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41화
“……나에게 지금 자문이라도 구하는 건가요?”
엘리자베스가 묻자 대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내가 의사에게 정치를 논할 이유가 뭔가. 그냥 내기를 해보자는 거지. 의사 양반이 얼마나 왕족을 잘 아는지, 그게 얼마나…….”
대장은 엘리자베스를 뚫어져라 보던 눈빛을 그대로 엘리자베스 뒤쪽에 있는 케이에게로 가져갔다.
“……쓸모가 있을지 그런 걸 생각해보자는 거야.”
케이가 그 너덜너덜한 몸뚱어리로 당장이라도 달려들듯 굴자 순식간에 폭도들이 케이를 진압했다. 엘리자베스는 무참하게 다뤄지는 케이를 보며 대장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빨리 발코니로 내보내주기나 해요. 몇 명이 왔든, 안 왔든, 지금 나가지 않으면 약속시간에 늦을 테니까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대장이 엘리자베스의 뒤쪽에서 벌벌 떠는 패자들을 보았다.
패자들은 저마다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공포심에 혼이 나간 표정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아주 잠깐 그들을 돌아보았다가 다시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용기가 나지 않아 대장 쪽을 보았다.
대장이 턱짓했다.
“묶어.”
대장의 말과 함께 폭도들이 또 다시 밧줄과 나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뒤에서 아우성치는 패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들이 모두 처형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
몇 명이 올 것 같으냐는 대장의 질문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대답은 간단했다.
하나, 아니면 아무도.
하나라면 그것은 조지 왕자일 것이고, 조지 왕자가 발코니 아래에 서 있다면 그때는 조지 왕자가 군부를 장악했다는 뜻일 것이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면 왕족들이 서로 여전히 패권 다툼에서 뚜렷한 승자를 정하지 못했다는 뜻이리라.
둘 다 이 무정부주의자들이 원하는 답은 아니겠지만 더 최악을 고르라면 전자였다.
조지 왕자가 오면 무정부주의자들과 쓸모없이 가주 자리를 오래 차지한 귀족들을 산채로 묻어버리고 싶어 할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이 의회 청사가 모두의 무덤이 될 것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 의회 청사는 무엇보다도 레트니 클레몬트의 무덤으로 불리리라. 조지 왕자는 국왕의 무덤이 된 의회 청사 앞에서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이곳에 함께 묻힌 자작과 백작, 후작들의 국왕을 지키지 못한 죄가 얼마나 큰지 논하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새로운 작위를 내리겠지.
엘리자베스는 폭도들에게 끌려가며 케이를 돌아보았다. 케이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도 폭도들에게 반항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앉아 있는 평민원 자리에서 여유가 없는 얼굴로 공포에 질려있는 자본가들을 보았다. 돈 많은 평민들— 저들은 국왕의 무덤 안에서도 이름을 얻지 못하리라.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사다리 앞에 다다랐을 때 폭도들이 그녀의 등을 총부리로 쿡쿡 찔렀다. 엘리자베스는 사다리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 * *
엘리자베스가 발코니에 도착했을 때는 2층 아래에 정복을 갖춰 입은 장군 한 명이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뒤를 이어 2층에 도착한 대장은 불쾌한 얼굴로 장군과 대화를 나눴다. 장군은 오늘은 왕족이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전했다.
휘황찬란한 배지들을 잔뜩 달고 있는 장군은 딱딱한 얼굴로 대장에게 몇 가지 문장을 말했다. 그의 뒤, 장군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까지는 군인들이 군중을 통제하고 있었다.
군중의 숫자는 엘리자베스의 눈대중으로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군인의 숫자는 늘어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어제와 달리 군인들이 우왕좌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주목했다. 군인들은 군중에게 밀려나거나 폭도들의 행동에 크게 동요하는 유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 군인들은 막사를 지어놓고 컬로든 궁부터 시작해 의회 청사까지의 길에 분명한 경비선을 만들어 놓았다. 아직 군부를 통제하는 단 ‘하나’의 머리는 없더라도 장군들이 현명하게 자신의 새로운 주인을 모실 준비를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당장 왕비를 불러와. 왕비와 대화를 해야겠다. 왕비가 사교 시즌마다 짝을 지어 결혼시킨 귀족 부인들의 남편들이 이 안에 잔뜩 잡혀 있는데, 이들이 죽어도 왕비의 체면이 괜찮을지 물어봐야겠군!”
엘리자베스는 대장이 조금씩 흥분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녀는 대장이 겨우 하루 만에 수세에 몰리고 있음을 느꼈다. 대장과 폭도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포기할 정도의 용기는 갖추고 있었지만 세상을 너무 평면적으로 보고 있었다.
귀족과 왕족들이 정말로 자신들의 국왕을 향해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귀족과 왕족들이 신사도를 동경하고 충성심을 과시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진짜로 국왕을 사랑하고 이 나라를 아끼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불길한 눈으로 대장이 침을 튀겨가며 자신들의 요구서를 다시 읽고, 이미 2명은 기절해버린 패자들을 십자가에 묶게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장 옆을 지키던 폭도들이 전단지를 던져댔지만 그것은 군인들의 철모 위로 쏟아질 뿐, 군중이 있는 곳까지는 닿지도 않았다. 그때였다.
삐이이이익—
장군 쪽에서 고막을 찢어놓을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막사에서 장군에게로 작은 수레 같은 것에 실어서 가는 전기 장치를 보았다.
삐이이이—
그들의 전기 장치는 단숨에 대장의 목소리를 파묻어버렸다. 장군은 동그란 자석 같은 것을 들고 말했다. 스피커였다.
“폭도들에게 말한다. 지금 노스 리오든은 폐쇄되었다. 오늘자 신문을 읽어주겠다.”
대장은 요구서를 목이 쉬어라 계속 읽으려다가 ‘폐쇄’라는 말에 말을 멈췄다. 엘리자베스는 장군에게 장교 중 하나가 신문을 가져다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폭도들에게 무자비를. 어제 오전 중 일어난 의회 청사 폭탄 테러 사건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이들은 윌리엄 조쉬 경, 솔튼 빌리스 경을 포함한 다수의 남성들로 구성된 <인민해방회>의 조직원들로 레본의 위대한 사업가였던 로버트 하커 씨를 산 채로 화형에 처하는 끔찍한 범행으로 많은 국민들을 경악케 하였다…….”
대장은 장군에 말에 항의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전기 스피커의 힘은 강력했다. 대장의 목소리는 군중에게 들리지 않았지만 장군의 목소리는 의회 청사 앞은 물론이요 이 근처 모든 건물에 들릴 것 같았다.
대장이 읽는 신문 속 내용은 꽤나 신빙성 있는 사실에 근거한 것 같았지만 문장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점점 이 테러의 이유나 진행과정 따위에서 벗어나 폭도들의 신변잡기에 관한 내용으로 주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이 중에서도 윌리엄 조쉬 자작은 과거 <인민해방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제 부모와 형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경악을 사고 있다.”
특히나 윌리엄 조쉬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졌을 때는 뒤에 있는 군중들마저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부모와 형을……. 살해했다고? 그녀는 조쉬 자작 부부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떠올려보았다. 강도 살해 사건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이렇게 기억하는 이유는 이 사건을 부모에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근교에 살던 조쉬 자작 부부가 죽은 후, 자작 부부의 시신을 확인하고 돌아가던 장남마저 마차 사고로 죽었다고.
엘리자베스가 사교계에 데뷔하기도 전의 일이었건만 일주일 새에 연이어 일어난 조쉬 자작가의 비극은 꽤나 충격적이었고 차남이었던 윌리엄 경이 그 충격으로 ‘자작위’ 승계를 거부하고 ‘경’ 칭호만 유지한 것으로도 그 사건은 사교계에서 오래 회자되었다.
윌리엄 조쉬가 바람둥이 같은 겉모습에서는 유추되지 않는 그런 깊은 어둠을 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윌리엄에게 더더욱 애정을 바치려는 아가씨들이 있었다. 사실 저 남자는 10대 시절의 큰 상처 때문에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것이며 저 상처를 치유하는 여자는 저 남자를 완벽하게 소유하게 되리라는 애정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 조쉬가 아가씨들의 그런 상상력을 제법 이용했던 것도 기억했다.
‘사람들은 너무 미래를 보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레이디, 미래란 불확실한 거예요.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는 것이지요. 대체 왜 그런 것에 자신을 맡긴단 말입니까. 인간은 누구나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행복은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니까요. 저는 불꽃같은 사내가 될 겁니다. 제 불꽃에 타버리지 않는 여자를 고르려거든 같은 불꽃을 가진 여자를 골라야겠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여자들은 불꽃이 아니라 불꽃에 타는 불나방이 되는 쪽을 선택했고 윌리엄 조쉬는 그들을 태우는 불꽃이었다.
하지만 그의 불꽃이 그의 부모와 형까지 거둬갔던가. 엘리자베스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장군의 목소리를 끝까지 들었다.
“<인민해방회>란 극악무도한 조직은 심지어 자신들의 살해행위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엘리자베스는 점점 침묵에 잠겨가는 대장의 얼굴을 보았다. 대장은 분노한 얼굴로 자신들의 동지들을 보았다. 대장이 나지막이 말했다.
“태워.”
대장의 명령에 동지들이 머뭇거리다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대장이 소리쳤다.
“태워!”
대장의 목소리에 동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절해 있지 않던 패자들은 몸부림을 쳤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안 돼!”
엘리자베스는 장군이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장군은 지금 적진의 사기를 떨어뜨려 항복을 권유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이 완벽하게 고립되어서 이곳에서 다 같이 자결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특히나, 국왕과 함께.
엘리자베스는 아까 자신이 가졌던 가설을 약간 수정했다. 어쩌면 이미 단 ‘하나’의 머리가 이 군대를 움직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장군은 서서히 지푸라기를 태우는 폭도들을 보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왕비 마마를 포함한 왕족들은 이 반역자들에게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을 결의하였다. 반역자들은 반드시 처단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의 위대하신 국왕께서도 그 쪽을 원하고 계실 것이다. 실제로 반역자들은 국왕께서 살아 계시다는 그 어떤 증거도 가지고 오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은 그저 산 사람들을 태우는 즐거움으로 악마 같은 미소를 얼굴에 달고 있을 뿐이다.”
엘리자베스는 장군이 끝까지 신문을 읽고 났을 때, 군중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더 선명하게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완벽한 타이밍에 흘러나오기 시작한 귀족과 자본가들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지금 군중들에게 이 무정부주의자들은 그저 살인에 미친 악마들에 불과했다. 대장의 계획은 실패했다.
완벽하게.
엘리자베스가 대장에게 소리쳤다.
“그만둬요. 이쯤에서 그만하라구요. 차라리 협상을 해요. 이건 개죽음이야! 모두의 개죽음이라고! 당신들은 이 사람들만 태우는 게 아니야, 스스로의 영혼을 태우고 있어!”
짝!
대장이 엘리자베스의 뺨을 거세게 내리쳤다. 군중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악마들!”
“당장 공녀를 놔줘!”
“폐하를 석방해라! 석방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