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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35화 (135/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35화

케빈이 엘리자베스를 위해 제조한 약 재료 중에는 항생제 성분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기억하고 케이의 입안에 약을 흘려 넣은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급하게 케이의 입 안에 약을 흘려 넣은 다음에는 케이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케이를 둘러싸고 있던 폭도들이 엘리자베스를 비웃었다.

“뭐 하는 짓이지? 이 망할 공녀 년이 여기서 무슨 문란한 짓을 하려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모욕에는 대꾸할 의지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케이의 재킷을 벗겼다. 재킷은 축축한 피에 엉겨 제대로 벗겨지지도 않았다. 그 사이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윌리엄 조쉬였다. 그는 엘리자베스 옆에 쪼그려 앉더니 그녀를 지그시 보았다.

“일단 숙녀는 안으로 들어가시오. 오늘의 화형은 끝났으니까.”

“물 같은 것 좀 줘요.”

윌리엄 조쉬가 이를 악물고 소리를 질렀다.

“여긴 망할 커피하우스가 아니야!”

윌리엄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그녀가 소매에 달린 단추를 뜯어내고 소매를 살짝 들어올리자 까맣게 썩어들어 가는 살점이 보였다.

조직 괴사.

케이의 상처 중앙은 이미 까맣게 썩어든 살점이 채우고 있었고, 그 위를 노란 고름이 덮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이 정도 상태가 되려면 적어도 몇 시간동안 케이가 자신의 상처와 끔찍한 고통을 방치해야 했음을 눈치챘다.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숨만 몰아쉬고 있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이 미친 새끼. 이런 몸을 끌고 어젯밤에 신문사를 돌아다니고 로킨트 저택에 오고 갔다니.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케이를 죽이려면 일단 살려놓아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을 보며 소리 죽여 말했다.

“칼 좀 줘요. 술도요. 성냥이나 촛불도 있으면 좋겠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이 엘리자베스와 케이를 둘러싼 남자들을 보며 말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왕족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차피 케이 하커는 제 아버지를 따라 결투장에 오를 거요. 포기해요.”

윌리엄이 이를 바드득 가는 소리가 엘리자베스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자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지친 표정의 솔튼 빌리스 옆에 서 있는 짧은 머리의 사제복을 입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엘리자베스가 벌떡 일어났다. 윌리엄 조쉬는 따라 일어나서 다급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

하지만 사제복을 입은 남자를 향해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이미 튀어나간 후였다.

“당신들은 명예를 이유로 로버트 하커를 죽였어요. 잔인한 방식으로. 당신들이 정말 명예를 운운하려거든 사형수라고 해도 재판을 치르지도 않은 죄수가 이렇게 죽게 두진 않을 거예요.”

엘리자베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광장 안을 메웠다. 토끼처럼 몸을 수그리고 있던 신사들이 모두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에 남자가 반응했다. 그는 한줌도 되지 않을 제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당신이 엘리자베스로군. 당신은 우리의 동지인가?”

“나는 의사예요.”

“의사도 소속이 있어. 군의관들도 계급이 있듯이 말이야.”

“전쟁터에서 군의관들은 적군도 살릴 의무가 있어요. 군의관은 군인이기 전에, 인간이기 전에, 의사입니다.”

“앞에 건 이해가 되는데, 뒤에 건 이해가 안 되는군. 군인이기 전에, 다음에 ‘인간이기 전에’라는 거 말이야. 무슨 뜻이지?”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말장난에 당장이라도 남자의 혀를 뽑아버리고 싶은 기분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지금 당장 당신들을 죽여버리고 싶어도 당신들이 내 앞에 환자로 누워 있다면 일단 살려는 놓을 거라는 뜻이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괴물로 변하지 않았을 때도 신체 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을까? 케이에게 먹이기 위해 씹었던 약 때문인지 엘리자베스의 몸 안에서 날뛰던 피가 차분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엘리자베스의 근력과 동체 시력, 뛰어난 민첩성이 발휘될까?

엘리자베스는 장담할 수 없었다. 괴물이 아닌 상태로 수많은 총알이 몸에 박히고도 움직여 케이를 데리고 뛰어나갈 수 있을지는 더더욱. 그 사이 케이의 감염이 더 심해져 쇼크사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의 상념이 체념으로 이어지려고 할 때, 남자가 말했다.

“좋아. 의사는 쓸모가 있군. 하지만—”

남자는 총리의 책상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러자 솔튼 빌리스와 국왕의 왕좌 뒤편에 잡혀 있던 총리가 남자가 자신에게로 오는 줄 알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 쪽이 아니라 누워 있는 귀족의 시체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귀족의 흉부에 여전히 꽂혀 있는 칼을 유려한 자세로 뽑아냈다.

환부를 막고 있던 칼이 사라지며 피가 분출되었다. 꿀럭거리는 피분수를 보며 엘리자베스는 코와 입을 막았다. 남자는 그 칼로 엘리자베스를 가리켰다.

“당신이 그 남자를 건드리는 순간, 숙녀가 아니라 의사인 줄로 알고 당신도 결투의 차례에 포함시키겠네. 어떻게 하겠나?”

남자의 말에 신사들의 눈이 일제히 엘리자베스에게로 다시 쏟아졌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얼굴에서 기쁨을 읽었다. 이 짧은 순간에 엘리자베스가 결투 대기자에 포함되면 자신들의 차례가 다만 몇 시간이라도 지체되리라는 계산이 선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코와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었다.

엘리자베스가 선택할 길은 단 하나였다. 뒤에서 윌리엄이 다급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를 살다 죽더라도 나는 나의 명예를 지키겠어요. 당신의 이름이 뭐죠?”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칼을 든 남자가 비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대장 동지라고 부르면 되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 동지는 아니니 동지는 생략하죠. 내가 나의 명예를 지킬 테니 당신도 당신의 명예를 지켜요.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칼, 깨끗한 천, 도수가 아주 높은 술, 혹은 알코올, 그리고 불순물이 거의 섞이지 않은 깨끗한 물과 성냥 혹은 촛불이에요. 깨끗한 방도 있으면 좋겠군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대장이 칼을 뒤로 내던지며 말했다.

“원하는 게 많기도 하군.”

* * *

엘리자베스는 의외로 꽤 깨끗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아까 자신이 들어온 지하 통로로 다시 돌아가 한 거대한 방에 들어왔는데,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쥐나 벌레가 기어 다니지도 않았고 거미줄이 쳐 있지도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이들이 지체 없이 이 방을 내어준 것으로 미루어, 이 방이 이들이 만약의 상황에 대비한 대피 벙커 같은 곳이거나 포로수용소로 삼을 작정이었던 장소일 거라고 여겼다.

“오늘은 더 이상의 결투가 없다. 하지만 내일 있을 결투에 나설 8명을 지금부터 뽑겠다. 뽑는 방식은 고발이다. 지금부터 여기 모인 유산계급 내에서 고발자를 자원 받는다.”

엘리자베스는 문 밖으로 들려오는 싸늘한 대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어지는 아우성도 들렸다.

“내가 먼저 고발하겠소!”

“나는 덤프셔를 고발하오!”

“왜 나요?! 나는 평민이고 귀족들의 숫자가 더 많으니 귀족들을 먼저 고발해야지!”

엘리자베스는 신사들의 처참한 모습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윌리엄 조쉬가 직접 가져다준 칼을 깨끗이 소독하기 시작했다. 그러며 틈틈이 케이의 얼굴을 보았다.

케이는 이제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차라리 그가 눈을 감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조직을 잘라낼 때는 끔찍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때, 케이가 입술을 달싹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얼굴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냥 둬.”

다 갈라진 목소리로 케이가 한다는 말은 겨우 그것이었다. 아까 엘리자베스가 대장과 한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당장이라도 케이의 뺨을 주먹으로 강타하고 싶은 심정을 꾹 누르며 말했다.

“아까 얘기, 들었어?”

“그래. 그냥 둬.”

엘리자베스는 이 개 자식의 개 같은 소리를 듣기 싫으면서도 케이의 신경을 돌릴 방법이 딱히 없어 계속 말을 붙였다.

“이미 끝난 얘기야. 이제 나는 이 망할 혁명가 놈들이 공인한 의사니까 내 말을 들어야 해, 이 환자 자식아.”

망할 혁명가 놈들이라는 말에 총을 들고 입구에 서 있던 남자의 눈썹이 꿈틀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반응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칼을 든 채 말을 이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케이가 대답했다.

“목요일.”

“네 이름은 뭐지?”

“그런 걸 까먹을 리가 없잖아.”

엘리자베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칼 아래에 생살이 와닿는 것이 느껴졌다. 괴사된 조직만 얇게 날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 신경이 죽지 않은 부분까지 제거해야 계속 피부가 썩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차라리 내가 물어볼까?”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떨리는 손을 보더니 그녀의 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재갈을 물리는 게 좋겠어. 네 헛소리는 듣기 싫고, 무엇보다 네가 몸에 힘을 주다가 혈관이 터지면 큰일이니까.”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피식 웃었다. 이 와중에도 웃음이 나오다니.

엘리자베스는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을 손목 위쪽 피부로 닦아냈다. 케이가 말했다.

“내가 못 참겠으면 직접 재갈을 물지. 줘.”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머뭇거리다가 재갈이 될 만한 천을 내밀었다. 개소리라도 지껄이는 편이 낫긴 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혈관이 터지는 것보다 의식 소실이 가장 문제였으니까. 케이는 왼손에 재갈을 들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생일은?”

엘리자베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입에 두건을 묶었다.

“프란시스의 생일은.”

엘리자베스는 역시나 대답하며 칼을 꽂아 넣기 시작했다. 케이의 어깨에 힘줄이 돋아나는 것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힘을 주었다. 검은 피가 고름과 섞여 흘러나왔다.

케이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대신에 중간 중간 침을 삼키며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을 뿐이었다.

“내가 얼마나 밉지?”

“뭐?”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얼굴 같은 건 보지 않고 말했다.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로 괴사된 피부를 잘라내었다. 선홍빛 피가 흘러나왔다. 신경이 살아 있는 부위였다. 엘리자베스는 그 끔찍한 감각을 손으로 고스란히 느끼며 케이에게 말했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어. 다시 말해봐.”

“왜…… 왜……. 나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생살을 잘라내며 살짝 눈을 위로 치켜뜨고 케이의 표정을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장난스레 웃는 것을 보며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어려운…… 질문인가 보군……. 그럼 다른 걸 묻지……. 로버트 하커는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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