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45화
쓰러진 사람 한 명은 케이 하커였다. 엘리자베스는 대장이 쏜 총알이 케이의 등에 박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품에 안긴 채로 대장의 총부리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또 다른 한 명은 대장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대장의 심장을 노린 총알이 대장의 가슴팍에 박히는 것 역시 똑똑히 보았다. 그녀는 대장이 총부리를 자신을 노린 총알 방향으로 바꾸는 것을 보며 케이와 엉켜 쓰러졌다.
그러니 또 한 명은 엘리자베스였다.
엘리자베스는 쓰러지면서 동시에 대장이 쏜 총알에 맞아 쓰러지는 윌리엄 조쉬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쓰러진 자였다. 엘리자베스는 탄약 냄새를 흘리는 윌리엄 조쉬의 총을 보며 윌리엄이 대장을 쏘았다는 것을 알았다.
펑!
하지만 총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가 천장을 쏘았다.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조지 왕자의 군대인지, 윌리엄 조쉬의 동지들 중 하나인지.
조지 왕자의 군대는 아마도 뒷문 쪽을 폭파시키고 이 안으로 잠입한 것 같았다. 윌리엄 쪽의 사람 하나가 말했다.
“우린 국왕을 데리고 있다! 국왕을!”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정신을 잃은 케이의 품 안에서 왕좌와 함께 통째로 쓰러진 국왕이 슬금슬금 기어가는 것을 보았다. 대장은 그 옆에 쓰러져 있었고 국왕에게로 가장 먼저 접근한 것은 어느새 실내로 잠입한 군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얼굴을 보았다. 오만한 미소 같은 것은 조금도 남지 않은 케이 하커의 얼굴.
엘리자베스는 그의 몸이 급속도로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케이의 등을 더듬었다. 피는 생각보다 많이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피가 잔뜩 묻은 손바닥을 보는 순간 그녀의 본능이 맥동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당장이라도 제 손바닥을 핥고 싶은 감정을 꾹 눌러 참는 사이에 누군가가 케이의 몸을 일으켰다. 엘리자베스는 상대방을 올려다보았다. 다급한 얼굴의 솔튼 빌리스였다. 이 난리통에서 그는 총을 들고 케이와 엘리자베스를 일단 가까운 지형지물로 끌어당겼다.
“씨발…… 어딨어……. 어딨는 거야…….”
그 다음부터는 케이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가 솔튼에게 소리 질렀다.
“뭐 하는 거예요!”
그러자 솔튼이 귀찮다는 듯이 엘리자베스를 노려 총부리를 겨눴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것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단숨에 솔튼의 총부리를 손바닥으로 쳐냈다. 동시에 총이 격발되었기에 뜨거운 기운이 그녀의 손바닥에 남았다.
하지만 화상은 입지 않았으리라, 엘리자베스는 보지 않아도 알았다. 그녀는 순식간에 총을 잃은 채 놀란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고 있는 솔튼의 얼굴을 주먹으로 강타했다. 솔튼이 순식간에 입술과 코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엘리자베스는 솔튼이 놓친 총을 들고 솔튼의 이마에 갖다 댄 다음 말했다.
“뭐 하는 거냐고 했지!”
피슝! 피슝!
순식간에 엘리자베스의 오른 쪽과 왼쪽에 있는 지형지물들이 전선 역할을 하여 무정부주의자들과 조지의 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엘리자베스는 몸을 숙이는 대신에 오히려 허리를 더 꼿꼿하게 세우고 피를 흘리며 해롱거리는 솔튼을 다그쳤다.
“뭘 뒤지고 있는 거야!”
“……신탁 계좌…… 그리고 서명이 든 종이…… 케…… 케이 하커가 나에게 준다고 했어. 당신을 비밀 통로로 데리고 나가면……. 그렇게 해준다고 했다고! 씨발!”
솔튼은 울먹거리며 말했다. 그러더니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내가 비밀통로를 알아. 정말이야. 나를 살려주면…….”
펑!
그 순간 귀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솔튼의 이마 한가운데에 총구멍이 났다. 엘리자베스는 얼굴에 튄 피에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거기엔 윌리엄 조쉬가 서 있었다.
“솔튼 빌리스는 비밀통로 같은 건 모르오. 솔튼은 그냥 케이 하커의 신탁이 탐나서 거짓말을 한 거지. 멍청한 새끼.”
윌리엄 조쉬는 그렇게 말하며 케이를 들쳐 업었기 때문에 조쉬가 멍청하다고 한 대상이 솔튼인지 케이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기분으로 윌리엄의 오른손을 보았다.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셔츠를 북북 찢어서 윌리엄의 오른손을 꽉 묶었다.
“의사 노릇하고 있을 시간 없어요.”
“닥쳐요. 출혈 쇼크로 이 망할 의회 청사를 나가기도 전에 쓰러지고 싶어요? 의사가 지혈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요.”
“왜 날 살리려는 거요. 나는 당신과 당신의 남자를 죽이려고 했소.”
당신의 남자.
엘리자베스는 윌리엄 조쉬가 어설프게 들쳐 멘 케이 하커의 얼굴을 보았다.
이 멍청한 자식. 솔튼 빌리스와 뭔가 꿍꿍이를 짜고 있었다니. 그런데 상황이 급변하니 국왕을 죽여서 무정부주의자들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고 솔튼 빌리스든 윌리엄 조쉬든 둘 중 하나가 움직이길 기대했던 거겠지.
엘리자베스는 윌리엄 조쉬의 등 뒤로 날아다니는 총알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며 총알이 박힌 케이의 등을 포함한 흉부를 단단하게 묶었다. 전선은 서서히 뒤로 후퇴하고 있었다. 곧 이곳으로 군인들이 몰려든다는 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을 보았다.
“내가 말했잖아요. 내가 인간으로서 당신들을 죽여버리고 싶어도 의사로서는 어떻게든 살려놓을 거라고.”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케이를 자신이 들쳐 업으면서 말했다.
“난 힘이 세요. 적어도 손이 다친 그쪽보다는.”
“좋아요. 더 이상 숙녀니 뭐니 하는 헛소리는 하지 않도록 하지. 따라와요.”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윌리엄을 따라갔다. 나무로 된 책상이 총알에 맞아 파괴되면서 파편이 막 날아다니고 의자 쿠션에 총알이 관통해 깃털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엘리자베스는 아주 미약한 케이의 숨결을 느끼며 윌리엄을 따라 기었다. 윌리엄은 그녀의 몸집의 2배는 되는 케이를 업고도 조금도 헉헉거리지 않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대체 어떻게 하는 거요?”
“닥치고 빨리 가요…….”
엘리자베스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윌리엄을 쏘아보았다. 구역질이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아까 얼굴에 정통으로 맞은 솔튼 빌리스의 피 냄새가 엘리자베스를 괴롭혔다.
’먹고 싶어.’
엘리자베스는 앞에 기어가는 윌리엄 조쉬의 피 흘리는 손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뚝뚝 떨어지는 핏자국을 따라 기면서 엘리자베스는 몇 번이나 멈춰서서 그것을 핥고 싶었다.
’배가 고파.’
엘리자베스는 끔찍한 기분에 시달리며 윌리엄을 따라 기었다. 그때 윌리엄이 위를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윌리엄이 자신을 인도한 곳이 어딘지 알았다.
“2층 발코니.”
“아니. 이쪽은 발코니 아래쪽이오.”
윌리엄은 그렇게 말하며 발코니 옆을 가려주고 있던 커튼을 걷었다. 그러고는 커튼 아래로 드러난 철문을 잠근 자물쇠를 향해 총을 쐈다. 자물쇠 파편이 튀었다. 그때 엘리자베스의 어깨 아래로 케이의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쏟아지는 케이의 몸을 보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바닥에 뻗어버린 케이의 몸을 흔들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그 사이에 윌리엄은 철문을 밀어 문을 열었다. 으드드득— 커다란 소리와 함께 윌리엄을 노린 게 분명한 총소리가 들렸다.
팅! 철문을 튕겨나간 탄환이 바닥에 떨어졌다. 엘리자베스는 공포에 질려 윌리엄을 보았다.
“케이가…… 케이가…….”
“으윽…….”
그때 케이가 눈을 부스스 떴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그의 귀에 속삭였다.
“오늘,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목요일.”
“내 이름은?”
“에, 엘리자베스.”
케이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엘리자베스가 울컥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귓가에서 케이의 질문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왜…… 왜……. 나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어?’
지금 대답하지 않으면 후회할 게 분명했다. 엘리자베스는 눈물과 피가 섞인 액체가 자꾸만 속눈썹에 고이는 것을 느끼며 케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있잖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하지 않는 데에는 젬병이야.”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에 케이가 아주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뭐라고 대답을 했는데……
엘리자베스는 그걸 듣지 못했다. 그녀가 다시 물어보려고 할 때 윌리엄 조쉬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들어가요!”
“같이 가요.”
“돌았소? 내가 아무리 여자한테 미쳤어도 나는 동지들을 버리는 남자는 아니오.”
“대장을 쏴놓고는!”
“그러니까 여자한테 미친 거지. 이제 내가 대장을 도울 차례요.”
윌리엄 조쉬는 장난스럽게 대답하고는 쏟아지는 총알에 몸을 수그리며 엘리자베스와 케이를 철문 안으로 쑤셔 넣다시피 집어넣었다. 그리고 외쳤다.
“이건 비밀 통로가 아니라 하수로요. 옛날에 이곳에 하수로가 필요했던 시절에 만들어졌다가 이제는 쓰지 않는 곳이지. 계속 걸어가다가 위로 가는 통로가 나오면 올라가시오. 자칫하면 하일 강의 악어를 만나기 십상이니까!”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엄은 그걸 보더니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손등에 입을 맞췄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의 손을 잡아당겨 그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크큭…… 세상에. 내가 적어도 케이 하커를 열 받게 하고 죽는군.”
윌리엄은 뺨을 만지작거리면서 철문을 닫았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케이를 들쳐 멨다. 낡은 하수로를 뛰기 시작하자 발아래에 쥐의 사체로 추정되는 것들이 밟혔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달렸다.
통로 전체를 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소리와 총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레본을 해방하라!”
“인민에게 자유를!”
“우린 실패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절규를 들으며 사람의 신념이 사람을 어디까지 내몰 수 있는 것인지, 그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려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울렁거림을 자제하기가 힘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귓가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날 버리고 가.”
“닥쳐. 흐흑……. 닥쳐…….”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답하면서 자신의 몸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본능을 느꼈다. 그녀는 헐떡거리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만약 케이가 눈을 떴다면 엘리자베스의 달리기 속도에 경악했을 것이다.
한참을 달리던 엘리자베스의 걸음이 멈췄다. 통로 저 끝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몸을 움츠렸다.
인간의 것인 것 같기도 하고, 짐승의 것인 것 같기도 한…….
신음소리.
엘리자베스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그 소리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뒤로는 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