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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31화 (131/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31화

“총을 들고 있던 사람, 솔튼 빌리스 경이었어.”

“알아. 국왕으로부터도, 이 나라로부터도 더 이상 해먹을 게 없다고 판단했겠지.”

케이는 대답하며 엘리자베스를 제 품에 안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따라 기둥 사이 사이로 뛰고 기었다.

그 사이 벌써 3명의 인사가 더 죽었다.

“어허이, 솔튼 경. 왕비님의 친척께서 이러시면……. 우리 신사적으로 이야기합시다.”

귀족이나 자본가들은 솔튼 빌리스의 얼굴을 드디어 확인하고 어떻게든 친분에 비벼보기 위해서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것은 총과 주먹, 발길질에 의해 쉽게 막혔다.

솔튼 빌리스는 음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레본의 국왕이 앉으라고 하지 않았나. 멍청한 것들.”

솔튼 빌리스의 일당은 숫자는 적어도 나름대로 체계적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본보기로 도망치려는 자들을 해치우고 그 시체를 중앙에 쌓았다.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해보고자 하던 귀족들은 체념한 얼굴로 하나 둘 기어 나와서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솔튼 빌리스는 이제 책상 위에 서서 귀족들의 숫자를 세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와 케이는 어느새 의회 자리의 가장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평민원 추천인. 추천인 세 놈을 머릿수에 포함시켜야 해.”

그때, 선명한 솔튼 빌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그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케이가 그런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챈 듯이 잠시 멈춰 서서 웅크려 앉은 채로 모자가 어디론가 날아가 엉망이 된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 아래, 엘리자베스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쪽이야. 가장 마지막에 막은 통로가 지하실이니 저쪽으로 뛰는 거야.”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커튼 뒤쪽, 원래는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던 곳을 가리켰다. 지하실까진 통로가 막혀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뒷문까지 통하는 길을 어찌어찌 잘 가면 뒷문은 뚫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갈 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몰라. 폭도들의 숫자는 적고, 뒷길까지 지킬 병력도, 왕의 군대와 싸울 병력도 없으니 밖에서 폭탄을 터트려버린 거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불안감에 젖은 얼굴로 자신의 뺨을 매만지는 케이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의회 청사는 출입문이 하나뿐인 철옹성과 다름없다. 철옹성은 밖에서 안으로 침입하는 이들을 막기엔 완벽한 구조지만, 반대로 밖과 연결되는 통로가 끊겨버리면 절대로 진입할 수 없는 고립지가 되어버린다. 솔튼 빌리스는 이 점을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왜?

솔튼 빌리스는 이번에 국왕의 입김으로 겨우 복권된 자다. 명예가 실추되고 돈과 재산을 탕진하긴 했어도 귀족이라는 신분을 유지했다는 것만으로도 솔튼 빌리스는 결코 밑지는 장사를 했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런 그가 국왕을 납치하고 국회의원들을 협박하다니. 그 정도로 솔튼 빌리스가 궁지에 몰릴 일이 있단 말인가? 엘리자베스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케이가 말했다.

“일단 뛰어. 뒤는 내가 맡을 테니까.”

케이가 품속에서 작은 리볼버를 꺼냈다.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분명 검문검색을 받았잖아.”

“저들도 받았지.”

케이는 총을 든 솔튼 빌리스의 무리를 가리켰다.

“……군인들을 매수한 거야?”

“레본에서 군인만큼 매수하기 쉬운 자들은 없어.”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통로를 가리켰다. 숫자가 비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포위망을 좁혀 오는 솔튼의 폭도들을 향해 리볼버를 겨눈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셋을 세면 뛰는 거야.”

“닥쳐.”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하려는 짓이 뭔지 알고 황급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의 숨소리가 격하게 떨려왔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리볼버를 폭도들에게 겨눈 채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걱정 하지 마. 네 손에 죽을 때까진 꼭 살아 있도록 할 테니까.”

“이러지 마. 이건…… 이건…… 아닌 거야.”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엘리자베스는 총을 든 사내들을 보았다.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의회 청사에서 무장한 폭도들이 국왕을 사로잡다니.

엘리자베스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붉은 피를 얼굴에 묻힌 채 무덤덤한 표정을 짓는 국왕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벌벌 떨었던 자가 이 상황에서는 그 어떤 힘도 없이 무력하게 앉아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창문도 없는 거대한 광장과도 같은 본회의장을 둘러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잠시 떠올렸다. 저 기둥과 이 기둥을 날아다니는 괴물 몰록의 모습을.

그 괴물은 엘리자베스였다.

괴물에게 수많은 총알이 쏟아지겠지만 그것은 결코 괴물의 피부를 뚫고 들어올 수 없을 것이며 괴물은 무시무시한 힘과 속도로 단숨에 솔튼 빌리스의 일행들을 죽여버릴 것이다.

거기서 멈출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의 상상을 멈춘 것은 바로 그 질문이었다. 엘리자베스가 과연 멈출 수 있을 것인가. 솔튼 빌리스 일당의 피 맛을 본 괴물이 그쯤에서 학살을 멈추고 조용히 다시 인간의 형체로 돌아올 수 있을까?

아니면 결국 이 의회를 피투성이로 만들고, 용케도 살아남은 자들은 전부 괴물이 되어 리오든을 망치게 될까.

괴물이 장악한 레본이라니.

엘리자베스는 그 상상이 퍽 달콤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죽음과 함께 멸망하는 세계. 세계를 향한 그만한 복수가 또 있을까.

엘리자베스가 그런 달콤한 상상에 빠져 있을 때 케이가 말했다.

“셋.”

케이는 리볼버로 가까이 오는 남자의 머리를 노렸다. 엘리자베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둘.”

케이가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뭔가 해야 했다. 뭔가를 말하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하나.”

그러나 원망도 잠시, 케이가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뛰려고 할 때였다. 케이가 노리던 남자가 갑자기 한쪽을 보더니 건너편에서 오던 자와 서로 수신호를 주고받았다. 그것을 본 엘리자베스는 당장이라도 남자를 쏠 것 같은 케이의 리볼버 총신을 쥐었다. 케이가 총구를 하늘로 향하도록 해 몸에 가까이 붙였다.

“저쪽이야.”

엘리자베스와 케이가 숨은 곳을 향해 다가오던 남자 두 명이 다른 쪽으로 향했다.

엘리자베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뛰었다. 케이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목적지였던 통로를 가린 오래된 커튼에 도착하자마자 엘리자베스는 그 뒤로 숨어들었다. 커튼을 잘못 건드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이곳을 들킨다면 끝장이었다.

커튼 안에 들어가자마자 창문 근처로 난 끝없는 어둠을 뿜어내는 통로가 보였다. 나무판자 두 개를 X자로 교차해 막아두었으나 그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케이 역시 커튼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마자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미친…….”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단어를 완성하기도 전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케이의 커다란 손이 엘리자베스의 입을 막는 순간, 엘리자베스도 케이처럼 커튼 아래로 움직이는 발들을 보았다.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 그 여자가 없어.”

남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들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눈을 맞췄다. 케이는 그녀를 가만히 보더니 커튼 아래에서 움직이는 발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통로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먼저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몸이 어둠 속에서 반쯤 숨겨지는 것을 보며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계단 위까지 차오른 파도처럼 어둠이 발아래 드글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진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그곳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 선택은 과연 회피인가, 아니면 생존을 위한 몸부림인가.

엘리자베스는 꿈속에서 보았던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총알을 떠올렸다. 괴물이 될 자신이 이렇게 결국 또 살아남는 것이 어떤 도움이 될까.

엘리자베스는 어둠 속에서 케이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자신의 손이 땀 때문에, 혹은 그 무엇 때문에 차가운 듯싶었다. 케이의 손에서는 열기가 가득 흘러나왔으니까.

케이는 계단 끄트머리쯤에 이르러서야 품 안에서 성냥을 꺼내어 불을 밝혔다. 그러자 벽을 타고 내려오던 벌레들이 우르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엘리자베스가 몸을 움츠렸다.

“뒷문도 폭발의 여파로 파괴되었으면 어쩌지?”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더라도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게 안전하겠지.”

“누굴?”

“국왕의 군대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펑!

그때 또 위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이마에 총구멍이 났던 시종를 떠올리며 케이의 어깨에 매달렸다.

“젠장…….”

엘리자베스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욕지거리를 하자 케이가 피식 웃었다.

“입이 거칠군, 아가씨.”

케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엘리자베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솔튼 빌리스가 왜 저런 짓을 꾸몄을까?”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이는 통로를 걸어가며 대답했다.

“돈 때문이겠지. 솔튼 빌리스는 증기 기관으로 수많은 귀족과 국왕의 돈을 말아먹고 난 뒤 차라리 지하 감옥에 처박혀 있는 편을 더 선호했을 거야. 귀족들과 국왕이 솔튼 빌리스에게 빚을 청구하려고 눈이 시뻘갰으니까.”

“왕비는? 솔튼 경의 사면과 복권을 요청한 건 왕비잖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코웃음을 쳤다.

“왕비는 자신의 가문을 위해 솔튼 경이 풀려나길 바랐을 뿐, 솔튼 경이 사면되자마자 암살당한다고 해도 별로 안타까워하지도 않았을 거야. 왕족들에게 가족이란 그런 거니까.”

케이의 말이 끝나자 엘리자베스가 살짝 케이의 어깨로부터 떨어졌다. 케이는 그것을 느끼곤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엘리자베스의 눈을 가만히 보다가 걸음을 멈췄다.

“기회를 줄까?”

들고 있던 성냥이 케이의 손가락을 태울 듯했다. 케이는 그것을 바닥에 떨어뜨려 발로 비벼 껐다. 그러자 통로가 완벽한 암흑 속에 잠겼다. 아까 들어온 입구 쪽으로부터 들어오는 미약한 빛과 암순응된 눈 덕분에 그나마 케이의 이목구비 정도만 알아볼 수 있었다.

“무슨 기회.”

엘리자베스는 어둠에 잠긴 케이의 얼굴이 어떤 표정일지 가늠하며 물었다. 그러자 케이가 철컥, 소리를 내며 들고 있던 리볼버를 달그락거렸다. 그러더니 그것을 엘리자베스의 손에 쥐여 주었다.

“네 부모의 원수. 나를 죽일 기회 말이야.”

케이는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의 배에 총구를 딱 붙였다. 방아쇠에 약간만 힘을 주면 당장 발사가 될 것이다.

케이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렇게 해야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지. 가능하면 뒤쪽에도 천을 대는 게 좋겠고.”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들으며 케이의 표정을 가늠하는 데에 성공했다.

오만하고 비틀린 미소.

그래. 지금의 케이는 분명 그렇게 웃고 있으리라.

자신의 생명을 경시하는 얼굴로, 자신을 깎아내림으로써 상대를 우습게 만드는 태도로, 내게 모욕을 안기려는 것인지 나를 매혹하려는 것인지 알 길 없는 입술로.

엘리자베스는 방아쇠에 손을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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