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38화
“괴물?”
케이가 눈썹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엘리자베스였다.
“그래. 나는 사실 괴물이야. 하얀 색 털, 황소 같은 몸집, 눈동자는 붉게 빛나는 폭력적이고 위험한 괴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어련하겠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 밖의 악마, 몰록처럼 말이지.”
“맞아. 나는 그 몰록이 되어서 이 고립된 성 안을 모두 휩쓸어버릴 거야. 귀족과 자본가들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이 성을 피의 바다로 채울 거야. 그 바다를 건너서 너를 데리고 나갈 거야.”
엘우드를 안고 뛰었던 디트리히 폰처럼.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삼켰다.
“우리는 2층 발코니를 통해서 의회 청사 지붕 위로 갈 거야. 왕의 군대도 없고 2만의 군중도 없고 컬로든 궁은 보이지도 않는 위험한 뒷골목으로 널 데리고 나갈 거야. 우린 그렇게 같이 살 거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푸스스 웃었다. 케이는 달콤한 꿈이라도 꾸는 어린아이처럼 진심으로, 맑게 웃었다.
“그래. 그거 좋군. 정말 좋아. 그래서…….”
케이는 그러다 한순간 미소를 얼굴에서 싹 지우고 엘리자베스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의 손을 보며 왜인지 모르게 울컥한 기분을 느꼈다. 금세 눈앞이 흐려졌다.
“……그렇게 같이 나가면……. 그리고 엘우드 밀을 내가 네 앞에 잡아다 주면……. 같이 사는 거야. 나랑. 어때?”
“같이 나가면 같이 살게 되는 거지. 당연하잖아…….”
엘리자베스는 피에 젖은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바닥을 가만히 보며 별 도리 없이 그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러자 케이가 피식 웃었다.
“아니, 나랑 살자고. 다른 남자랑 산책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온갖 걸 다 해도 같은 집에서 숨 쉬라고. 가끔은 다른 남자의 체취를 묻히고 와서 나랑 뒹굴고 내 앞에서 온갖 거짓말을 늘어놓으라고.”
엘리자베스는 이어지는 케이의 말에 잠시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이 자식이.
이 개자식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엘리자베스가 혼란과 고통 속에 몸부림칠 때 케이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다 속아주지. 전부 다. 너라면 나한테 거짓말을 해도, 내게 발길질을 해도, 마구간에서 재워도, 다 용서해주지. 그 남자와 부부로 살고 싶다면 그렇게 해. 나는 그 집에서 마구간지기나 하면서 너와 그 남자의 침실을 데워줄 땔감을 나르면서 그렇게 살 테니까……. 그러니까……. 그냥 나랑 살아.”
케이의 말은 ‘살자’에서 시작해서 ‘살자’로 끝났다. 처음의 ‘살자’와 뒤의 ‘살자’가 다른 것 같다가도, 또 같은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뭔가를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입술만 달싹거릴 뿐,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기가 어려웠다.
너와 나는 대체 무얼 할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결국은 모든 질문 속에서 한 가지 질문 속에 갇혀버렸다. 그녀가 그 미궁 속을 헤매는 사이에 케이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키스하자.”
“안 한다며.”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케이가 또 맑게 웃으며 말했다.
“하고 싶어졌어.”
“왜?”
“……너랑 키스하면 아무 생각이 안 나. 지금은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들으며 신을 저주했다. 신이란 대체 뭐하는 작자일까. 이 세상 사람들의 운명을 제 맘대로 직조해놓고 그 사람들에게 자꾸만 희망이라는 무늬를 그리게 하니 말이다. 희망. 그 얼마나 부질없는 단어인가. 어차피 모든 것은 운명대로 흘러갈 뿐인데.
엘리자베스는 이제 새까맣게 탄 단백질 덩어리가 되어 십자가에 걸려 있을 로버트를 떠올렸다. 엘리자베스는 제 운명을 직감했다. 그녀는 케이의 허벅지 위로 올라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내 운명은 결국 또 너야. 케이 하커.
“좋아.”
엘리자베스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케이 하커가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대체 몇 번째 입맞춤일까. 엘리자베스는 세는 것을 잊었다. 이제는 자신의 앞에 있는 케이 하커가 이전 생의 그토록 건방졌던 노동자 놈인지, 이번 생의 성공한 무역가 놈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상관없었다.
우리의 키스는 늘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한 마취제 같은 것이다.
혀가 얽히는 동안 케이는 멀쩡한 왼손으로 엘리자베스의 손에 깍지를 껴서 꽉 쥐었고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벽으로 붙였다. 두 사람 모두 공기 중으로 퍼지는 이 열기에 중독되어 갔다.
망한 사랑은 이토록 매력적이다.
엘리자베스는 농도 짙은 키스를 마치고 입술을 떼었다. 하지만 완전히 얼굴을 물린 것이 아니었으므로 두 사람의 코는 서로 닿아 있었다. 케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엘리자베스의 뺨과 귀, 목덜미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다가 쇄골 근처에서 이마를 대고 잠시 쉬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머리카락을 역결로 쓸어올렸다.
그 간질간질하고 터질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철문을 뚫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것을 그 목소리를 듣고 알았다.
“결투를 시작한다!”
그 목소리에 케이가 고개를 들었다.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시선이 얽혔다. 케이가 입을 열었다.
“윌리엄 조쉬의 목소리야.”
“그런 것 같아.”
엘리자베스는 한때 윌리엄 조쉬를 사교계에서 오다가다 만나게 되는 춤 상대로서 나쁘지 않게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어이가 없었다. 저 위선자를 난봉꾼치곤 무례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평했던 것도 기억났다. 윌리엄 경은 자신이 가는 사교계 모임에 있는 모든 여자들의 춤 신청 카드 가장 상단에 이름을 적는 남자였다. 지금 그 여자들의 오라비, 혹은 아버지를 피의 심판장으로 이끌며 윌리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들이 소작농과 노동자들을 착취했던 것이 잘못이라는 것과 자신이 그들을 심판할 권리가 있는지는 별 개의 문제라는 걸 윌리엄 조쉬가 깨달을 날이 올까?
엘리자베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케이가 생뚱맞은 소리를 했다.
“윌리엄 조쉬는 널 좋아해. 널…… 사랑하는지도 모르지.”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자가 사랑하는 건 혁명뿐이야. 저자는 나를 이용하고 싶어 해.”
“널 살리고 싶어 해.”
“그건……. 그건…….”
엘리자베스는 이전 생에서 자신을 도망치게 해주었던 윌리엄 조쉬를 떠올렸다.
윌리엄 조쉬는 그저 운명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잔인한 혁명가와 정 많은 한량 사이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는 위선자의 운명을 말이다.
“덤프셔, 앞으로 나와라.”
밖에서는 윌리엄 조쉬의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비명을 내지르는 신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자베스가 어깨를 움츠렸을 때였다. 케이가 그녀의 어깨를 그러쥐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너는 윌리엄 조쉬에게 가서 거래를 해.”
“무슨 거래?”
“내 신탁계좌를 알려주고 네가 알아온 거라고 해. 나를 구해주고 나를 유혹한 대가로 내가 너한테 알려준 거라고.”
엘리자베스의 눈동자에서 물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케이가 하는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다가 서서히 그의 말을 이해하면서 심장에서 머리로 흘러가야 할 피가 거꾸로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저들도 알고 있어. 국왕이 절대로 서명해주지 않을 거라는 것. 그러면 왕족들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야. 왕족들은 오히려 국왕이 여기서 죽길 기다리며 장군들을 꽉 쥐고 있으려 들겠지. 국왕이 죽으면 계승 순위에 따라…….”
케이는 때때로 고통을 참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런 말들은 들리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품 안에서 다시 항생제 성분이 든 케빈이 만든 약을 꺼내 케이에게 내밀었다.
“닥치고 먹기나 해.”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서 약을 받아들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나까지 빼내주기엔 명분이 부족해. 하지만 너는 다르지. 윌리엄 조쉬도 제 대장을 설득할 명분이 있어. 너는 바깥에 있는 군중들이 가장 선망하는 사람이고 대장은 지금 군중을 움직이고 싶어 해. 최악의 경우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레본을 뒤집어놓고 싶은 거야. 그런데 자신들의 자살에 너를 넣는다면…….”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케이의 허벅지 위에서 내려와서 물컵을 집었다. 물컵을 케이의 손이 닿는 곳에 내려놓고 케이의 손에 약을 들려주면서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아까 말했잖아. 내 말 들으라고. 내가 널 반드시 살릴 거라고…….”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절대로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분노 때문이었다.
“이 개자식아. 넌 내 말은 하나도 안 듣지. 하나도 안 믿고.”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쥐어준 알약을 바닥에 내던지며 소리쳤다.
“너도 내 말 안 듣잖아! 여기서 같이 개죽음을 당하자는 거야?”
“같이 살자는 거야!”
엘리자베스가 소리를 지르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여기 남아도 죽지 않아. 어차피 내 차례가 돌아오기 전에 왕족들이 군대를 움직일 거야. 누구든 계승 순위가 적당히 높은 자가 군부를 장악하고 국왕이 죽든 말든 이곳에 진입할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엘리자베스.”
“거짓말.”
엘리자베스는 핏발 선 눈으로 케이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케이가 그런 그녀를 어르던 다정한 말투를 싹 지우고 말했다.
“그래, 거짓말이야. 그래도 그냥 믿어. 나도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거짓말에 속아줬잖아.”
네가 언제.
너는 단 한 번도 나를 믿지 않았어.
믿는 시늉도 하지 않았지.
엘리자베스는 바닥에 떨어진 알약을 주우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젠장……. 젠장할…… 내가 너를……. 너를 살려두는 게 아니었는데…….”
“내 말 들어. 간단한 일이야. 이제 곧 윌리엄 조쉬가 우리 상태를 살피러 올 거고, 그때 아까처럼 나랑 딱 붙어 있다가 나한테서 비밀이라도 캐낸 것처럼 말해. 내가 서명도 해줄 거라고 했다고 해. 그만한 혁명이 어딨어! 나처럼 가진 놈의 것을 뺏어서 혁명가들의 배를 불리는데!”
엘리자베스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그 신탁 계좌에서 돈을 인출하기 위해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알았다. 케이 하커의 서명이 든 인출서류를 가지고 간 다음에 케이 하커를 저 지하통로 어디론가 데려가 총으로 쏴서 죽여버릴 것이다. 케이 하커가 혹시라도 이 의회를 운 좋게 탈출해 말을 바꾸는 일이 없도록.
케이 하커는 그 상황을 모두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당연히. 그러고는 태연자약하게 자신에게 스스로의 죽음을 재촉하는 역할을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망할 자식. 네가 헛소리를 하기 전에 너를 죽였어야 했는데.
그때, 누군가의 발소리가 철문 밖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