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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46화 (146/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46화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생명체가 숨 쉬는 소리.

엘리자베스는 타자의 생명이 이렇게 자신을 긴장하게 하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며 걸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속삭였다.

“위로 가는 사다리가 나오면 오를 수 있어?”

케이는 중얼거렸다.

“그래.”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하나뿐이었다.

이 좁아터진 통로에서 몰록이 되어 싸워야 한다.

엘리자베스는 턱이 아파올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멈출 수 있을 것인가. 몰록의 본능을 내 영혼이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케이를……

케이를 죽이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걸었다. 자꾸만 스르르 엘리자베스의 등에서 벗어나는 케이를 어떻게든 끌어당겼지만 케이의 몸에는 힘이 없었고 케이의 몸은 애초에 엘리자베스보다 훨씬 컸다. 케이의 발이 질질 끌리며 자꾸만 소리를 냈다.

그러자 저쪽의 숨소리가 잠시 작아졌다.

엘리자베스는 그 작아진 숨소리 사이로 뭔가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천근만근인 걸음을 옮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등 뒤에는 조지의 군대와 무정부주의자들이 있다. 조지의 군대에게 잡히면 케이는 국왕 시해 미수범으로 붙잡혀 제때 치료를 받을 수 없고 무정부주의자에게 잡히면 꼼짝없는 포로 신세였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걱정해야 할 것은 날뛰게 될 스스로였다. 저 끔찍한 피바다 속에서 몸을 제어할 수 없을 스스로. 그때 아까부터 계속 속닥거리던 소리가 분명해졌다.

“누구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휘청거렸다. 사람 소리다. 엘리자베스는 다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엘리자베스는 건너편에서 오고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에 기뻐 잠시 이성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렸다.

’조지의 군대일 수도 있다.’

엘리자베스는 바짝 마른 입술을 침으로 적셨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엘리자베스는 망설이다가 일단 이쪽이 말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되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그때 갑자기 발소리가 통로를 울렸다. 엘리자베스는 그대로 굳었다. 도망가야 하나? 엘리자베스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타닥! 타닥! 타닥! 그러나 발소리는 엘리자베스에게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고 가까워졌다.

그러다가 한순간 어두운 통로 저편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쪽이 그나마 빛이 드는 쪽이었던지라 처음에는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잠시 뿐, 곧 어둠에 적응된 눈은 상대의 이목구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그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해 망설였다. 그러나 곧 단숨에 이름을 뱉을 수 있는 한 소년이 그의 뒤에서 나타났다.

“케빈!”

엘리자베스는 울컥해서 소리쳤다. 그러자 케빈이 엘리자베스에게 뛰어왔다.

“엘리즈! 케이는…… 케이가……!”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눈물 앞에서도 냉정하게 제일 먼저 환자를 챙겼다.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등 뒤에서 스르르 쓰러지는 케이를 안아들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에요.”

엘리자베스는 굴러가지 않는 머리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파, 팔을……. 흑……. 흐흑…… 팔을 다쳤는데, 패혈증…… 패혈증 쇼크가 왔어…… 허벅지에는 자상…….  마지막에는……. 총을……. 등에 총상…….”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은 팔과 허벅지의 상처만 발견했던 듯 놀란 얼굴로 등을 살폈다. 케빈은 엘리자베스가 빼먹고 지혈을 하지 못한 허벅지를 가장 먼저 지혈하기 시작했다.

“혈관을 잘 피해갔어요. 그래도 지혈을 해야죠!”

케빈의 호통에 엘리자베스는 주저앉아서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울고 싶었는데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생각을 하기엔 그녀는 너무 지쳐있었고 너무 끔찍한 광경에 많이 노출된 상태였다.

이런 것들을 보고도 남은 생애 동안 영혼의 손상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저 지옥 속에서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던 것을 오히려 지옥을 빠져나와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 지옥 속에서 그녀는 오직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엘리자베스가 주저앉아 먹은 것이 없어 초록 분비액만 토해내기 시작하자 곧 남자가 걸어와 엘리자베스의 등을 쳐주었다.

“공녀님!”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그녀가 더러워진 입술로 남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잭!”

잭.

경찰청에서 엘리자베스와 함께 죄수들의 탈옥을 돕고 리오든 어디론가 도망쳤던 남자였다. 3개월 동안 엘리자베스는 그 죄수들 중 누구도 만나지 못했고 그것을 천운으로 여기며 살았다. 리오든에서 그들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이 전부 붙잡히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엘리자베스는 울먹거리는 눈으로 잭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잭이 흠칫 뒤로 물러나다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잭의 손바닥에는 화상 흉터가 크게 남아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잭에게 지하 감옥 곳곳의 달궈진 쇠문을 열어달라고 한 탓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잭의 손을 잡고 있자 곧 뒤에서 다른 남자가 다가왔다. 스윈든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스윈든을 자세히 보려고 일어나다가 휘청였다. 그러자 스윈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앉아있으라고 손짓했다.

“큰일을 당했으니 어지러울 만하죠. 하지만 여기 있을 시간이 없어요. 움직여야 합니다.”

스윈든의 목소리에 엘리자베스가 방금의 구역질로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여기 어떻게…….”

“어떻게는요. 우리가 이런 곳에서 잠을 자니까 알죠. 오래된 하수로는 우리한테 제일 좋은 곳이에요. 운 나쁘면 악어들을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보비들은 절대 오지 않고 지열을 받아서 은근히 따뜻하다구요. 그러다 이 통로를 알아내서 제가 케빈 선생님한테 갔습니다.”

스윈든의 말에 잭이 맘에 안 든다는 듯이 말했다.

“통로를 알아낸 건 나야.”

“케빈 선생님을 찾아가자고 한 건 나야!”

스윈든이 잭을 쏘아붙였다. 보비들한테 쫓기는 주제에 엘리자베스를 구하겠다고 이 통로를 알아내서 케빈을 찾아가다니. 엘리자베스는 울음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며칠간 인간의 밑바닥만 보아왔던 엘리자베스에게는 이런 믿을 수 없는 인간의 선함이 큰 위로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비극 속에서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는 흐느끼며 스윈든의 손도 잡았다.

“고마워요. 정말…….”

스윈든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말했다.

“아뇨, 뭘요. 저희는 의회 청사에 들어갈 수도 없을 것 같았는데 혹시나 해서 와본 겁니다.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여기까지 나와 계실 줄 몰랐어요. 여긴 케빈의 친구분 말로는 설계도에도 안 나오는 장소라던데.”

케빈의 친구가 누구지?

엘리자베스는 설계도라는 말을 듣고 그게 아마도 앰버 모건이리라 추측했다. 엘리자베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비명소리와 총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잭과 스윈든을 붙잡고 말했다.

“……도와준 사람이 있었어요.”

엘리자베스는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윌리엄 조쉬의 운명을 최악의 쪽으로 바꾼 것은 엘리자베스였으리라. 그녀가 울먹거리는 사이에 케빈이 말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당장 수술해야 돼요. 일단 총알을 제거해야 하고, 팔을 자르는 건 불가피하겠어요. 이 더러운 곳에서는 절대 수술 못해요. 당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요.”

케빈의 말에 스윈든이 투덜거렸다.

“이 더러운 곳에서 자는 사람도 있는데.”

잭이 스윈든의 가슴팍을 팔꿈치로 쿡 찌르더니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스윈든은 케빈과 양 옆에서 케이를 부축했다. 스윈든은 케이의 거구를 들어보더니 황당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이 남자를 혼자 들고 오신 겁니까? 진짜로요?”

스윈든의 물음에 케빈이 얼른 대답했다.

“엘리즈는 원래 빵을 많이 먹어서 힘이 세요.”

케빈은 그렇게 말하곤 엘리자베스를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

“괜찮은 거예요? 울렁거리는 거요. 내가 준 약은 먹었어요?”

“왜요? 어디 아파서 약을 드세요?”

스윈든의 질문에 엘리자베스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지병이 좀 있어요. 괜찮아. 그런데…… 울렁거리는 건 똑같아. 약은 거의 다 먹었는데……. 조금 남았을…….”

케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보는 사이 그녀가 자신의 재킷 안쪽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거기 있어야 할 약병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의 난장판에서 잃어버린 것 같았다.

“잃어버린 것 같아. 그래도 그 약병 덕에 다행이었어. 그 약에 항생제 성분을 넣었다는 말을 기억하고 케이 하커한테 먹였거든.”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나마 이 허수아비 같은 상태로라도 버티고 있던 거군요. 처치를 아주 잘했는데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내가 아니었다면 분명……. 분명……. 팔을 안 잘라도 됐을 텐데.”

엘리자베스가 울먹거리자 케빈이 단호하게 말했다.

“헛소리예요. 루이 교수님 말 생각 안 나요? 우린 신이 아니니까 신이 되려고 하지 말아야 하는 거라구요.”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통로가 확 밝아지는 지점이 왔다. 앞장서서 걷던 잭이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가 의회 청사 뒷골목 쪽이에요. 이쪽으로 올라가서 가는 방법도 있지만 여기 위쪽 길은 폭파 잔해 때문에 엉망일 테니 다른 곳으로 갑시다.”

엘리자베스는 잭의 말에 물었다.

“날 여기로 이끌어준 사람은 자칫하면 악어를 만나니까 위로 가는 길을 발견하면 바로 위로 가라고 했는데요.”

“그렇긴 하죠. 악어는 특히 피 냄새에 몰리니까.”

잭은 뒤에 있는 케이 하커를 보며 머뭇거렸다. 하지만 케빈이 말렸다.

“길이 엉망이라면 이렇게 커다란 사람을 데리고 다니긴 어려워요.”

케빈의 말에 땀을 뻘뻘 흘리던 스윈든 역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잭이 망설이는 사이에 일행은 다 같이 위로 올라가는 길과 이어진 지점에서 하늘을 보았다. 케빈이 이를 악물었다.

“이 커다란 덩치를 위로 올리는 것도 일이겠는데요.”

“그건 우리가 하죠. 스윈든한테 묶고 제가 위로 밀면 돼요.”

잭이 대답했다. 그러자 스윈든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엘리자베스는 그 모습을 보며 케이의 눈꺼풀을 살짝 들어올렸다. 동공 반사가 느려졌다. 엘리자베스는 초조한 마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뭔가 통통한 것을 밟았다.

찍!

그 순간, 쥐로 추정되는 생명체가 엘리자베스의 발목을 물었다.

“읏!”

엘리자베스가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문제는 고통이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 통로를 가득 메운 자신의 혈향을 맡았다.

달콤해.

엘리자베스는 순간 온 몸을 관통하는 짜릿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해방감을 느끼는 순간 엘리자베스의 영혼은 역설적이게도 육체라는 감옥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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