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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34화 (134/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34화

“당신이 저 위에 올라가서 우리가 시키는 대로 연설을 한다면.”

윌리엄 조쉬는 케이가 쓰러진 것을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조쉬의 뺨을 내려쳤다. 순식간에 폭도들이 엘리자베스를 제압하려고 들었다. 하지만 조쉬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조쉬는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살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하시오.”

조쉬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실성한 듯이 웃었다. 엘리자베스의 옆으로는 로버트가 몸부림을 치면서도 힘없이 끌려나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끌려가는 로버트와 그 뒤로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팔에 난 상처를 떠올렸다. 아까부터 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케이에게선 내내 지혈이 되지 않은 상처에서나 날 법한 싱싱한 피 냄새가 났다. 그런데 폭도들에게 걷어 차였으니 상처가 벌어지면서 세균 감염을 확산, 패혈증으로 이어졌을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다급하게 윌리엄의 손을 잡았다.

“케이는 참정권 운동가예요. 나는 에밀리의 석방과 레본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이 자리에 온 거예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이 이를 악물었다.

“참정권 운동가와 무정부주의자는 다르오. 우리는 레본을 민주화시키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레본을 자유롭게 하려고 싸우는 거요. 그리고—”

윌리엄은 주변에 있는 폭도들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을 살리려면 당신의 쓸모를 우리에게 입증해야 되지 않겠나.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사다리 위로 끌려 올라가는 로버트를 보았다. 뒤따라 오르는 횃불을 든 사내들도.

엘리자베스는 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의석에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의원들을 보았다. 잘 차려입은 신사들. 사회의 고위층 자제들, 레본의 살림살이를 책임진다던 신흥 사업가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레본의 근간과도 같다던 이들이 로버트의 죽음 앞에서는 담담하기만 했다. 아니, 담담한 것만도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표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어쨌든, 나는 아니니 다행이다.

신사들은 안도를 얼굴 만면에 두르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결투가 시작되면 어쨌든 누군가는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서로를 이용해먹지 못해 안달이 났던 귀족과 자본가들이 서로를 경계하는 낯빛을 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인간이 이토록 쓸모없는데, 레본이 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엘리자베스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벅벅 문질러 닦으며 흐려진 시야 속에서 한 쪽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몸이 힘없이 늘어진 모습을.

레본 따위 망해버리라지.

너와, 내가 탈출하고 난 뒤엔.

그저…….

망해버리라지.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윌리엄 조쉬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떨리는 숨을 삼키고 내뱉은 다음, 물었다.

“무슨 말을 하면 되는 거죠? 말해요.”

윌리엄 조쉬는 엘리자베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폭도들 중 한 사람에게 손짓했다.

“우리의 요구서를 가져와!”

윌리엄의 말에 폭도가 걸어왔다. 윌리엄은 폭도가 내민 종이를 받아들고는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단어들을 씹듯이 천천히, 그리고 강하게 말했다.

“이걸 읽기 전에 이렇게 말해요. 나는 엘리자베스. 퀴닌의 개발자이자, 인민들의 정치인, 그리고 몰락한…….”

* * *

“나는 엘리자베스. 퀴닌의 개발자이자, 인민들의 정치인, 그리고 몰락한 공녀다.”

엘리자베스는 나무로 만든 거대한 십자가에 로버트가 묶이는 것을 보며 천천히 조쉬가 알려준 대로 문장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발아래에 있는 군인들과, 그 군인들의 뒤쪽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순진한 군중의 수많은 눈동자들을 응시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들을 바라보면 케이를 구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눈동자를 보면 자꾸만 이렇게 말하고 싶어질 것이다.

이 멍청한 혁명가들에게 선동당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이 허울만 좋은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놀아나는 것은 실패한 혁명이라는 배에 같이 올라타 개죽음을 당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힘, 옳은 권력, 진보적인 사고입니다. 총과 칼로 바뀐 정권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당신들은 그 잔해에 깔려 죽을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종이를 더 쫙 펴서 읽었다.

“나는 이곳에 ‘동지’들의 대리인으로 섰다. 우선, 군인들에게 밝혀두겠다. 우리 동지들은 국왕과 194명의 국회의원, 3명의 추천인과 1명의 보호자, 그리고 3명의 의회 청사 직원들을 데리고 있다. 부적절한 진입 시도나, 쓸데없는 총기 사용이 있을 시에는 동지들은…….”

엘리자베스는 종이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읽고 있는 종이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천천히, 가능한 큰 목소리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지하 통로에 설치한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려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은 물론 의회 청사에서 이 의회 청사를 인민들의 등골을 빨아먹기 바빴던 귀족들, 자본가들, 그리고 국왕의 무덤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니 무장해제하라.”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발밑에 선 군인들이 웅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뒤에 있는 군중들 중 선동꾼 몇이 환호하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엿 먹어라, 귀족원!”

선동꾼들의 목소리에 군인의 총구가 금세 뒤로 향했다. 무장도 하지 않은 민간인에게로.

엘리자베스가 외쳤다.

“다시 말한다! 무장해제하라!”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에도 군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있던 폭도 중 하나가 소총을 겨누더니 지체 없이 로버트의 왼쪽 귀를 쐈다.

펑!

허공을 가르는 파열음과 함께 로버트가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로버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엘리자베스가 귀를 막았다. 바로 옆에서 총을 쏘았던 탓에 귀가 먹먹했다. 하지만 회복할 시간은 없었다. 뒤에서 윌리엄 조쉬가 리볼버로 그녀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을 노려보며 옆에서 헐떡거리는 로버트를 턱짓으로 가리키고 말했다.

“사형수에 대한 예의라는 것도 없어요? 그게 당신들 혁명의 정체인가요? 거대한 무례함 덩어리.”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마저 읽어. 당장.”

엘리자베스는 조쉬를 더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계속 종이를 읽기 시작했다.

“……결투가 시작된다. 화형을 막을 방법은 국왕과 총리의 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이제부터 인민들의 요구는 국왕과 총리의 명이고 지금부터 통신국은 우리의 말을 기차가 다니는 모든 곳에 전달, 기차역에 게시하도록 하라. 우리 동지들은 지금부터 국왕과 총리의 명에 따라 왕정을 폐지한다.”

엘리자베스의 말과 동시에 모여 있던 2만의 군중이 술렁이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말을 주워 담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당장이라도 케이 하커에게 뛰어가고 싶은 마음으로 다음 줄을 읽어 내려갔다.

“국왕과 총리의 명에 따라 육군, 해군 대장들은 이 발코니 앞으로 내일 오후 2시까지 모인다. 육군, 해군의 대장들과 함께 컬로든 궁의 왕비와 공주, 왕자, 그 외 리오든에 사는 모든 왕족이 집결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내일 화형 대상은 4명으로 늘어날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벌벌 떠는 로버트가 침을 튀기며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었다.

“당장 왕족들을 데려오라고 해! 네년부터 시작해서 모두 다! 그리고 나를 풀어줘! 망할 레본! 이 망할 나라 같으니라고!”

로버트는 그렇게 말하며 몸부림을 쳤지만 그 탓에 로버트의 사지를 묶은 밧줄이 피부로 깊숙이 파고들었을 뿐, 로버트의 몸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로버트의 발밑에 쌓아둔 짚더미 위로 폭도의 횃불이 내려앉는 것을 보며 기도했다. 저 수많은 군중 속에 프란시스가 없기를.

엘리자베스는 짚더미가 천천히 타오르는 것을 보며 종이를 끝까지 읽어 내려가기 위해 속도를 냈다. 편지를 빨리 읽고 제 눈앞에서 타오르는 화염이 로버트의 몸을 삼키기 전에 내려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국왕과 총리의 명령 하에 인민들의 요구서를 배포한다. 다시 말한다. 우리의 요구는 내일 오후 2시까지…….”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떨려왔고 불꽃은 서서히 로버트의 몸을 삼켜갔다. 로버트의 비명소리는 2만 군중의 머리 위를 찢어발기며 날아다녔다. 엘리자베스는 편지 위로 날아드는 재를 삼키지 않으려고 입을 작게 벌리며 말했다.

“레본의 곳곳에서 싸우는 소작농과 도시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동지들의 걸음 아래로 저들의 토지가 무상몰수 되고, 동지들의 눈앞으로 토지가 무상분배되리라. 땅과 노동력, 그것이 이제부터 레본의 미래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종이를 다 읽자마자 와아아아, 하고 쏟아지는 함성소리를 들으며 뒤를 돌았다. 그 함성소리에 로버트의 비명소리가 묻혔다.

“으아아아악! 제발! 제발 죽여!”

엘리자베스는 뒤를 돌자마자 다짜고짜 윌리엄 조쉬의 허리춤을 노렸다. 윌리엄은 슬쩍 몸을 틀어 피했다.

“날쌔기도 하지, 우리 엘리자베스 양.”

“내게 총을 줘요. 아니면 저자를 그냥 쏴버려요.”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고 소리를 질렀다. 로버트의 비명이 엘리자베스의 귓전을 자꾸만 맴돌았다. 그녀는 윌리엄에게 애원하듯이 말했다.

“제발……. 그냥 쏘라구요……. 그냥…….”

엘리자베스는 비명 사이로 서서히 퍼져나가는 단백질에 열이 가해지는 소리를 들으며 윌리엄에게 들고 있던 종이를 빼앗겼다. 윌리엄이 옆에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데려가. 케이를 보게 해줘.”

엘리자베스는 사내에게 끌려가며 귀를 막으려고 노력했다. 끔찍한 비명소리였다.

엘리자베스는 사다리를 내려가며 제 손이 벌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이전 생에서 로버트 하커가 불에 타죽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1년 후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공장 화재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분명 불꽃이 피부에 닿기도 전에 질식하여 죽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바꿔놓은 운명의 대가를 처절하게 느끼며 사다리에서 지면으로 발이 닿자마자 의자들을 짚어가며 케이에게로 달려갔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뛰어갔을 때는 케이가 쇼크를 막 지난 듯 다 풀린 눈으로 헐떡거리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뒤에서 여전히 자신을 겨누고 있는 총부리 따위는 상관없이 케이에게 걸어가자마자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재빨리 자신의 품 안에 들어있던 K. P.라고 적힌 약병에서 약을 꺼내어 씹었다. 약이 타액과 섞여 흐물흐물해지자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입을 벌리고 씹은 약을 혀 위에 올려 케이의 혀 안으로, 목구멍 속으로 들여보냈다.

“너는 반드시 살아서 나갈 거야.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망쳤든 너만은…… 너의 운명만은……. 너를 죽음으로 이끌 리 없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입을 다물린 후 그의 머리를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속삭였다.

엘리자베스는 2층 발코니로 열린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빌어먹게 아름다운 재 가루를 보았다.

마치 한여름에 내리는 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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