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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36화 (136/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36화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무슨 대답을 할지 고민하면서 가장 큰 괴사 부위 하나를 썰어냈다. 케이의 여유로운 표정과는 달리 그의 온몸의 근육이 아우성을 치는 게 느껴졌다. 엘리자베스가 다급하게 윌리엄을 보며 말했다.

“다리 좀 잡아줘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이 케이의 다리를 잡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몸통 위를 누르고 앉았다.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를 내려다보며 그의 팔을 잡고 그의 상처에 알코올을 뿌리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목울대를 움찔거리며 신음을 뱉어내는 것을 보며 그의 팔을 잡았다. 엘리자베스는 거친 숨을 뱉으며 케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괴로워하지 않았어. 과호흡이 와서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신 탓에 금방 몸이 늘어졌어. 비명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어. 질식해서 죽기 직전에는 하늘을 봤어.”

엘리자베스는 허벅지 힘으로 케이의 몸통의 움직임을 막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케이의 넓은 가슴은 엘리자베스의 허벅지로 조일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잔뜩 동요한 케이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데 실패한 엘리자베스는 다급하게 말했다.

“편해 보였어. 눈동자가…… 천국을 보는 것 같았어.”

엘리자베스는 지옥 불에서 66일 동안 구워지는 12악마 같았던 로버트의 표정을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거짓말쟁이.”

케이가 자신의 팔을 묶는 엘리자베스의 허벅지를 단단히 쥐며 말했다. 그녀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지지하는 것 같았다.

“그 남자는 천국에 갔을 리가 없어. 그는…… 지옥으로 갔을 거야. 우린 다시 만나게 되겠지.”

케이는 몸에 힘을 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 거친 숨을 계속해서 뱉어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널 죽여버리기 전까진 아직 그럴 일 없어.”

엘리자베스는 붕대로 상처를 잘 지혈하고 한숨을 길게 뱉어내며 케이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참을 수 있어?”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칼을 들어올렸다.

* * *

더 이상의 괴사를 막기 위한 수술이 끝난 후 엘리자베스의 온몸은 비명을 질러댔다. 특히나 힘을 주었던 어깨는 누가 거대한 쇠로 뭉개는 것처럼 아팠고 허벅지 안쪽은 저릿했다.

엘리자베스는 벽에 기대어서 숨을 쌕쌕 몰아쉬며 잠든 케이를 보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윌리엄이 문가에 서서 말했다.

“다행히도 오늘은 당신의 차례가 오지 않은 것 같소. 케이 하커의 차례도. 대장 동지가 당신들의 이름은 고발 목록에서 제외하기로 했으니까 말이오. 물론 이 행운이 모레도 이어질 거라는 보장은 없소만.”

윌리엄은 왜인지 화난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탈진한 얼굴로 윌리엄을 보며 말했다.

“고맙다고 해야 되나요?”

“아니. 인간이 개새끼한테 고맙다고 할 이유가 뭐가 있소.”

윌리엄은 그렇게 말하곤 문을 쾅 소리가 나게 세게 닫고 방을 나갔다. 엘리자베스는 쪼그려 앉아서 쏟아지는 잔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개새끼들…….”

엘리자베스는 그 말과 동시에 물처럼 늘어지는 온몸의 근육을 지탱할 힘을 잃고 옆으로 쏟아졌다.

그녀는 차가운 바닥에 아무렇게나 늘어져서 잠든 케이의 얼굴을 보았다.

밖에서는 기나긴 고발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 덤프셔는 그레고리 남작을 고발합니다. 그레고리 남작은 자신의 영지에서 소작농들에게 다른 영토의 3배가 넘는 소작료를 요구하고 그 소작료를 내지 못하자 고리로…….”

배신, 또 배신, 그리고 또 배신이었다. 귀족이 자본가를 고발하면 자본가는 귀족을 고발했고 그러다 왕가의 핏줄을 이은 자들을 공격할 때는 다시 한 패가 되었지만 그것도 잠시, 금방 다시 서로를 고발했다. 서로를 착취하던 자들이 서로를 자신보다 빨리 죽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대체 누가 개새끼일까. 귀족을 고발한 자본가들? 자본가들을 고발한 귀족들? 인민재판을 벌인 혁명가들? 혁명가들에게 200명의 목숨을 걸고도 직접 나가서 왕명을 전달하지 않은 국왕? 벌벌 떨고만 있을 뿐인 총리?

엘리자베스에게도 고발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굴 고발해야 할까.

엘리자베스는 실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제 무릎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젠장.

나는 나를 고발하겠다.

이 빌어먹을 레본에서 두 번이나 생을 지속하는 나를. 그리하여 죽을 운명도 아니었던 너를 이렇게 위기로 내몬 나를.

엘리자베스는 아까 케이가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어?

엘리자베스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제나……. 언제나 실패할 걸 알았으니까.”

너를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해도 어차피 나는 실패할 테니까. 내가 이 수많은 지옥을 보고도 나에게 다시 시간여행기가 주어지면 나는 아마도 너를 보러 가겠지. 혹시 모르잖아.

이 수많은 지옥 중에 한 번쯤은 네가 나를 사랑하는 지옥이 있을지도.

* * *

꿈이었다.

꿈을 시작하면서부터 꿈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하지만 꿈이 꿈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 것은 그녀에게 별로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꿈이라는 자각이 강해질수록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의심도 강해졌다.

이것도 꿈은 아닐까. 이 개 같은 세상이 현실일 리 없지 않을까. 이 꿈이 시작된 후 엘리자베스는 늘 그런 의심 속에 살아야 했다.

디트리히 폰은 새하얀 방에 갇혀 있었다. 그는 하얀 옷을 입고 서 있었고, 그의 뒤로는 하얀 옷을 입고 서 있는 자들이 많았다.

마치 저번에 꾸었던 꿈속 보육원의 아이들이 커버린 것처럼 비슷한 일사불란한 광경이었다.

“1046번.”

다른 점이라면 이번 꿈속의 디트리히 폰은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린다는 정도였다. 디트리히 폰은 1046번이 이곳에서 자신의 이름임을 인지하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자 회색 옷을 입은 남자가 디트리히의 소매를 걷었다. 그러자 디트리히의 앙상한 팔이 드러났다. 가느다란 팔에는 수많은 주사자국이 나 있었다.

그때 철문이 덜컥 열렸다.

디트리히는 고개를 들 힘도 없었으므로 바닥만 보고 있었다. 소매를 걷는 남자가 천천히 디트리히의 팔에 주사를 시작했다. 기괴한 빛깔의 초록색 액체. 디트리히는 그것을 보면서도 무기력하게 가만히 있었다. 그 사이 주사약을 집어넣는 남자 옆으로 한 남자가 섰다. 디트리히는 겨우겨우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회색 옷을 입은 무표정한 남자는 역시나 바로 엘우드 밀이었다.

엘우드 밀이 옆에 서자 또 다른 회색 옷을 입은 남자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세상 일이 참 재미있지 않나? 디트리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군 소속 최고 연구원인 자네의 총애를 받는 직원이었어. 그런데 이제는 여기서 포로들과 같이 실험체를 하고 있다니. 그러게 왜 그랬어? 감히 조국을 배신하다니.”

엘우드 밀은 남자의 조롱에 가까운 말투에도 무감한 표정으로 디트리히 폰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디트리히의 건조한 입술이 움직였다. 디트리히가 중얼거렸다.

“형…….”

“포로들을 풀어주다니. 당장 총살을 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야. 그렇지 않나? 응? 말해보게. 엘우드 밀.”

남자는 계속해서 엘우드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정말 재밌어서 웃는 미소가 아니었다. 그건 엘우드를 궁지에 내몰아서 말실수를 하길 기다리는 함정 같은 미소였다.

엘우드가 입을 열었다.

“조국은 절대적인 것이야.”

엘우드의 말에 남자는 쿡쿡 웃으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역시 대단한 애국심이군. 군 최고 연구원다워.”

남자는 여전히 조롱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주사기를 옆에 있는 쇠로 만든 통에 집어넣고 펜과 종이를 집어들고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자네가 계획한 이 연구가 성공하면 나를 잊지 말길 바라. 인간병기라니. 이 실험만 성공하면 자네는 당장에…….”

“하지만.”

그때, 엘우드가 말을 이었다. 엘우드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엘우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의 조국은 이제부터 갸흐통이 아닐세.”

갸흐통.

엘리자베스는, 아니, 디트리히 폰인가, 아니면 몰록인가? 어느 쪽이든, 지금 이 꿈을 꾸고 있는 이성을 가진 존재는 어떻게든 그 단어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갸흐통.

이제까지 추측으로만 여겼던 가설이 참으로 밝혀진 것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엉망이었다.

남자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엘우드가 품 안에서 검은 총을 꺼냈다. 엘우드는 총신 한 곳에 손을 대더니 그것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장전이 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펑!

엘우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남자의 어깨를 쏘았다. 남자는 어깨를 맞고 반동으로 뒤로 쓰러졌다. 문 밖에 모여든 남자 둘에게도 엘우드가 총을 쏘았다.

하얀 방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하얀 옷을 입은 피실험자들은 그 광경 속에서도 비명을 지르거나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지 않았다. 디트리히 폰도 그저 벽 쪽으로 붙어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순식간에 3명을 해치운 엘우드가 벽에 붙은 디트리히 폰에게 다가와 그의 뺨을 그러쥐었다.

“디트리히!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엘리자베스는…… 아니, 디트리히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피 냄새가 너무…… 너무 달콤했다. 몸속에서 꿈틀대는 식욕을 억제하기가 힘들어진 디트리히는 구역질을 해댔다.

엘우드는 그런 디트리히에게 말로 설득을 꾀하는 것을 포기한 듯, 구역질을 하는 그를 두고 철문을 열러 갔다. 그러곤 내부에 모여 있는 피실험자들에게 소리쳤다.

“나가! 다 나가!”

피실험자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엘우드가 천장을 향해 격발했다.

“씨발! 다 나가란 말이야!”

그제야 비척비척 피실험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우드는 울고 있었다. 그들이 순한 양떼처럼 우르르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자 엘우드는 여전히 벽에 붙어서 꿈틀거리는 디트리히에게 돌아와 그를 개처럼 멱살을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디트리히가 엘우드에게 질질 끌려가며 실낱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 형…… 방금 나…….”

나, 동무가 아니라 디트리히라고 불렀지. 그랬지.

엘리자베스는 디트리히의 생각이 전달되는 것을 느꼈다. 그때부터 디트리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연구실 내부에는 빨간 불빛이 번쩍였다. 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침입자 발생. 침입자 발생. 코드 30. 코드 30.]

디트리히는 이제 엘우드를 앞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엘우드를 끌다 못해 안아든 디트리히는 엄청난 힘으로 뛰고 있었다.

이제 디트리히는 직감하기 시작했다.

실험은 성공했다.

디트리히는 제 손을 보았다. 제 손에 난 수북한 하얀 털을, 그 털이 뒤덮은 검고 긴 손톱을, 그리고 도무지 인간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폭주하는 자신의 몸을.

디트리히는 제 앞을 막아서는 경비병들을 순식간에 물어뜯었다. 디트리히는 그들의 피를 마시며 즐거웠다. 디트리히는 깨달았다.

이 실험은 인간병기를 만들어 조국을 승리로 이끌 실험이 아니라, 이 세계를 파멸시킬 실험이었음을.

건물을 나온 디트리히의 눈에, 아니 엘리자베스의 눈에도 익숙한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디트리히는 엘우드의 몸을 끌어안고 그리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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