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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39화 (139/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39화

문을 연 것은 윌리엄 조쉬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철문을 열고 무감하게 두 사람을 살피던 남자가 자신에게 고갯짓을 하는 것을 보았다.

“나와.”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팔을 잡아챘다. 어제 패혈증 쇼크를 겪은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케이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말한 대로 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을 털어내며 이를 악물었다. 그때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오시오. 결투가 벌어지는 것은 참관을 해야지. 둘 다. 자신들이 치를 대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란 말이오.”

윌리엄 조쉬였다. 그는 어제부터 계속 엘리자베스에게 화가 난 얼굴이었다. 그는 엘리자베스와 케이를 번갈아 보다가 엘리자베스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내가 숙녀를 끌어내게 하지 마시오.”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을 째려보고는 케이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케이의 손에 다시금 항생제를 쥐어주며 말했다.

“윌리엄 경과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엘리자베스는 ‘숙녀’라는 말이 끔찍하게 싫었지만 지금은 그걸 이용해야 될 때라는 걸 알았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 조쉬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최대한 처량한 얼굴로 위장하고 말했다.

“……숙녀가 부탁하는데 설마 단 5분도 안 된다는 건 아니겠죠. 숙녀로서 말할 수 없는 유언 같은 걸 남겨야 하는 일이에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남자가 움찔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남자의 신사로서의 자아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눈치채곤 군인의 옷을 입은 남자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이 남자는 어떤 생애를 살아왔을까. 엘리자베스는 궁금했다. 신사라는 말에 반응할까?

과거 신사란 귀족 남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엄격한 호칭이었으나 이제 레본의 모든 남자들은 신사라는 말에 반응했다. 귀족들은 당연히 그 호칭이 자신의 것인 듯 여겼고 귀족이 아닌 사내들은 신사라는 말에 반응하지 않으면 교양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간주될까 두려워했다.

신사이든, 신사가 아니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를 신사라고 여겨야 레본 땅의 시민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런 레본의 유명무실한 질서를 뒤흔들어놓고 싶어 하는 혁명가들조차도.

“신사라면 당연히 제 유언을 궁금해해서는 안 되는 거죠.”

엘리자베스의 말에 과연 남자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갑자기 귀족적인 몸짓을 흉내 내며 엘리자베스에게 인사를 하곤 케이를 부축해서 데리고 나갔다. 케이는 나가기 전에 엘리자베스를 힐끔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한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나는 한 손가락으로도 널 죽일 수 있다.

엘리자베스의 손짓을 본 케이는 피식 웃더니 남자의 부축을 받고 나가기 전에 윌리엄 조쉬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신사인가?”

케이의 질문에 윌리엄 조쉬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의 내가 신사로 보이오?”

“그렇다면 다행이군.”

“왜.”

윌리엄 조쉬가 케이의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신사 놈들이란 죄다 저보다 약한 것들의 등골을 빨아먹기 위해 눈이 시뻘거니까.”

케이의 말에 케이를 들쳐 업고 있던 남자의 몸이 움찔했다. 케이는 곧 그 남자와 함께 철문 밖으로 나갔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엘리자베스는 몸을 움츠렸다.

이 방에 결국 조쉬와 단둘이 남게 되자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자는, 신사가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 조쉬를 보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먼저 말한 것은 윌리엄 쪽이었다.

“유언이라는 게 뭐지?”

“이쯤에서 멈춰요, 윌리엄 조쉬.”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을 보았다. 케이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엘리자베스를 구할 계획을 세우던 어젯밤 내내 그녀 역시 그녀 자신과 케이 하커를 구할 계획을 세웠다. 이 폭도들을 뚫고 의회 청사를 나갈 계획을.

하지만 역시 이 폭도들을 뚫고 나갈 방법은 오로지 자신이 괴물이 되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는—

함께 사는 것. 그것 밖에는 없었다.

“당신들의 혁명은 실패야. 이미 시작부터 실패였어. 알고 있지 않나요?”

엘리자베스가 조쉬를 노려보자 조쉬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건 두고 봐야 알지. 우리는 살기 위해 뭉치지 않았어. 죽기 위해 뭉쳤지. 우리의 화려한 죽음을 통해 이 나라가 조금이라도 바뀌길 바라며 뭉쳤다고. 망할 왕이 물러나가고 이 나라에 인민들의 땅이 들어서면 그걸로 우리는 성공한 거야.”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실패했다는 거야. 레본은 변하지 않아. 망하지도 않아. 당신들만이 변하고 망하고 죽을 뿐이지.”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의 얼굴이 살짝 떨려왔다. 윌리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각자 생각하는 게 다를 뿐이니.”

윌리엄은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더니 순식간에 품 안에서 칼을 꺼내어 엘리자베스를 노렸다. 그와 동시에 엘리자베스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품 안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냈다. 두 사람의 칼이 허공을 스쳤다.

윌리엄이 피식 웃었다.

“여전하군.”

“누가 할 말인지.”

엘리자베스가 윌리엄을 노려보고 있을 때, 윌리엄이 바닥에 칼을 내던졌다. 딸랑. 경쾌한 금속성의 소리와 함께 윌리엄은 빈손으로 엘리자베스의 칼 앞에 서게 되었다.

윌리엄은 엘리자베스의 눈이 커지는 것을 가만히 보더니 말했다.

“나를 찌르시오.”

“뭐요?”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당황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조쉬는 춤 신청이라도 하는 듯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솔튼 빌리스를 소개해준 것은 당신이고, 당신을 이 자리에 오도록 내몬 것은 나이니, 서로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나. 대충 원하는 곳을 한 곳 찌르고 피를 흘리는 나를 인질 삼아 뒷문으로 가시오. 내가 알기로 당신들이 가려고 했던 뒷문은 당신처럼 힘 센 여자라면 충분히 몸으로 부딪혀 나갈 수 있어. 폭발 잔재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까진 장담해줄 수 없지만.”

엘리자베스가 윌리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혼란스러워하면서 말했다.

“솔튼 빌리스를 내가 소개해줬다는 거, 그리고 내가 이 자리에 온 게 당신 때문이라는 거, 그게 무슨 뜻이죠?”

엘리자베스의 물음에 윌리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더니 벽에 등을 기대고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뒤,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생각나지 않나. K라는 이름이 적힌 계약서를 알아봐 달라지 않았나. 그걸 알아본 덕에 솔튼 빌리스와 접촉할 수 있게 된 거야.”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칼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젠장. 결국은 또 미래를 바꾼 것이 엘리자베스였다. 엘리자베스는 이제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트니 에비뉴 2번지에서 총을 쏜 건 당신이었군요. 그래서 솔턴 영애가 필요했던 거고.”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킬리언이었지.”

킬리언.

엘리자베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디선가 들은 이름이었다.

’킬리언은 안 돼. 급진적인 인사잖아. 저번에 하는 말 못 들었어? 그 자식은 레본에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레본을 폭파시키고 싶어 하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내가 아니라 킬리언을 심고 싶었던 거예요. 평민원 추천인 자리에. 그렇죠?”

그 말은 애초부터 무정부주의자 놈들은 참정권 운동가들의 계획을 전부 알고 있었다는 거고 그걸 방해하려고 들었다는 뜻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이 나라가, 이 레본이, 근간부터 흔들릴 수 있는 기회였어요. 평민원의 자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썼는지 알아요?!”

엘리자베스가 소리치자 윌리엄 조쉬가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세상을 바꾸는 건 법이나 의회, 특권 따위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평민원이 확대되어 봤자 결국 그 자리에 앉는 건 선거철에 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포퓰리즘이나 구가하는 썩어빠진 자본가들이 될 거야. 멜니아를 봐. 앰버 모건이 설설 기는 그 모건이라는 자는 입으로는 노예 해방을 외치지만 사실은 노예를 인간으로 취급도 하지 않아. 모건은 그저 노예를 해방시켜 제 노동자로 쓰고 싶은 거야. 방직공장에서 겨우 임금 몇 푼에 영혼까지 내놓을 것처럼 굴 노동자가 게으른 노예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거지. 제 몸과 재산을 귀속당한 노예는 결혼을 할 수도 아이를 낳아 키울 수도 없지만, 노동자는 사유재산을 가지고 그 조그마한 사유재산에 영혼까지 귀속당할 테니까.”

윌리엄 조쉬는 칼을 든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팍으로 당겼다. 그러고는 그 칼을 당장이라도 제 가죽을 뚫을 것처럼 비틀어 자신의 단추 하나를 뜯어냈다. 엘리자베스는 칼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조쉬가 엘리자베스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결국 모건은 대통령이 되겠지. 레본은 모건이 내어줄 멜니아의 항구가 아까워 민주주의를 들여올 거고 레트니는 꼴좋게 물러날 거야. 세상에. 몇 년 전 국가 부채를 어마어마하게 늘려놓고 인민을 수없이 죽인 국왕이 멋지게 물러나다니. 그럴 순 없지 않나. 적어도 동지들의 한을 우리는 풀어줘야 하지 않나.”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었다.

“국왕의 목을 친다고 한들 뭐가 바뀌죠? 문 밖에 있는 왕족들은 금방 군부를 장악해 밀고 들어올 거예요. 여기 모인 귀족들의 목을 쳐도 같아요. 여기 있는 가주가 죽으면 그 다음 후계자가 리오든의 화려한 타운하우스와 컨트리하우스, 그리고 작위를 손에 쥐고 다음 왕에게 충성하겠죠. 복수? 복수라는 건 그냥 허상일 뿐이에요. 과거는 절대 바뀌지 않아요. 과거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건 그냥 뇌의 장난질일 뿐이야. 중요한 건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의 인생이에요. 이미 주어진 지옥 속에서 기어나가야 할 사람들의 몸부림이라고! 당신은 이 일로 또 얼마나 많은 인민이 죽어갈지는 생각도 하지 않죠. 조금도!”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가 꾸짖음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여태껏 그녀가 해온 짓이었다. 과거를 바꾸기 위해 몸부림치며 더 최악의 미래를 만드는 것.

윌리엄 조쉬가 성난 얼굴로 외쳤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2시에 조지 왕자가 장군들을 대동하고 나타날 거예요. 분명해요. 그리고 국왕의 서명이 없는 칙서는 효력이 없다고 당신들을 쓸어버리겠다고 하겠죠. 그러면 그때 조지 왕자와 협상해요. 은밀하게. 조지 왕자를 치켜세워주는 거예요. 포로를 석방하겠다고 하고 국왕을 죽이겠다고 말해요. 조지는 포로 석방을 주도한 공로를 인정받음과 동시에 국왕의 비운한 죽음으로 다음 대 왕이 될 거예요. 대신에 당신들의 사소한 요구 몇 개를 받아들여줄 거고, 목숨을 보장해주는 거예요. 반드시 조지의 요청서를 받아놔요. 그건 당신들의 목숨 줄이 될 테니까.”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이 팔짱을 끼며 씨익 웃었다.

“당신은 정말이지……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 같소.”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당신은 그런 소리를 하느니 차라리 닥치고 있는 게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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