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42화
엘리자베스는 폭도들에게 끌려 다시 의회 청사 안으로 돌아왔다. 비명소리와 함께 단백질이 타는 냄새가 났다. 군중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마들! 신의 저주를 받으리라!”
질질 끌려 사다리 아래로 내려온 엘리자베스는 윌리엄 조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발코니 아래쪽 벽에 서서 장군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윌리엄은 어두운 눈동자로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다가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생각을 빨리 마치는 게 좋겠군,엘리자베스.”
“……살인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어요. 당신들의 행위는 대중의 공감을 받기엔 너무 멀리 갔어!”
그녀의 말에 윌리엄 조쉬는 피식 웃었다.
“그럼 어떻게 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때로는 세상에서 없어져야 마땅한 것들도 있는 법이야.”
엘리자베스는 윌리엄 조쉬의 얼굴에 드러난 체념과 좌절, 고통과 분노 따위를 읽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에게 방금 장군이 읽은 신문이 진실이냐고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 남자에게. 자신의 인생에 대해 타인에게 해명할 시간을 주어 너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기회를.
엘리자베스는 자신과 케이를 이 구렁텅이로 내몬 남자에게 줄 수 있는 너무 과한 자비심을 베풀고 싶었다. 그러나 조쉬는 엘리자베스의 질문을 기다리지 않았다.
“의사 선생으로서 당신은 썩은 살을 보면 어떻게 하지? 도려내지 않나. 나도 그랬을 뿐이야.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 그리고 내 형을 이 나라로부터 도려냈어. 자랑스러웠지. 내 자신이.”
조쉬 부부가 죽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의 일이다. 엘리자베스는 겨우 17살의 윌리엄 조쉬가 제 부모를 죽이는 장면을, 그리고 제 손으로 그것을 타살로 꾸며낸 다음, 형을 죽일 계획을 세우는 장면을 떠올려봤다.
“이 악마들!”
엘리자베스는 발코니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어쩌면 윌리엄 조쉬는 정말 악마일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는 섬뜩한 기분으로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곧 폭도들이 엘리자베스를 다시 평민원의 자리로 데려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 전에 대장이 먼저 내려와 광장에 모인 자본가들과 귀족들을 향해 외쳤다.
“이제부터 매일 4명씩 화형에 처한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협상에 성공하지 못하면…….”
대장은 붉어진 눈으로 씩씩거리며 정면만 바라보는 레트니와 이미 바지가 축축해진 총리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이 의회 청사는 폭파된다.”
엘리자베스는 레트니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청사 내의 모든 이들이 레트니의 입만 주시했다.
그는……. 그는 아무리 묶여 있더라도 레본의 국왕이었다. 레트니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귀족들은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 대장의 패거리는 몇 십이었지만 귀족과 자본가는 200명이었다. 국왕은 수가 아닌 의지에서 열세에 몰려 있는 이들의 기세를 조금이라도 북돋든지, 아니면 투항을 선언하여 생존을 도모하게 만들어줄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레트니는 그 중 가장 최악의 선택을 했다.
레트니는 눈을 감았다.
레트니가 눈을 감는 것은 엘리자베스에게 아주 느리게 보였다. 국왕의 최악의 선택은 오래도록 귀족과 자본가들, 그리고 엘리자베스와 케이, 윌리엄 조쉬와 대장의 패거리들의 뇌리에 박혔다.
레트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 *
그날 이후 상황은 점점 더 잔혹해지기 시작했다.
의회 청사 내부에 국회의원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던 음식이 배부되기 시작했는데 하루 동안 꼬박 굶은 이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문제는 준비된 음식 양이 겨우 이것의 두 배라는 거였다.
잠도 문제였다. 눈 밑이 검게 물든 국회의원들은 피로에 찌들어 소파에 어떻게든 몸을 비비고 잠을 청했는데 죽을 날을 받아둔 수많은 이들이 공포와 어둠 속에 잠겨 눈을 감고 있는 순간은 악몽이나 다를 바 없었다. 국회의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기를 반복했고 밤새도록 기도문을 외우느라 주변 사람들을 다 깨워놓는 이들도 많았다.
엘리자베스와 케이는 다른 국회의원들과는 달리 지킬 체면이 없었으므로 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벽쪽에 몰아놓고 그녀의 옆에 누워서 엘리자베스가 춥지 않도록 자신의 재킷으로 그녀의 몸을 덮었다. 엘리자베스는 하얗게 질린 케이의 얼굴과 그의 얼굴에 번들거리는 땀을 볼 때마다 공포에 질렸지만 티를 내지 않고 농담을 하려고 노력했다.
“여기가 마구간보단 낫지? 적어도 말 냄새는 안 나잖아.”
엘리자베스의 말을 들은 케이는 살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말 냄새보다 지독한 게 신사 놈들의 냄새지.”
엘리자베스는 키득거리다 저도 모르게 케이의 팔을 살짝 잡았다. 그러자 케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새벽녘에 엘리자베스는 혼자 깨어나서 신음을 흘리며 자고 있는 케이를 깨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의 팔 붕대를 살짝 풀었다. 감각이 예민한 편인 케이는 몸의 피로 때문인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팔의 붕대를 풀기 시작하자마자 피와 섞인 주홍빛의 고름물이 흘러나왔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에 땀이 맺히는 것을 느끼고 소매 끝으로 땀을 닦았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와 누운 곳 건너편에서는 발코니를 통해 달빛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달빛을 통해 이미 썩어버린 상처를 보았다. 괴사를 막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어미를 잃은 새끼짐승처럼 숨죽여 울었다. 내가 아니라 케빈이 있었다면, 루이 교수님이 있었다면, 아니…… 엘우드 밀이 있었다면 케이의 팔은 멀쩡했을까?
이대로라면 케이를 데리고 나간다고 하더라도 팔을 자르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치미는 눈물과 토기를 꾹꾹 눌러 참으며 다시 붕대를 케이의 팔에 감았다. 비통한 눈으로 그녀가 허공을 응시했을 때, 달빛으로 가득 찬 광장 벽에 뭔가가 움직였다.
검은 그림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돌렸다. 발코니 쪽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착각인가 하여 다시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또 검은 색 그림자가 광장 벽에 일렁였다. 발코니 쪽을 다시 보았다.
그러자 거기에 있었다.
하얀 털북숭이, 황소 같은 몸집, 붉은 눈동자를 한 몰록이.
엘리자베스는 숨을 들이마셨다.
달빛을 뒤에서 받는 몰록의 붉은 눈은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났다.
엘리자베스는 그것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광장 안에서 끙끙거리며 잠든 귀족과 자본가들은 물론이고 불침번을 서는 폭도들 중 그 누구도 몰록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때, 몰록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기다랗고 검은 손톱이 유려하게 움직이더니 허공에서 호선을 그렸다.
‘뭐지?’
엘리자베스는 의아했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엘리자베스는 몰록이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그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전처럼.
그럴 수 있다면…… 혹시……
그때 몰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섯……. 일곱……. 열…….’
엘리자베스는 귓가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듣다가 천천히 몰록의 손짓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것은 엘리자베스에게로 향하는 어떤 의미가 있는 손짓이 아니었다.
그건 그저 먹이의 숫자를 세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팔뚝에 돋아난 소름을 다른 쪽 손으로 가리며 몰록을 노려보았다. 그때 몰록이 케이를 가리켰다.
‘열다섯.’
엘리자베스가 몰록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몰록은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건 널 줄까?’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분노하여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맘대로 되지 않았다. 그때 몰록이 검은 손톱으로 제 피부를 살짝 긁어 피를 내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이상한 냄새가 그녀의 코 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몰록이 손톱에 피를 묻혀 쭉 뻗어 내밀었다.
벽지에 기다란 손톱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끝에는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와 동시에 몰록의 피 냄새가 자신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하늘과 바닥이 돌았다. 가슴 안에 들어 있던 모든 충동이 순식간에 해방되었다. 욕심, 욕망, 충동, 본능. 그런 것들이 엘리자베스의 육체를 완전히 지배했다.
엘리자베스는 몰록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언제나 몰록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다. 인간을 먹지만 피 안에는 인간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인간으로서의 영혼도 여전히 그의 안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이제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몰록의 영혼은 몰록 안에 있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피 냄새를 맡는 순간 제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자각조차 잊었다. 그녀는 그저 눈앞에서 숨쉬는, 피 냄새를 폴폴 풍기는 건장한 한 남자를 보았다.
너를……
엘리자베스는 헐떡거렸다.
너를 먹고 싶어.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엘리자베스.”
눈을 뜨자마자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흠칫 놀라서 제 입과 코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그러자 케이가 피식 웃었다.
샹들리에가 켜지고 발코니에서 안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지금이 아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어제 본 몰록은…… 꿈이었을까?
엘리자베스는 다급하게 케이의 팔을 잡았다.
“어때? 괜찮아?”
케이는 팔이 잡히자마자 신음소리를 흘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케이는 기운이 없어보였다.
“괜찮지는 않지만, 나쁘지도 않아. 일단 이제 아프지 않군.”
아프지 않다는 건 나빴다. 그건 신경이 죽어가고 있는 범위가 넓어져 간다는 뜻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어젯밤 다시 묶어놓은 붕대와 같은 모양으로 묶인 붕대 끄트머리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 그건 뭐였을까? 어디서부터 실제고 어디서부터 꿈이었을까?
“너잖아! 너! 네가 훔쳤지! 이 도둑고양이 같으니! 이래서 평민들을 의회에 들이면 안 되는 거였어!”
그녀와 케이는 소란스러운 한쪽 구석을 보았다. 신사들끼리 멱살을 잡고 싸우고 있었다. 배정된 음식을 한쪽이 훔쳐갔다, 훔쳐가지 않았다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니라고! 그쪽의 그 돼지 같은 먹성 때문에 음식이 적게 느껴진 거겠지!”
그 모습을 사나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국회의원들이 엘리자베스의 눈에 보였다. 다들 서로를 향해 조금도 체면치레를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어젯밤 남겨둔 빵 하나를 옆에서 자고 있던 여자직원이 물끄러미 보는 것을 알아채곤 슬쩍 뒤로 물렸다.
이건 케이를 위한 것이었다. 약을 먹어야 하니까.
엘리자베스가 그러는 와중에 대장이 나타났다. 그걸 보곤 싸우던 이들이 싸움을 멈췄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대장이 말했다.
“이 둘은 곧 있으면 결투 신청을 할 것 같으니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앞으로 나와서 싸워. 칼을 잡고 사내답게.”
대장의 말과 함께 엘리자베스가 몸을 떨었다. 케이가 그런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의회 청사가 고립된 지 3일째 낮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