뛸 준비가 된 듯한 거대한 어깨와 그 어깨를 덮고 있는 흰 털. 괴물은 잭의 단검을 보더니 이빨을 드러냈다.
“크으으으…….”
괴물의 이빨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저게 대체 뭐지? 케이는 자신이 지옥에 와서 악마를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장벽 밖의 황소 모습을 한 12 악마 중 하나, 몰록 같은. 케이는 도무지 그것을 황소라고 부를 수도, 곰이라고 부를 수도, 멧돼지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저 괴물은 황소만 했지만 황소의 털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친 흰 털을 가지고 있었고 곰이라고 하기엔 코가 납작했고, 멧돼지라고 하기엔 두 손을 쓸 줄 알았다.
케이는 괴물이 잭을 향해 위협적으로 손을 뻗는 것을 보았다. 그 검은 발톱에 낀 붉은 덩어리는 분명 살점이리라. 케이는 공포에 젖은 잭이 스윈든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내가 유인할 테니까 저 남자를 데리고 케빈 쪽으로 가. 케빈이 도와줄 거야.”
잭은 벌벌 떨며 말했고 스윈든이 얼른 케이를 다시 업으려고 했다. 그 순간, 괴물이 다시 한 번 으르렁거렸다. 케이는 스윈든의 손을 잡고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죽을 거요.”
“그래서 뭘 어쩌라는 겁니까! 갑시다, 빨리!”
케이는 이 순진한 청년의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케이가 말했다.
“대체 날 왜 구하는 거요?”
“그야 당신이 죽어가고 있으니까지!”
참으로 명료하고 지당한 대답이었다. 케이가 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저자가 든 것 같은 단검이 있소?”
“있긴 있는데…….”
스윈든이 품 안에서 단검을 내밀자 케이가 잽싸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스윈든이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 말했다.
“다쳤다면서 빠르긴 되게 빠르네.”
“나도 저자를 구해야겠소.”
케이가 잭을 가리켰다. 그리고 단호하게 덧붙였다.
“저자도 죽어가고 있으니까.”
케이는 단검을 단단히 쥐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스윈든이 뭐라고 말하는 순간, 케이는 외쳤다.
“잭이라는 남자랑 도망가!”
케이가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단검과 함께 들고 일어난 돌멩이를 괴물의 등을 향해 던졌다. 돌을 맞은 괴물이 케이 쪽을 돌아보았다.
괴물의 붉은 눈과 케이의 눈이 마주쳤다.
케이는 당장 괴물이 달려들 거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괴물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괴물은 아주 잠깐 케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케이는 잠깐 동안 이상한 생각을 했다.
저 괴물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말이 안 됐다. 케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머뭇거리는 잭을 힐끗 본 케이는 절뚝거리는 발로 최대한 도약해 괴물의 심장을 노리고 찔렀다.
결과는 참패였다. 단검은 괴물의 가죽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그 바람에 케이의 손목이 단단히 충격을 받았다. 케이는 신음을 내뱉었다.
“으아아!”
케이는 신음을 내는 순간 케이의 어깨에 몰록의 이빨이 박혔다.
“으아아아악!”
스윈든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케이는 괴물이 이빨이 박힌 채로 괴물의 얼굴을 주먹으로 마구 때리고 손가락으로 찔렀다. 조금이라도 상처를 내서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어야 했다. 케이의 마구잡이식 공격이 먹힐 턱이 없었다. 케이의 몸에 조금씩 힘이 빠져나갔다. 케이는 괴물의 이빨이 박힌 어깨에서 흐르는 피를 느끼며 하늘을 보았다.
푸르디푸른 하늘이었다.
이렇게 죽는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이게 끝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녀는 어디에 있나? 하수로에서 그녀가 먼저 사라진 것만은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살아 있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 했다.
엘리자베스가 죽었다면 이 죽음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엘우드 밀, 당신도 지옥으로 오지 말았으면 한다. 케이는 생각했다. 둘은 함께 내가 없는 세상에서 잘 살았으면 한다.
“너 때문에 내 세상은 매일매일 더 나아져.”
케이는 어느새 또 다시 자신의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엘리자베스가 그 편지를 보낸 이후로 케이의 세상도 변해버렸다. 엘리자베스의 세상을 매일매일 더 나아지게 하는 쪽으로 케이가 조금씩 나아갔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내 세상도 조금씩 나아졌어.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케이는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으려고 했다.
엘리자베스의 편지에 답장하지 않은 것도, 그녀에게 조금 더 매달려보지 않은 것도, 그녀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두려고 시도해보지 않은 것도. 전부 후회하지 않으려고 했다. 후회 같은 것은 시간이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지금은……
지금은 최선을 다해 만족해야 했다.
너 때문에 불행했다는 건 다 거짓말이야. 네가 없었다면 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끔찍했을 거야.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케이가 그렇게 생각하며 푸른 하늘을 즐기는 순간 그 푸른 하늘을 찢어놓을 듯한 총소리가 울렸다.
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