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40화
“하지만 당신이 영리한 거랑 당신의 말에 설득당하는 건 다르지. 우린 말했다시피 우리의 목숨 줄에 별로 관심이 없으니까.”
조쉬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이를 악물었다.
“이건 당신들의 목숨 줄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말했을 텐데요?”
“당신은 지금 나를 협박해서 나가면 된다고 말했을 텐데?”
윌리엄은 엘리자베스의 손에 들린 칼을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이런 개자식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니. 엘리자베스는 스스로의 노력이 어이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칼을 꽉 쥐고 당장이라도 조쉬를 찌를 것처럼 그의 목덜미에 가져다댔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당장이라도 당신의 급소를 찔러 죽이는 방법을 나는 수십 가지는 알고 있어. 그뿐일까? 나는 당신들을 다 죽여버리고 케이를 데리고 나갈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나는 의사고, 이 칼로는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기로 했으니까…… 그러기로 했으니까…… 다 같이 나가자고 말하는 거야. 조금이라도 진보하는 방향으로 걷자고 말하는 거라고.”
엘리자베스는 말을 끝낼 때쯤에는, 특히나 ‘진보’라는 단어를 꺼낼 때쯤에는 울컥한 표정으로 손을 떨었다. 그녀는 조쉬가 그녀의 손을 쥐기 전에 칼을 느슨하게 쥐어 일부러 손에서 떨어뜨렸다.
딸랑. 경쾌한 금속성과 함께 엘리자베스가 조쉬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표정을 굳혔다.
“생각해봐요. 생각이라는 걸 해보라고.”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철문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돌렸다. 그녀는 어두운 지하통로로 나왔다. 그러자 그 끝에, 광장으로 나가는 계단참에 서 있는 두 명이 보였다. 한 명은 케이였다. 그러나 케이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케이를 부축하고 나간 이가 아니라 엘리자베스에게도 익숙한 얼굴, 솔튼 빌리스였다.
케이 하커는 의아한 표정의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치자 솔튼 빌리스에게 말했다.
“갑시다.”
마치 명령이라도 하는 투로. 하지만 솔튼 빌리스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케이를 부축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엘리자베스의 뒤쪽에서 윌리엄 조쉬가 튀어나와 그녀의 팔꿈치를 그러쥐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대장 동지에게 아까 했던 말을 꺼낼 생각은 하지 마시오. 그는 그런 류의 거래를 혐오하는 인간이고 무엇보다도 케이 하커를 증오하고 있소.”
“레본에 의회 민주주의를 들여오려고 했다는 이유로요?”
엘리자베스가 어이가 없어서 비릿하게 웃으며 말하자 윌리엄 조쉬가 대답했다.
“그가 자본가의 아들이자 매국노라는 이유겠지.”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의 말에 돌아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윌리엄 조쉬는 발을 허공에 두고 눈은 땅을 향하게 내리까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바닥에 서 있지도 않으면서 내내 바닥의 문제점을 논했고 하늘을 이상이라 말하면서도 하늘이 정확히 무엇인지 확인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 하늘을 향해 나아갈 방법을 알지 못했고 이 이상주의자가 할 수 있는 말은 오로지 이 땅은 지옥이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은 누가 못 하랴. 이 땅은 누가 봐도 지옥인데.
“당신한테도 생각할 시간을 주겠소. 생각이라는 걸 해볼 시간을. 오늘까진 시간이 있으니 내일 얘기합시다. 당신이 정말로 탈출할 생각이 있다면 내가 당신 하나는 반드시 빠져나가게 해주겠어.”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는 절대 나가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대단한 사랑이군.”
조쉬가 그녀를 비웃으며 그녀의 팔꿈치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엘리자베스는 조쉬에게 연행되어 계단 쪽으로 걸었다.
엘리자베스는 계단을 오를수록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에 주먹을 꽉 쥐었다.
배가 불룩 나온 병약하고 심술궂은 귀족과 눈에 독기를 품은 자본가의 결투. 이겨도 져도 죽는 경기라고 해도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의심했고 자신의 승리는 자신했다. 언제나 운명이 자신들의 편을 들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레본에서 귀족과 자본가는 언제나 이기는 쪽이었으리라.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어리석은 결투를 보다 광장 중앙에 서서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대장을 노려보았다. 대장은 마치 신이라도 된 얼굴이었다. 내가 너희들에게 어차피 죽을 운명임을 미리 말해주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몸부림치다니……. 멍청한 것들.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오만에 몸을 떨었다. 그 오만은 그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에 나오는 결과물이었다.
윌리엄 조쉬의 말이 맞았다. 대장에게는 엘리자베스의 어떤 이성적인 말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윌리엄 조쉬는 엘리자베스를 여자 직원이 있는 쪽으로 걷게 했지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윌리엄 조쉬를 노려보곤 평민원의 자리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앉아있는 케이의 옆으로 걸어갔다.
케이가 혈색 없는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려 다시 자신들의 동지 쪽으로 돌아가는 윌리엄 조쉬를 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윌리엄 조쉬와 이야기는 잘 끝냈나?”
“그래. 잘 했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그녀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그랬겠지.”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목소리에 담긴 날선 불신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품 안에서 약을 꺼내어 케이에게 내밀었다.
“먹어.”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죽든 살든 지금은 내 말을 들으란 말이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신음소리를 내며 그녀의 손에 놓인 알약을 받아 들고 씹어 삼켰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그것을 다 삼키는 것을 끝까지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푹!
“으억!”
엘리자베스는 귀족의 손등을 파고든 자본가의 칼날을 보았다. 자본가의 칼날이 잠시 그곳에 박혀 있는 사이에 귀족의 칼은 자본가의 팔뚝을 노렸다.
본회의장은 금세 다시 빨간색으로 물들었다. 엘리자베스는 피 냄새를 느끼며 K. P. 라고 쓰인 유리병 안에서 알약을 빼서 씹기 시작했다. 토기가 밀려왔다.
“으아아악! 죽어! 죽으란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입과 코를 막고 손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귀족이 자본가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끝까지 그 광경을 눈에 담으려고 했으나 이내 밀려드는 토기에 지고 말았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돌리자 케이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던 케이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모두…… 모두…… 괜찮을 거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서툰 목소리에서 떨림을 느꼈다. 그 떨림은 결코 공포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케이는 결코 이 정도 일에 굴욕을 갖추는 자가 아니었다.
케이는 지금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엘리자베스처럼.
* * *
결투는 지난하게 이어졌다. 귀족들보다는 자본가들이 조금 더 힘과 민첩성 측면에서 우세했다. 물론 펜싱을 배운 후작 하나는 순식간에 자본가를 이겼다. 하지만 그들은 밧줄에 묶여서 총살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자마자 승리의 기쁨을 얼굴에서 지웠다.
“자, 잠깐만……. 우린 이겼잖소!”
후작이 애처롭게 외쳤다. 그러자 사제복을 입은 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자비롭게 보내주지.”
탕!
엘리자베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겨진 대장의 방아쇠에 케이의 허리춤에 매달렸다. 케이가 옅은 신음성을 흘렸다.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감싸쥔 케이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케이의 품으로부터 빠져나오자 케이의 거구가 스르르 그녀 쪽으로 기울었다.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케이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받았다.
“정신 놓으면 안 돼.”
엘리자베스는 알약을 또 꺼내어 씹기 시작했다. 최대 복용량을 넘어선 것이지만 괜찮을 것이다. 케빈이 알려준 최대 복용량은 엘리자베스의 몸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몸집의 거의 2배 정도는 되었으니 말이다. 아니, 괜찮을 거라고 믿어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거구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부터 뛰기 시작한 심장의 박동소리가 자신의 머리를 둥둥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케이의 멱살을 쥐고 애원하고 싶었다.
‘너를 살려내.’
지금 케이가 죽어가는 무시무시한 상황 속에서도 엘리자베스가 기댈 곳은 케이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뺨을 때리며 윽박지르고 싶었다. 나를 두고 가지 마. 너는 나한테 그러면 안 돼. 너는 나한테 죽기로 했잖아. 그러기로 했잖아.
하지만 이 망할 자식은 언제나 말을 지키지 않는 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벌벌 떨면서 케이의 입술 안으로 약을 밀어넣었다. 처음에는 미동도 하지 않던 케이의 혀가 움직여 엘리자베스의 약을 받아먹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숨을 느끼며 케이가 약을 실수로라도 뱉어내지 않도록 그의 뒷머리를 살짝 잡아당겼다. 케이가 그녀의 타액이 섞여 짓무른 약을 삼키는 것을 확인한 엘리자베스는 그의 뒷머리를 살짝 놓았다.
케이는 지친 얼굴로 눈을 반쯤 감은 채 엘리자베스의 어깨 위에 얼굴을 묻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의 얼굴을 더 자신의 품 쪽으로 당겨 안았다.
탕!
탕!
그와 거의 동시에 반항하던 자본가들 역시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했다.
엘리자베스는 광장 바닥을 적시는 피를 보며 총살당한 승자들 앞에 무릎 꿇은 패자들의 겁에 질린 얼굴을 보았다. 엘리자베스가 그 얼굴들을 살피는 사이에 소총을 절도 있게 거둔 대장이 말했다.
“이제 곧 2시로군.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약속을 잘 지키는 지 보도록 하지.”
대장의 말에 패자들은 눈에 띄게 벌벌 떨기 시작했다. 대장은 그런 얼굴들을 지루하다는 듯이 보다가 한순간 고개를 돌려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왕족은 왕족과 대화가 잘되지 않겠나. 나오게, 의사 양반.”
그 말에 대장 옆에 서 있던 윌리엄 조쉬가 불안한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가지 마.”
케이의 갈라지는 목소리에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눈을 가만히 보았다.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하는 사이에 대장이 말했다.
“당장 일어나.”
대장은 철컥, 하는 서늘한 소리와 함께 능숙하게 소총을 장전했다. 케이는 이를 악물며 대장을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으로.”
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난 엘리자베스를 보며 패자들과 자신 사이의 공간을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는 주춤거리며 천천히 걸어서 대장의 앞으로 갔다. 그러자 지친 표정의 레트니가 엘리자베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나의 조카…….”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무시하며 대장을 보았다. 그러자 대장이 발코니 쪽으로 뚫린 창문을 가리키며 서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밖에 왕족이 몇 명이나 와 있을 거라고 보나, 의사 양반?”
윌리엄 조쉬가 엘리자베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