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43화
하루에 4번의 결투가 이루어졌다. 마치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을 것처럼 여유를 가졌던 귀족과 자본가들은 이제 조금도 여유가 없는 표정으로 결투를 관람했다. 어느 쪽이 이기고 어느 쪽이 지든 귀족과 자본가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비로소 저들이 하나가 되는 시간이었다.
화형이 계속 이어지니 바깥 여론은 좋지 않아졌을 것이다.
대장은 더 이상 엘리자베스를 발코니 위로 올라가게 하지 않았다. 아마도 모여 있던 군중의 숫자가 줄어들었거나 밖에서 들리는 야유 소리가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광경을 본 엘리자베스가 국회의원들에게 그 사실을 전달하는 걸 원치 않은 것 같았다.
그 사이 엘리자베스는 별 수 없이 한 번 더 케이의 썩은 살을 도려냈다. 이번에는 케이는 여유를 유지하지 못하고 기절했다.
엘리자베스는 울지 않았다. 운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해야 한다면……. 해야 한다면 제 손으로 케이의 팔을 자를 생각도 있었다.
그녀는 냉정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케이의 몸을 닦아내고 나서 나오다 윌리엄과 마주쳤다. 윌리엄은 말없이 그녀를 지나치려고 했지만 엘리자베스가 윌리엄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케이를 내보내줘요. 내가 아니라 케이를. 그건 안 되나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이 미간을 찌푸렸다.
“둘 다는 안 된다는 것 알겠어요. 그러니 케이를 내보내줘요.”
윌리엄은 엘리자베스가 들고 있는 피 묻은 천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는 가망이 없어요. 알고 있잖아요.”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렸다.
의회 청사에 갇힌 지 4일째가 되던 밤의 일이었다.
* * *
엘리자베스는 통로에서 한참을 울다가 조금 정신을 차렸다. 윌리엄 조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한테 줄 수 있는 기회는 당신의 목숨을 살리는 것밖에 없소.”
“그래요. 잊어버려요.”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빵을 배부 받으러 가려고 했다. 그때 윌리엄 조쉬가 엘리자베스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일주일째 되는 날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이리로 와요. 케이와 함께.”
엘리자베스는 윌리엄 조쉬의 말에 주변을 살폈다.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둘 다 살릴 기회가 있다는 뜻이에요?”
“……케이 없이 혼자 가는 게 당신한테 더 도움이 될 거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해요.”
그때 통로 끝에서 윌리엄의 동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얼른 통로를 빠져나갔다. 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제 손바닥보다 작은 빵을 배부 받아 케이에게 되돌아갔다. 이제 깨끗한 물도 제공 받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감염이 차단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문 앞에는 솔튼 빌리스가 있었다. 그는 교대를 하려고 한 것처럼 다른 폭도와 잠시 서 있다가 엘리자베스가 문고리를 잡자마자 통로 끄트머리로 갔다.
엘리자베스는 솔튼 빌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을 열었다. 엘리자베스가 철문을 열었을 때는 케이가 바닥에 앉아 있었다. 케이는 눈이 퉁퉁 부은 엘리자베스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엘리자베스는 코를 훌쩍거리며 그의 앞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빼앗기지 않게 품에 가지고 온 빵을 케이에게 내밀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내미는 빵을 가만히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먹어.”
“나는 별로 배 안 고파.”
“그 조그마한 몸을 움직이려면 많이 먹어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조그마한……?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어딜 봐도 조그맣다고 여기기엔 어려웠다. 그녀는 평균 정도의 몸집에 키는 평균보다 아주 약간 큰 편이었다. 앰버 플래스인지 모건인지 하는 그 여자와 비교하면 조금 작았지만.
엘리자베스는 별 수 없이 빵을 한입 크게 베어물고는 남은 빵을 내밀고 웅얼거리며 말했다.
“내가 봤을 땐 네가 쓸데없이 커다란 것 같은데.”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내미는 빵은 보지 않고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가만히 보다가 살짝 웃었다. 케이가 못 참겠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엘리자베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때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로 살짝 다가가더니 그녀의 입술에 묻은 빵부스러기를 털어내며 웃었다.
“먹기는 새끼 사자처럼 게걸스럽고 입술에 묻히기는 새끼 고양이처럼 잘 묻히는군.”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제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언제!”
“내가 봤을 땐 언제나.”
“우리가 식사를 몇 번이나 같이 했다고.”
엘리자베스는 툴툴거리며 제 입술을 털어냈다. 그러다 잠시 후 자신이 한 말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생각해보면 그 말은 틀렸다. 지난 생에서 엘리자베스와 케이가 함께 식사를 한 것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지만 이번 생에서는 꽤 있었다. 지난 생에서는 손에 꼽을 만큼 적은 식사 자리에서 엘리자베스는 언제나 케이에게 지적을 하기에 바빴고 케이는 지적에 무례로 응대하기에 바빴다.
그때의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해도 먹어도 먹는 게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때를 생각하며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지며 느슨하게 머리카락에 걸려 있던 머리핀이 툭 떨어졌다.
엘리자베스는 빵을 든 손으로 케이를 보았다. 그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서 빵을 가져가서 한 입 문 채로 머리핀을 들어 엘리자베스의 머리 위에 해주었다.
“잘 어울릴 줄 알았어.”
엘리자베스는 그 목소리에 들어있는 이상한 감정을 느끼며 전율했다. 그녀는 목이 메어오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윌리엄 조쉬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하기가 어려웠다. 윌리엄 조쉬의 제안을 얘기하면 케이는 분명 혼자 가라고 할 것이었다. 윌리엄의 말대로 케이도 분명 그녀 혼자 가는 게 생존확률이 높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하고 싶은 말들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앰버가 얘기해줬어. 이게 네가……. 가지고 있던 디자인이라고.”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벽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듣고 싶어?”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눈을 보았다. 케이의 눈에는 아까부터 자꾸만 그 감정이 서려 있었다. 1년 동안 남부를 헤매던 엘리자베스가 늘 눈에 품고 다니던 그 감정.
그리움.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가 말했다.
“절대 그걸 만들지 않을 생각이었어. 그러지 않을 생각이었어. 리오든에 돌아오더라도 너를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고. 그런데…….”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가슴께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랬겠지. 자신을 죽여버리겠다는 여자를 상식적인 남자라면 누구든 피해 다닐 테지.
“너는 언제나 자꾸 내 앞에 와 있어.”
케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으므로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었던 게 아니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겠지. 당연히…….”
케이는 한 입 베어 문 빵을 다시 엘리자베스에게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빵을 집어 들고 우물거리며 일어났다. 엘리자베스가 나가려고 하기 전에 케이가 말했다.
“내가 한 말은 잊어.”
“무슨 말?”
그녀가 차마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같이 살자고 한 말 말이야. 거짓말이었어. 우린 절대 같이 살지 못할 거야. 어차피. 이곳에서든 이곳 밖에서든. 그러니 신경 쓸 것 없어.”
케이 하커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거짓말쟁이.’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돌아보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철문을 열었다. 그때였다. 바깥에서 누군가가 문을 연 듯 엘리자베스의 몸이 휘청거리며 그 힘에 끌려갔다. 엘리자베스가 놀라서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았다. 대장이었다.
대장은 굳은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가 그의 표정에 담긴 서늘함에 움찔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대장이 비릿하게 웃으며 그녀를 다시 자신의 쪽으로 당겨왔다.
뒤에서 케이가 일어났다.
“……할 말이 있다.”
케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엘리자베스가 간절하게 대장에게 말했다.
“할 말이 있어요. 조지 왕자랑 협상해요. 조지 왕자가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을 법한 협상안을 얘기해줄게요. 그러니까…….”
다 같이 살아서 나가요.
엘리자베스가 다음 말을 삼켰을 때였다. 대장이 말했다.
“조지 왕자와 협상은 없어. 아까 조지 왕자가 발코니로 왔더군, 의사 양반. 조지 왕자는 협상에 응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어.”
“겉으로는 그래 보여도 속으로는 다른 꿍꿍이를 품는 게 왕족과 귀족들의 생리예요!”
엘리자베스가 말하자 대장이 비릿하게 웃었다.
“여기 있는 동지들의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온 것도 귀족과 왕족들의 생리인가?”
대장의 목소리가 음울하게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털이 쭈뼛하게 서는 것을 느꼈다. 대장은 엘리자베스의 팔꿈치를 꽉 쥐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봐요…….”
엘리자베스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할 때였다. 대장이 엘리자베스에게서 시선을 돌려 옆에 있던 동지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의 곁으로 걸어오던 케이가 단숨에 그들에게 포박되었다.
“우리에게 가족이 있듯 왕족들에게도 가족이 있지. 하지만 국왕은 쓸모가 아직 남아 있으니 다른 쪽을 건드리는 게 낫지 않겠나.”
대장이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뚫어져라 보았다. 뒤에서 케이가 몸부림치는 게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통로에는 위태로운 표정의 윌리엄 조쉬 역시 서 있었다. 대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음 결투 예정자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몰락한 공녀다. 아름다운 제물이지. 당신은 숙녀고, 그러니 숙녀에게는 약한 상대가 필요하지.”
대장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들어 엘리자베스의 어깨 뒤를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눈을 감았다. 멋대로 의사 양반에서 몰락한 공녀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마침 이들 중 팔을 다친 사내가 하나 있으니 숙녀의 상대로 적절하겠군.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의 결투 상대는…….”
끔찍한 지옥 속에 던져지게 된 것이다.
대장이 말을 이었다.
“……케이 하커. 자본가의 아들이자 무역회사의 주인. 우리가 가장 타파해야 할 인민들의 주적, 유산계급이지.”
대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윌리엄 조쉬와 그의 동지 하나가 엘리자베스의 팔짱을 꼈다. 그녀는 반항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케이와 함께 결투장으로 끌려 나가면서 꿈속에서 본 것인지 진짜로 본 것인지 알 수 없는 몰록의 환영을 떠올렸다. 그 피 냄새에 이지를 잃어버린 자신도.
엘리자베스는 기도했다. 엄청난 근력과 육체적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동시에 영혼을 아주 약간이나마 남길 수 있게 해달라고.
그리하여 케이를 무사히 탈출시키게 해달라고.
엘리자베스와 케이가 계단을 올라가자 광장 중앙에 있는 선이 보였다. 과거 공화당과 왕당파가 결투를 해서 입법을 결정했다는 바로 그 선.
엘리자베스는 기도했다.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지금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야단스럽고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이제는 날아오는 심판의 시간에서 그녀도 향방을 결정해야 할 때였다.
회피인지 정면 돌파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