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44화
엘리자베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에페를 받아들었다. 앞서 간 사람들이 썼던 검은 닦지 않아 근섬유나 조직, 그리고 피가 엉겨 붙어 우툴두툴했다. 그녀도 그것을 닦아낼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것은 건너편에서 검을 받아들은 케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케이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오른팔이 아닌 왼팔로 검을 들고 대장을 노려보았다.
“숙녀와 결투하는 것은 신사에게는 모욕이나 다름없소. 상대를 바꿔주시오.”
케이의 말에 대장이 피식 웃었다.
“이자는 이제 숙녀가 아니라 의사고, 의사가 아니라 왕족이다. 그러니 상대를 바꿀 필요는 없겠지. 물론 이자가 외팔이와 싸우는 걸 모욕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말이지.”
대장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장식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간 검 손잡이를 꽉 쥐고 케이를 보았다. 그녀는 손을 길게 뻗고 엄지손가락을 위로, 손목은 바깥쪽으로 드러나게 하며 오른발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케이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대장은 놀랍다는 듯이 웃었다.
“이곳에 신사가 있군. 웬만한 자본가보다 자세가 좋고 웬만한 귀족보다 용기가 좋아.”
대장은 케이 하커를 보며 말했다.
“숙녀도 이렇게 용감한데 사내가 돼서 뒤로 물러나겠다는 건가.”
대장의 도발에도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노려볼 뿐 자세를 잡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리오든에 올라온 후 결투를 꽤 여러 번 보았다.
신사들의 명예 결투는 이제 불법이 되었지만 사교계의 신사들은 모욕을 당했을 때 결투를 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이 끝나는 것처럼 구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숙녀들은 그런 신사들의 결투를 멋있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신사들의 결투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신사들이 말하는 모욕의 기준이란 우스꽝스럽게 짝이 없었으나 그때에도 엘리자베스가 그들을 우습게 여겼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저 결투나 명예, 귀족들 사이의 미묘한 알력 다툼 따위는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여겼다. 그 사실이 그녀를 내내 괴롭혔다. 그녀는 도무지 귀족 영애들이 말하는 멋있는 ‘신사’를 사랑할 수 없었고 명예로운 귀족이 되기 위해 목숨과 생존을 위태롭게 할 수 없었다.
18살의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일생은 이제 내내 리오든의 귀족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고 봄마다 다가오는 사교계와 그 사교계의 귀족들이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는 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속한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직감하는 것, 그것은 그녀에게 끔찍한 슬픔을 안겼다.
엘리자베스는 사교계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케이 하커를 떠올렸다. 그는 스스로가 속한 리오든 공장 지대라는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그 소속감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녀는 하지 못하는 모든 걸 케이 하커는 해내는 것이었다.
‘당신은 그 여자가 얼마나 왕족인 걸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몰라.’
그러니 케이의 말은 거짓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단 한 번도 왕족이라는 정체성에 부합하게 살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며 안정적인 자세를 유지한 채로 케이에게로 다가가 케이의 칼끝을 건드렸다.
챙.
경쾌한 소리가 광장 안을 메웠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말했다.
“칼을 제대로 잡아. 이건 결투야.”
결투에서 제대로 싸우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스스로를 모욕하는 행위였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완벽하게 신사답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를 둘러싼 세계, 그것에서 빠져나온 뒤에 그녀는 오히려 그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엘리자베스의 행위에 대장의 패거리들은 낄낄거리며 케이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아랫도리는 달려있냐? 당장 칼을 잡아! 기집년처럼 굴긴!”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그런 야유 따위에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예상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서서히 귀족과 자본가들마저 케이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들은 웬일인지 얼굴에 여유를 장착했다.
자신들의 눈앞에서 결투를 하던 신사들을 보았을 땐 그 신사들이 바로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기에 긴장감이 역력하던 그들의 얼굴이 엘리자베스를 앞에 두곤 영락없는 구경꾼의 얼굴로 돌아갔다. 저들에게 여성 과학자란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점점 광장은 격투를 관람하는 관중들이 앉아 있는 콜로세움처럼 변해갔다. 그 와중에도 케이는 자세를 잡지 않았다. 하지만—
철컥—
대장이 빠른 속도로 손을 움직여 소총을 장전하고 총부리를 엘리자베스에게 겨누었다. 대장이 말했다.
“점점 재미가 없어지려고 하는군. 케이 하커. 케이 하커의 패로 알고 승자는 여기서 바로 총살해도 되겠나?”
대장의 말에 케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리자베스는 관자놀이에 와닿는 서늘한 총부리를 느끼며 케이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케이가 칼을 어설프게 잡아 자세를 취했다.
“에페 따위 잡아본 적 없어.”
케이의 말에 대장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럼 그냥 시작해. 손수건을 떨어뜨려줘야 하나?”
대장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대장이 씨익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시작.”
대장의 말과 함께 엘리자베스가 재빨리 케이의 어깨를 찌르고 들어갔다. 순식간에 그녀의 무게 중심은 깨졌다. 결투를 해본 적도 제대로 검술을 배운 적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검을 쳐낼 뿐 반격하거나 엘리자베스의 다리를 찌르고 들어와 상처를 내지 않았으므로 상관없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알고 한 것이었다. 대신에 케이와 가까워졌을 때 엘리자베스는 대장에게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대장에게서 얼굴을 돌린 채로 나지막이 말했다.
“그냥 나를 찔러. 아무데나 좋으니까 나를 찌르란 말이야.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몰록의 피에 반응했던 어젯밤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는 타인의 피보다 자신의 피가 더 자신을 흥분시키는 데에 좋은 역할을 할 거라는 가설을 세웠다.
자신도 몰록이었으니까.
“내가 널 탈출시킬 거야.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난 괴물이야. 그러니까 난 절대 죽지 않아. 정말이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칼을 유려하게 쳐내며 옆으로 빠졌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렇겠지.”
이 개자식은 자신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자꾸 자신의 검을 튕겨내고 피해나가기만 하는 케이를 따라갔다. 서툰 찌르기에 대장은 처음에는 쿡쿡 웃다가 나중에는 점점 짜증스러운 표정이 되어갔다. 엘리자베스의 검술이 서툴렀는데도 불구하고 케이가 조금도 반격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검을 겨눈 상태로 선의 이쪽저쪽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대장에게서 먼 곳으로 데려가 다그치려고 들었고 케이는 점점 대장에게로 가까운 쪽으로 빠져나가려고만 들었다.
“난 절대 죽지 않는다니까. 그냥 찔러.”
엘리자베스가 분노한 얼굴로 케이의 얼굴을 노렸을 때 케이는 아슬아슬하게 얼굴을 피해 옆으로 빗겨나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가 셋을 셀 거야. 나는 이쪽으로 갈 거고, 그러면 너는 내 옆구리를 노려. 세게 찔러도 상관없어.”
상관없을 거야.
엘리자베스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케이는 오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자신의 눈앞의 남자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분노와 좌절, 슬픔 따위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날 찌르지 않으면 정말……. 정말 이번에야 말로 너를 죽여버릴 거야. 알겠지.”
“그래.”
케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케이가 눈썹을 찡그렸다. 케이의 눈썹 위로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격한 움직임도 아닌데 이 정도 움직임에 케이의 붕대 아래로 고름이 섞인 피가 흘러내렸다. 케이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하나.”
엘리자베스는 아까보다 여유가 없어진 케이의 움직임을 느끼며 최대한 케이의 팔뚝을 빗겨 노렸다. 케이는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 뒤 쪽에는 레트니와 대장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둘.”
엘리자베스는 목소리를 줄인다고 줄였지만 자꾸만 가까워지는 레트니와 대장과의 거리 탓에 대장이 미간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어깨를 긴장시키며 이번에도 피해나가는 케이를 향해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셋.”
엘리자베스가 어설프게 케이의 허벅지를 노렸을 때였다.
푸욱—
끔찍한 느낌이 손에 전달되었다. 이 쉬운 움직임을 케이가 피하지 못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검이 케이의 허벅지에 제대로 박혀 들어간 것을 보았다.
피 냄새가 엘리자베스의 코 안으로 광폭하게 침입해 들어왔다.
갑자기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맥동하는 피가 엘리자베스의 온 몸 구석구석을 뜨겁게 달궜다. 위장이 긴장하고 토기가 밀려나왔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허기가 그녀를 채웠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자신의 몸의 변화를 느끼며 케이를 보았을 때는 케이가 몸을 뒤로 돌리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의 모든 것이 느리게 굴러가는 것을 보았다. 그 이유가 동체시력의 증가 때문인지 아니면 충격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케이는 완벽하게 엘리자베스에게 약점을 내어준 자세 그대로 허벅지에는 에페가 꽂힌 채로 몸을 돌려 두 손으로 레트니의 심장을 노렸다.
‘젠장할……!’
우리 둘 다 살아서 나갈 일은 없다는 케이의 말에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엘리자베스는 에페를 던지다시피 하여 케이의 검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녀의 어설픈 움직임은 국왕의 어깨 근처에 케이의 검이 꽂히는 것은 막지 못했다. 그 순간, 폭발음이 들렸다.
쿠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계단참에서 먼지가 이는 것이 보였다. 그 먼지가 이는 쪽에서 뭔가가 몰려왔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확인하기 전에 대장이 소총으로 케이를 노리는 것을 먼저 알아차렸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다리와 팔의 근육이 케이를 구할 정도로는 제대로 움직여 줄 것임을 확신했다. 그녀의 몸은 지금 폭주 중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잔뜩 수축해 있던 스프링처럼 튀어나가는 자신의 몸을 느꼈다. 아마도 격발되는 총알보다 빠르리라.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자만했을 때,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저 개새끼.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 케이에게 욕을 퍼붓고 싶었다.
건방진 새끼.
하지만 운동 방향을 바꾸기엔 이미 틀려버린 엘리자베스보단 케이가 빠르게 움직였다. 케이는 레트니에게 꽂은 검을 그대로 두고 엘리자베스를 안아들었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케이의 몸에 그대로 안겼다. 그리고 케이가 몸을 돌렸을 때 총이 발사되었다.
대장의 총 한 발.
그리고 알 수 없는 총 두 발.
“으억!”
그리고 쓰러진 사람은 네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