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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37화 (137/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37화

엘리자베스가 눈을 떴을 때는 누군가의 너른 가슴팍이 그녀의 눈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흠칫 놀라서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커다란 손이 그녀를 꽉 잡았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들어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그의 이름을 속으로 불러보았다. 케이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허리를 감싸쥔 케이의 왼손은 움직이지 않았고 케이의 오른손은 늘어져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단단히 묶은 붕대 근처를 매만졌다. 뜨거웠다.

미간을 찌푸린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케이 하커.”

대답이 없자 엘리자베스는 그의 이마를 짚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피부는 불에 덴 듯 뜨거웠다. 다급하게 몸을 일으킨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눈꺼풀을 뒤집어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때, 케이의 손이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죽진 않았어.”

케이가 눈을 떴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케이는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지그시 바라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꿈을 꿨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질문에 자신이 꾸었던 꿈을 상기했다.

경비병들을 다 죽여버리고 도망가던 디트리히와 엘우드.

디트리히는 깊은 숲 속으로 점점 더 들어갔다. 추격자들은 이제 디트리히와 엘우드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가 아는 단순한 소총이나 산탄총과는 종류가 달랐다. 그것은 엄청난 속도로 연사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작은 폭탄 같은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디트리히와 엘우드는 나무 파편이 튀는 숲 속을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가—

펑!

디트리히가 총에 맞았다. 그의 몸이 뒤로 단번에 쓰러졌다. 몸의 하얀 털들은 사라지고 연약한 인간의 팔이 보였다. 디트리히를 품에 안은 엘우드가 말했다.

’걱정 하지 마. 저기 보이지? 저 연구동까지만 가면 내가 개발한 시간여행기가 있어.’

’전쟁은 좆같아. 나는 괴물이 되느니 사람으로 죽을 거야. 날 죽여, 엘.’

떨리는 디트리히의 목소리를 들은 엘우드가 울부짖었다. 그러자 엘우드의 목에서 철로 만든 펜던트가 쏟아졌다.

엘우드 밀.

여기서부턴 3개월 전 꿈속에서 본 내용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진한 화약 냄새가 났다. 펑! 펑! 펑!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디트리히가 외쳤다.

’피해, 엘우드!’

케이는 왼손을 제 눈가에 올려놓고 표정을 가린 채 말했다.

“엘우드. 그자가 나오는 꿈이었나 보지. 그랬으면 길몽일 텐데. 왜 악몽처럼 몸을 떨었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꿈을 꾸며 엘우드라는 이름을 불렀던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그건 꿈이라기보다는……. 기억 같은 거였어.”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꿈속에서 보았던 엘우드 밀의 울부짖는 표정을 떠올렸다.

디트리히 폰을 배신했지만, 결국 다시 디트리히 폰에게 돌아왔던 엘우드 밀.

엘리자베스는 엘우드가 솔치노 뒷골목에서 마주친 몰록을 쏘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눈빛이 흐려졌다. 케이는 그것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엘리자베스의 만류에도 고집불통이었다. 상체를 겨우겨우 일으킨 케이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

“어떤 기억이었지?”

케이는 억지로 일어나서는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쌕쌕 몰아쉬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뭐가?”

“엘우드 밀과의 기억 말이야. 꿈에서 본 것이든 아니든 대부분 좋은 기억이었겠지. 네가 아직도 찾고 있는 걸 보면.”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묘한 표정으로 케이를 바라보았다.

케이 하커는 왜 저렇게 엘우드 밀이라는 이름에 집착할까? 하긴. 엘리자베스가 제 가명으로 썼던 사람이 실존인물이라는 건 상당히 수상한 일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가 엘우드 밀을 왜 궁금해하는지, 그 궁금증의 기저에 있을 의구심을 파고들 여력이 없었다.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기에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좋다기보단 무시무시했지. 그분은 내 선생님이었으니까. 대단한 의학, 약학, 화학적 지식을 가지고 계셨지만 성격은 더러웠어.”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고는 피식 웃었다. 성격이 더럽다니. 그 분야로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사인 케이 하커 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이런 가벼운 마음과는 다르게 케이 하커는 엘리자베스의 미소를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왜 웃지?”

“그냥. 그냥…….”

엘리자베스는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지만 케이 하커의 시선이 집요했으므로 이렇게 덧붙였다.

“내 주변의 남자들은 죄다 성격이 더럽구나 싶어서.”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뒤통수를 벽에 기대며 쓰게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미소에 언뜻언뜻 베어 나오는 체념이 맘에 들지 않아서 엘우드 얘기를 계속 이어갔다.

“성격은 더럽긴 해도 정이 많은 분이었어.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돈을 받지 않고 치료해주셨고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는 데 주저함이 없으셨지.”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엘우드 밀을 어느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 그분이 늘 옳았던 건 아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분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더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어.”

엘리자베스는 디트리히 폰에게 돌아왔던, 천장에 총을 쏘며 자신이 무자비하게 실험체로 썼던 포로들에게 도망치라고 말하던, 엘우드 밀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 세상에 실수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물론 엘우드 밀의 실수는 실수라기엔 너무 위험하고 잔혹했으나 결국 그는 그냥 그런 사람으로 남지 않았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그녀 자신에게 물었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속에 빠져들었을 때 엘리자베스는 돌아오는 길을 찾아낼 수 있을까? 출입구가 아무리 멀고 험해 보여도 그곳으로 향할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며 아까부터 내내 고통스러워 보이는 케이의 얼굴 근처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케이의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나도 그분처럼 살 수 있으면 좋겠어.”

“그 성질 더러운 남자를 존경하는 것 같군.”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존경은 너무 과해. 그냥 그분을 이해하게 된 거야. 그분의 상황이나 기분 같은 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분의 선택들이 얼마나 어려웠을지도 알게 된 거야. 그거랑 별개로……. 그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건 유감이고.”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눈이 잠시 수렁에 빠진 듯 깊고 어두워졌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가만히 보다가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그 새끼를 네 앞에 잡아올게.”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수로?”

“그냥, 이 리오든을 샅샅이 뒤져서 찾아오는 거지. 멱살을 끌어다 네 앞에 무릎을 꿇려 앉혀주면 되잖아.”

“넌 가끔 말도 안 되는 걸 말이 되는 것처럼 말해.”

“말이 돼.”

“말도 안 돼.”

엘리자베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엘우드 밀은 어쩌면 이제 죽은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를 찾는다고 해도 치료제가 남아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내가 말이 되게 하면 어떻게 할래?”

케이는 흐려진 얼굴로 힘없이 제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땀을 닦아주던 손으로 케이의 경동맥에 손가락을 가져다대고 맥박을 쟀다.

“말하지 마.”

“어떻게 할 거냐고.”

“말하지 말라고. 너는 내 말을 죽어라고 안 듣는 이유가 따로 있어?”

“……같이 살자.”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케이의 목에서 손가락을 떼고 한숨을 내쉬었다. 맥박을 재는 건 이놈의 입을 다물게 한 다음으로 미뤄야 할 성싶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당연히 같이 살지. 우린 절대로 죽지 않아.”

엘리자베스는 단호하게 대답하며 케이의 붕대 끝을 살짝 풀어냈다. 몇 시간이나 지난 걸까? 생각보다 몸이 가벼운 건 숙면의 결과일까, 아니면 요새 비정상적으로 늘어난 체력 덕일까?

붕대를 풀기가 무섭게 고름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얼굴을 찡그린 엘리자베스가 이를 악물며 조심스럽게 붕대를 조금 더 풀어냈다. 케이가 얄미울 정도로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함께 살아서 나갈 일은 없어.”

“방금은 같이 살자며. 너는 말을 너무 자주 바꿔. 앞으로는 말 바꾸지도 말고 내 말에 복종해. 안 그랬다간—”

엘리자베스는 붕대 끄트머리로 드러난 파랗게 변한 살점을 보았다. 잘라낸 부위 끝이 다시 썩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팔을 잘라내야 해. 네가 외팔이가 되면 앰버가 무척이나 슬퍼하지 않겠어?”

엘리자베스의 장난스러운 말에 케이가 피식 웃었다. 케이는 자신의 팔에 있는 붕대를 풀어내는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옆얼굴로 쏟아지는 케이의 시선을 견디다가 못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멀쩡한 왼손을 살짝 뻗으며 말했다.

“이리와.”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대답했다.

“나보고 날 버린 전 약혼자랑 두 번이나 키스하라고?”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키스 안 해. 이리와.”

“싫어.”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웠고,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엘리자베스가 잘못된 마음을 먹으면 순식간에 두 사람이 또 다시 키스하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가면무도회에서 가면의 힘을 빌려 서로의 몸에 엉켜들었던 그날처럼.

“왜 나한테 키스했어?”

엘리자베스가 원망스럽게 물었다.

“그날 말이야. 그날 왜 나한테 키스했어. 앰버랑 같이 레본에 돌아왔으면서. 나랑 같이 멜니아에 가지도 않았으면서.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다고 했으면서.”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견디기 힘들다는 듯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냥. 그냥.”

“……네가 그러니까 개놈이야.”

엘리자베스는 대답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케이가 조금 전 했던 말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우리가 함께 살아서 나갈 일은 없어.’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노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반드시 살아서 나갈 거야. 반드시 우리 둘 다. 내가 널 데리고 나갈 거니까. 너는 팔이 잘리든 붙어 있든 여기서 죽을 일은 없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피식 웃었다.

“어떻게? 저 무장 강도 놈들을 뚫고 우리 둘만 어떻게.”

“나는 힘이 무지하게 세.”

“그렇겠지.”

“정말이야. 나는 괴물이거든.”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치맛자락을 손으로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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