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47화
엘리자베스가 다급하게 케빈의 팔을 잡았다. 마지막 이성이었다.
“뛰어.”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보더니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왜 그래요? 뭔데요?”
“난 이쪽으로 갈 거야, 그러니까 쉬지 말고 뛰어.”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케빈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빼앗아 들었다.
케빈이 물었다.
“그건가요? 그 몰록이라는.”
“맞아. 너……. 너……. 케이를 구하고 나면……. 그러면…….”
엘리자베스는 헐떡거리며 케빈이 아니라 사다리를 보며 말했다.
“나를 막으러 와야 해. 알았지?”
그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거침없이 위쪽으로 오르는 통로 사다리를 타기 시작했다. 귓가에서는 계속 심장 박동 소리가 북소리처럼 울렸고 몸이 가뿐해지기 시작했다.
점점 더 현실과 꿈이 구분되지 않았다.
이곳이 현실인가, 꿈인가.
엘리자베스는 자꾸만 엉키려고 드는 기억의 끈을 붙잡고 하나만 생각했다. 이 사다리를 올라야 한다.
뒤에서는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녀님은 왜 저쪽으로 가시는 건데!”
“일단 갑시다. 빨리요!”
“이봐. 저쪽은 길이 험하다니까……!”
엘리자베스는 미쳐버릴 것 같은 순간에 단검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달콤한 혈향이 뒤에서 속닥거리는 소리는 물론 통로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케빈과 케이, 잭과 스윈든의 냄새를 지워냈다.
그리고 자신의 혈향은 엘리자베스를 폭주의 상태로 내몰았다.
그녀의 기억은 거기에서 끝이었다.
* * *
케빈은 달리기 시작했다. 덩치만 커다란 스윈든은 케이를 들쳐 업고 뛰기 시작하자 끔찍하게 헐떡거렸다. 잭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스윈든! 그 사람을 놓치면 안 돼! 피를 흘리고 있다고! 이봐. 차라리 속도를 늦추는 게 어때? 뛸 것까진 없잖아! 공녀님이 뭐라고 했길래…….”
“……안 돼요! 뛰어야 돼요! 멈추면 안 돼요.”
케빈은 엘리즈가 위로 올라갈 거라고 말하며 짓던 표정을 떠올렸다. 그녀의 표정은 뭔가에 단단히 홀린 것 같았다.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눈 속에서 번뜩이는 욕망을 보는 순간 알았다.
몰록.
엘리즈가 말했지만 케빈으로서는 믿을 수 없다고 여겼던 바로 그 몰록이 그녀의 몸 안에서 날뛰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왜?
이때까지 저 끔찍한 살육의 현장에서도 멀쩡했던 엘리즈가 왜 이제 와서?
뭔가 촉매제가 될 만한 자극이 있었던 것이리라. 케빈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품 안에 들어있는 작은 총을 만지작거렸다. 지난 며칠간 조잡한 실력이나마 끙끙거리며 만들어낸 총알이 들어갈 총이었다. 특수한 주머니에 담긴 그 총알에는 초록색 빛깔을 띠는 물질이 묻어있었다.
정말 이게 몰록을 죽일 수 있을까? 몰록이 죽으면 엘리즈는 어떻게 되는 걸까?
케빈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엘리즈와 헤어지기 전 엘리즈에게 총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하지 않았다. 그걸 말해버리면 엘리즈를 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때였다. 스윈든이 걸음을 늦췄다. 갈림길이 나왔던 것이다. 잭이 오른쪽을 가리켰다.
“저쪽은 빠르긴 하지만 악어를 만날 확률이 있고 이리로 올라가는 병원에는 보비들이 지키고 있을 확률이 있습니다…….”
잭은 왼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느리지만 안전해요. 어느 쪽으로 갈 겁니까?”
케빈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잭을 보았다.
“케이가 피를 많이 흘렸어요. 빠른 곳으로 가야해요.”
케빈의 말에 잭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움직임에 케빈이 물었다.
“보비들한테 잡힐 수도 있다는데 왜 망설이지 않는 거예요?”
케빈의 질문에 잭이 코웃음을 쳤다.
“공녀님은 나를 비롯한 수많은 죄수들의 목숨을 구했어요.”
“하지만 이건 엘리즈를 구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은혜를 갚으려는 게 아니니까? 내가 그때 공녀님을 옆에서 보면서 배운 게 있소. 역시 많은 사람들을 구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지만 그만큼 대단한 일이구나. 그러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구나. 마음도, 몸도.”
잭의 말에 케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케빈의 머릿속에 엘리즈의 모습이 떠올랐다. 레본 따위 망해버리라고 하라던 케빈의 말에 어색하게 웃던 엘리즈. 망설임 없이 퀴닌을 개발해서 가난한 이들의 병을 고치겠다고 말한 엘리즈. 경찰청 화재 당시에 그를 구하러 온 엘리즈. 하일 강변에서 화상 상처를 치료하던 엘리즈.
케빈은 문득 깨달았다. 엘리즈가 레본을 망하게 둘 수 없는 이유를 말이다.
케빈은 언제나 엘리즈의 타인을 향한 관대함이 귀족적 근본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엘리즈에게 레본이란 단순히 국왕이나 귀족 따위가 아닌 것이다. 엘리즈에게 레본이란 수많은 사람들의 터전이었고 수많은 목숨들 그 자체였다.
’그러니 레본 따위 망하라고 할 수 없지……. 망할 엘리즈……’
케빈의 눈앞이 흐려졌다. 잭이 물었다.
“왜 울어요? 이봐?”
케빈은 울먹거리며 대답했다.
“가요!”
“뭐?”
“가라구요. 나는 이쪽으로 가야 하니까.”
케빈은 잔뜩 찡그린 두 눈에서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며 뒤로 물러났다. 케빈은 왔던 길을 가리켰다.
케빈은 돌아가야 했다.
엘리즈가 그토록 구하고 싶었던 레본을 스스로 망치지 않도록 도와줘야 했다.
엘리즈 말대로……. 엘리즈는 스스로를 죽일 수 없을 테니까.
케빈은 엉엉 울면서 소리쳤다.
“뛰란 말이에요! 케이를 구해요! 그 남자는 엘리즈가 사랑한 남자니까. 그리고 반드시 잡히지 말고 살아남아요, 둘 다!”
케빈은 그렇게 말하며 잭과 스윈든이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 뛰기 시작하자 몸을 돌렸다. 케빈은 달리기 시작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 자신의 멍청한 결심을 되짚어,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 말이다.
잭의 말이 맞다.
엘리즈처럼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했다. 몸도. 마음도.
케빈의 마음은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케빈이 다시 위로 가는 통로가 있는 곳으로 도착했을 때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짐승의 것 같기도 하고 인간의 것 같기도 한 신음소리. 그런데 소리의 진원지가 확실하지 않았다.
통로 위쪽에서 나는 것인지, 아니면 통로 안쪽에서 나는 것인지.
케빈은 불안한 표정으로 통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리는 다시 나지 않았다. 케빈은 통로 위쪽으로 가는 사다리를 타기 시작했다.
사다리를 타고, 또 타고……. 케빈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지만 사다리 위로 오르면 오를수록 주머니 속에 있는 총의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케빈은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빛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눈을 깜박이는 횟수를 늘렸다. 눈을 껌뻑거릴 때마다 케빈의 눈꺼풀 위로 어떤 잔상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엘리즈를 노리고 총을 쏘는 자신. 그 총구 앞에서 슬픈 표정을 짓는 엘리즈.
엘리즈가 사실 후회하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괴물이더라도, 레본을 망칠 재앙이더라도, 스스로를 살리고 싶어 하는 거면 어떡하지?
케빈의 마음은 부지런하다 못해 야단스럽게 움직였다. 케빈은 이를 악물고 사다리를 올랐다.
케빈은 결심했다. 엘리즈가 아직 이성을 가진 것 같은 일말의 희망이 보인다면 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케빈이 그렇게 결심하며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고 위로 튀어올랐다.
지면으로 몸을 내딛는 순간 엄청난 양의 흙먼지가 케빈의 눈코입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몸부림을 치며 얼굴을 털어냈다.
겨우겨우 흐린 시야를 확보한 후 케빈은 이 흙먼지가 지면에서 부는 바람에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된 청사 주변의 잔해 때문임을 알아챘다.
케빈은 비틀거리며 몸을 바로 세우고 주변을 보았다. 주변은 신문에서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끔찍했다. 그가 신문으로 보았던 의회 청사 정문 쪽은 그나마 군인들이 치워둔 상태라 괜찮아보였던 것이었다.
케빈은 코를 찔러오는 냄새에 코를 막고 얼굴을 찌푸렸다. 의회 청사를 둘러싸고 있던 군인이나 민간인들 몇몇이 잔해에 깔려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지금의 왕실과 의회는 그들의 시체를 수습하는 데에 쏟을 여력이 없었다.
’저 안에 갇혀 있으니까.’
케빈은 의회 청사 쪽을 보았다. 그 안에서는 아직도 간간히 총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곧 총성이 멈출 것이다. 조지 왕자의 군대는 인민해방회의 간부들을 순식간에 제압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급진적이고 분명한 성격의 조지 왕자는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는 편이 아니었고 귀족 몇 명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이 이상의 지지부진한 협상에 나설 생각이 없었다.
케빈은 주변을 다급하게 둘러보았다. 엘리즈. 엘리즈는 어디에 있지?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리오든 뒷골목과 연결된 이쪽 길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물론 눈을 가늘게 뜨고 보면 저 멀리에 몇몇 부랑자들이 보이는 것도 같았지만 구경꾼들은 전부 앞문에 모여 있고 군인은 전부 뒷문 쪽에 모여 있는 듯했다. 하긴 이렇게 잔해가 산처럼 쌓여 있는데 이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도 말이 안 됐다.
케빈은 울퉁불퉁하고 큼지막한 대리석 조각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쳐 나가며 소리쳤다.
“엘리즈!”
케빈은 엘리즈를 부르면서도 엘리즈를 찾고 싶은 건지 찾고 싶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를 찾으면 죽여야 할지도 모르고, 찾지 못하면……
“엘리즈! 어딨어요!”
케빈이 다급하게 소리칠 때였다. 또 그 소리가 들려왔다. 잔해 더미 뒤쪽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인간의 것인 듯도 하고 짐승의 것인 듯도 한 신음소리.
그 소리가 아까보다 훨씬 더 짐승의 것에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 케빈의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케빈은 보호용 장갑을 끼고 총을 꺼내어 총알을 넣기 시작했다.
공격 받을 수도 있다.
케빈은 그 자명한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철컥— 철컥— 철컥—
총알이 들어갈 때마다 리볼버의 약실이 돌아가며 나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케빈은 숨소리마저 죽이고 아주 살살 약실을 돌렸다. 관자놀이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철컥—!
마지막 탄환이 들어감과 동시에 리볼버 약실을 케빈이 습관적으로 돌렸을 때였다. 잔해 더미에서 뭔가가 튀어올랐다. 케빈은 리볼버로 그 쪽을 겨눴다.
쏴야 한다!
케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막상 그것을 보았을 때는 그러지 못했다.
새하얀 털, 황소만 한 몸집, 새빨간 눈.
케빈은 그것을 보는 순간 엘리즈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와 동시에—
엘리즈에게는 이지가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케빈이 뒤늦게 방아쇠를 당겼을 때는 이미 몰록이 튀어올랐을 때였다. 케빈은 처음 총알을 쏴본 만큼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쓰러졌다.
케빈이 뒤로 쓰러지자마자 몰록은 이빨을 보이며 으르렁거렸다. 몰록의 이빨 사이사이로 붉고 끈적거리는 액체가 보였다.
케빈은 믿을 수가 없었다.
‘저게 엘리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