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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33화 (133/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33화

과거 솔튼 빌리스는 자신의 다이너마이트를 국왕에게 팔아넘겼다. 원래대로라면 국왕은 그 다이너마이트로 ‘전쟁’을 꾸미려 들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추론하는 논거는 다음과 같았다.

하나, 케이의 말. 로버트가 국왕과 함께 전쟁을 꾸민다는 말.

둘, K라는 왕실 쪽 사람인 것으로 보이는 이가 계약한 다이너마이트와 무기용 철.

그것을 사들인 이들 중 하나가 바로 클레몬트 공작부부이고, 그 공작부부는 전쟁이라는 사업에 뛰어들려고 했다.

결론.

국왕은 ‘전쟁’이라는 사업을 마치 주식회사처럼 만들어 자본가들과 귀족들의 돈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분명 국왕은 솔튼 빌리스의 복권을 환영했을 것이다.

솔튼 빌리스는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꽤 뛰어난 사업가이자 과학자이고 무엇보다 국왕에게 진 큰 빚이 있으니 국왕의 명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대가로 국왕은 솔튼 빌리스의 생명을 책임졌을 것이다. 레트니는 쓸모가 있는 것을 함부로 갖다버리는 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솔튼 빌리스는 증기 기관으로 수많은 귀족과 국왕의 돈을 말아먹고 난 뒤 차라리 지하 감옥에 처박혀 있는 편을 더 선호했을 거야. 귀족들과 국왕이 솔튼 빌리스에게 빚을 청구하려고 눈이 시뻘갰으니까.’

케이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솔튼 빌리스는 그게 누구든 자신을 사갈 사람을 원했을 것이다. 자신의 재주와 훔쳐둔 약간의 니트로글로세린 따위를.

엘리자베스는 음울한 눈으로 로버트와 귀족의 결투를 지켜보는 솔튼을 노려보았다.

같은 과학자로서 그녀는 솔튼을 혐오했다. 저주했다. 그는 나락으로 떨어져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를 저주할 수 있는 여유는 잠시뿐이었다.

“결투를 시작하라!”

솔튼 빌리스의 옆에 선 사내가 소리를 지르며 결투에 나선 로버트와 귀족에게 총을 겨눴다.

귀족은 사내의 재촉에 벌벌 떨었다.

로버트는 달랐다. 로버트는 땀이 나서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로버트는 칼을 위쪽으로 향하게 하며 팔을 벌렸다.

“잠깐. 우리 말로 합시다. 신사 여러분. 왜 이런 지저분한 경기를 해야 합니까?”

로버트의 여유로운 목소리에 그걸 듣던 귀족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맞아요. 어, 어, 어차피 싸워봤자 살려주지도 않을 거잖습니까!”

귀족의 말에 로버트가 비릿하게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묘한 미소를 보며 어쩐지 불길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아직도 붙잡고 있는 윌리엄 조쉬를 보았다. 그녀가 속삭였다.

“이 미친 짓을 왜 하는 거예요. 로버트를 협박해 돈을 받아내는 게 더 이득일 텐데!”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은 미간을 찌푸렸다. 윌리엄은 잠시 멈췄던 걸음을 그대로 다시 걸어 의석 맨 뒤쪽에 의회 청사 직원 중 여자가 잡혀 있는 곳으로 엘리자베스를 데려갔다. 그리고 그녀를 의석에 앉히며 말했다.

“말하지 않았나. 돈은 세상을 바꾸기에 충분치 않다고.”

“총과 칼도 충분치 않아요.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죽이겠다구요? 레트니가 굴복할 때까지?”

엘리자베스가 각자의 의석에 자리한 신사들을 가리켰다.

의회의 구성원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들의 숫자는 총 252명이었다. 아까 죽은 이들의 숫자는 제해야 하겠지만. 반면 지금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폭도들의 숫자는 아까 정신없이 확인했을 때보단 확실히 늘었지만 그래봤자 40명 남짓.

엘리자베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조쉬를 노려보았다.

“여기 있는 이들을 다 죽이면 당신들이 이곳을 안전히 빠져나갈 방도도 요원할 텐데요? 대체 뭘 믿고……!”

“다 죽일 생각은 없어. 숙녀 분들은 이 결투에서 제외야.”

윌리엄의 말에 여자 직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뭘 믿냐니.”

윌리엄 조쉬는 피식 웃으며 옆을 지키고 있던 한 사제복의 사내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사내는 엘리자베스와 케이가 방금 나온 그 계단 바로 위에 있는 커튼을 걷었다. 커튼이 걷히자 아까 엘리자베스가 들어갔던 계단 옆에 있던 것과 비슷한 폐쇄된 창문이 있었다. 나무와 철판으로 가려진 창문들 쪽으로는 거대한 사다리가 있었는데 그 위는 듬성듬성하게 나무판자로 막혀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

아주 약한 햇살이 그쪽으로 새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밖으로 이어지는 통로라는 뜻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이 아마도 과거에 찰스 아이드 같은 공화파 정치인들이 제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오래된 발코니일 거라고 예상했다.

윌리엄이 말했다.

“은밀한 출구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그 말은 맞는 것 같았다.

윌리엄은 엘리자베스의 떨리는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우리가 믿는 건 딱 하나야. 저 밖에 있는 수많은 시민들. 신과 주인, 그리고 왕에게 시달려온 우리의 동지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들으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와중에도 로버트는 계속 여유로운 척 언변을 늘어놓았다. 자신의 공장 중 하나를 주겠다거나 국왕 폐하에게 바친 영지를 선물하겠다거나 도시 노동자들에게 참정권을 제공하겠다는 등, 도무지 지켜지지 않을 것 같은 약속들이었다.

“그것은 너무 하지 않소! 노동자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 바로 투표권을 행사하게 하면 위험한 일이 일어날 거요!”

웃긴 것은 생명이 걸린 와중에도 귀족들은 반발했다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그녀는 눈을 잔뜩 찡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미소를 지었으나 고통스럽게 뒤틀린 표정이 되었을 것이다.

로버트와 귀족이 선 단상 아래쪽으로 눈을 돌린 엘리자베스는 사내들에게 굴복당해 입술이 터져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고 있는 케이를 발견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케이의 얼굴에는 땀이 흐르고 피부는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윌리엄 조쉬가 말했다.

“그리고, 당신. 우리가 믿는 것은 당신이오. 당신이라면 인민들에게 큰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거요. 여성 과학자, 종교를 배신한 이단아, 왕족의 핏줄을 타고났으나 평민이 된 엘리자베스. 당신은 훌륭한 동지요.”

엘리자베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케이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도망치고 싶으면 말해.’

엘리자베스의 입술 모양을 본 윌리엄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케이는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렇잖아도 엉망이었던 얼굴을 더 심하게 일그러뜨렸다.

거짓말쟁이.

케이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르지만 엘리자베스는 진심이었다.

마음을 바꾸었다. 케이가 원한다면 여기 모여 있는 이 허영덩어리 혁명가들과 귀족, 자본가 이 모든 이들을 죽여버리고 케이를 데리고 도망치리라. 리오든이 괴물로 득실거릴까 봐 걱정이라면 단순하게 해결하면 된다.

전부, 한 놈도 빠짐없이, 제대로, 숨통을 끊어놓겠다. 목을 잘라 모든 피를 마시고 시간이 부족하면 몸통과 목, 팔과 다리가 붙어있지 못하게 찢어버리겠다.

그래서 너를—

지금 나에게는 이 의회 청사 안에서 귀하기로 보나, 쓸모 있기로 보나, 아름답기로 보나 가장 귀중한 물건인 너를 데리고 도망치겠다.

엘리자베스는 결심한 터였다.

“그럼 선거 연령을 더 낮춰서 정하면 됩니다. 지금은 지역구에 따라 할당했지만 이제부터는 연령으로 정하면 일종의 보통선거 아닙니까, 그게. 35세에서 40세 정도?”

로버트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그 말을 들은 윌리엄 조쉬가 따분하다는 듯한 얼굴로 솔튼 빌리스를 노려보았다. 그때 로버트의 결투 상대인 귀족이 말했다.

“아니면 선거인단을 선출하는 것도 괜찮겠군요. 어쨌거나—”

귀족은 아까 벌벌 떨며 움츠린 토끼처럼 굴던 것에서 벗어나 지금이 토론을 즐기는 신사처럼 굴기 시작했다. 귀족의 오만한 모습과 솔튼 경과 윌리엄 경 사이의 미묘한 눈빛, 그리고 사내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막상 귀족을 찌른 것은 바로 로버트였다.

“으어어억…….”

어설픈 칼 솜씨였으나 귀족의 흉부를 단숨에 꿰뚫었다. 당장이라도 귀족과 로버트를 쏘기 위해 준비했던 사내들이 총구를 거뒀다.

칼에 맞은 귀족이 피를 토해내며 로버트의 멱살을 쥐었다. 폐를 꿰뚫은 모양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조금이라도 약해 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피 냄새가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로버트는 자신 쪽으로 쓰러지려는 귀족에게서 칼을 뽑아낸 후 이번엔 심장을 노려 다시 칼을 찔러내었다. 얼떨결에 명중한 걸까, 노린 걸까. 피가 귀족의 몸 뒤쪽으로 뿜어져 나왔다. 로버트는 벌게진 눈으로 칼 손잡이를 놓고 귀족을 뒤로 밀었다. 귀족은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로버트는 더러운 것이라도 보는 눈으로 귀족의 사체를 발로 쓰윽 밀며 솔튼을 보았다.

“나는 당신들의 편이오. 방금도 보지 않았소. 이 더러운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의식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지! 신도 주인도 없다! 정말 만족스러운 구호야!”

로버트의 말에 레트니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로버트는 팔을 넓게 벌리며 웃었다.

“내 전 재산을 주겠소. 평등한 세상이라니! 레본에서 그걸 나만큼 바랐던 자는 없어! 더러운 귀족 놈들, 나 같은 평민들 덕분에 집에서 기르는 가축처럼 뒤룩뒤룩하니 살이나 찐 주제에! 감히! 감히 나를!”

로버트가 분노한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침을 튀긴 덕분에 공포에 질린 귀족원 의원들의 얼굴에 침이 튀었다. 하지만 그들은 제 눈앞에서 자신들이 경멸하던 평민의 손에 쉽게 죽어간 귀족의 사체를 보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솔튼 빌리스가 두려워서인지 함부로 로버트에게 대항하지 않았다.

윌리엄 조쉬는 로버트의 연설을 들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곤 엘리자베스를 힐끔 보며 말했다.

“당신 연설을 기대하겠소.”

“방금 뭐라고……. 방금…….”

엘리자베스가 어느새 자신을 사제복을 입은 남자에게 맡기고 걸어 나간 윌리엄을 보며 입에서 손을 뗐다. 아찔한 피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옆을 보니 여자 직원은 이미 헛구역질을 하느라 제대로 서 있지 못했다.

솔튼 빌리스 옆에 서 있던 사제복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그는 아까 국왕의 호위를 쏴 죽인 남자였다.

“로버트 하커. 너는 결투에서 명예를 지키지 못했으므로 화형에 처한다.”

“뭐? 뭐라고……. 뭐? 나는, 나는 당신들의 편이라고 하지 않았나!”

로버트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남자가 검은색 사제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반삭에 가까운 남자의 머리와 귓가에 매달린 은색 십자가가 샹들리에 아래 훤히 드러났다. 남자는 로버트를 향해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말했다.

“우리는 편을 정하는 게 아니다, 로버트 하커. 우리는 우리의 법을 지킬 뿐이다.”

“잠깐! 잠깐!”

로버트가 끌려 올라오기 시작하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로버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 조쉬의 멱살을 쥐었다. 뒤에서 총부리가 겨눠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없었다.

“케이를, 케이를 보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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