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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30화 (130/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30화

선의 이쪽. 저쪽.

엘리자베스는 국왕의 의중을 읽지 못해 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제 의회는 정당이랄 것이 무색하며, 복고된 왕정으로 인해 왕당파든 공화파든 국왕이 원하는 방향으로 모든 의결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런 시대에 와서 왕당파와 공화파 중 하나를 고르라니.

엘리자베스가 적절한 대답을 찾아 헤매고 있는 사이에 레트니가 말했다.

“찰스 아이드가 이 의회를 점거하고 짐의 증조부의 목을 베었을 때, 그는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짐의 찰스 아이드가 그런 점에서는 아주 영특한 자라고 여긴다, 나의 조카.”

나의 조카.

엘리자베스는 국왕의 호칭이 갑작스럽게 바뀐 것에 몸을 움찔했다. 이 호칭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국왕이 말을 이었다.

“그는 총리가 되었다. 그리고 의회에 왕당파와 공화파를 앉혀 한쪽은 왕정을 옹호케 하고, 한쪽은 민주주의라는 것을 옹호케 만들었다. 이것이 그의 영특함이다. 왜인지 아느냐?”

국왕이 그림처럼 고개를 돌려 어떤 표정도 없는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대답해야 했다.

엘리자베스가 입을 열었다.

“그가 적과 아군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적이 누군지 알아야 총구를 겨눌 표적도 확실해지는 것이니까요.”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레트니의 입이 영혼 없이 말려 올라갔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보며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레트니가 말했다.

“그렇지. 찰스 아이드는 감히 레본의 국왕을 얕보았다. 그것은 그의 어리석음이다. 레본의 국왕은 한낱 인간이 아니다. 레본의 국왕은 레본의 역사이며, 종교이며, 레본 그 자체이다. 그러니 찰스 아이드는 여전히 목이 잘린 채 의회 앞에서 치욕을 당하는 것이야. 그럼에도 그의 영특함은 본받을 만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적에게서도 본받을 점을 깨달아야 하느니…….”

국왕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제 국회의원들은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다만 한 사람, 케이만은 여전히 못 박힌 듯이 벽에 붙어 서서 엘리자베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런 케이와 눈을 마주쳤다. 케이의 굳은 얼굴과 마주한 순간, 케이의 입이 열렸다. 케이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도망치고 싶으면 말해.’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보는 순간, 2만 명이 아니라 20만 명이더라도 엘리자베스를 도망치게 해주겠다던 케이의 말이 진심임을 알았다. 지금 당장 엘리자베스가 입술을 열어 도망치고 싶다고 말하면, 케이는 주저 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이곳을 나가리라.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믿어졌다.

나의 부모를 죽이는 데에 일조하고, 나를 몰락한 공녀로 만든 사내. 나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약혼한 사내.

그 사내를 이렇게 믿고 있다는 건 엘리자베스가 괴물이 되는 병에 걸려 이지를 잃은 덕일까, 아니면 저 사내가 배신과 신뢰, 매혹과 모욕을 둘 다 몸에 가진 이상한 작자라는 뜻일까.

엘리자베스가 이를 악물고 케이를 보고 있을 때였다. 레트니가 우악스럽게 그녀의 턱을 그러쥐고 자신에게로 돌렸다.

그 순간, 케이가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가 두 발자국쯤 걸어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 쪽을 볼 수 없었지만 마음으로 외쳤다.

오지 마.

절대.

엘리자베스는 레트니와 눈을 마주치고 그 소름끼치는 눈동자를 보았다.

흰자의 정중앙에 놓인 눈동자.

결코 어느 쪽으로든 정중앙에서 움직이지 않는 눈동자.

국왕은 눈동자를 고개보다 먼저 돌리지 않는다.

레트니는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며 말했다.

“너는 어느 쪽을 원하느냐. 짐의 적. 짐의 아군. 어느 쪽에 서고 싶으냐는 말이다.”

“저, 저는…….”

엘리자베스가 더듬거리며 말을 하려고 하자 레트니가 더 세게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

“국왕 앞에서는 치아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레트니가 턱을 놓았다. 엘리자베스는 서둘러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폐하.”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던 레트니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이마를 카펫 위에 딱 대고 있는 동안.

“지난 3개월, 그리고 특히나 지난 일주일. 너의 행보는 잘 보았느니라. 짐은 너의 재주를 갸륵하게 여긴다, 나의 조카. 그러나 재주가 과하면 오만해지는 법. 너는 이 자리에 무엇으로 온 것이냐. 나의 조카로 왔느냐, 엘리자베스로 왔느냐. 너의 대답에 따라 내가 너를 복권시킬 수도 있다.”

복권.

엘리자베스는 국왕의 말을 듣는 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국왕의 마지막 문장이 들려오는 순간에 엎드린 엘리자베스의 눈에 시종이 익숙한 구둣발을 막아서는 게 보였다.

“폐하께서는 지금…….”

시종이 막아서는 통에 구둣발이 멈췄다. 그쯤 되면 돌아볼 법도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올려다본 국왕은 조금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엘리자베스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 역시 마지막 문장을 들었음을 알았다.

복권이라니. 케이는 자신이 무슨 대답을 할 거라 여길까.

‘당신은 그 여자가 얼마나 왕족인 걸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몰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엿들었던 것을 기억했다.

케이에게 엘리자베스는 불쌍하고 안쓰러운 몰락한 공녀였다. 한심하게도 여전히 망해가는 왕족이라는 이름에 집착하는.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던진다고 해도 그것이 동정심의 발로임을 직시했다. 케이 하커는 엘리자베스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조아렸다. 이를 악무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럼.

그럼 대체 왜 나에게 손수건을 주었어?

왜 나를 위한 머리핀을 그렸어?

그건 대체…….

누굴 위한 거였어.

국왕이 담담하게 말했다.

“짐은 네가 자랑스러운 짐의 조카로 돌아오길 원한다, 엘리자베스. 너의 훌륭한 성취를 짐은 언제나 지켜보고 있었다. 너의 부모는 불충하였으나 그 죄는 이미 죽음으로 갚았다. 부모의 죽음으로 너는 자유로워졌다. 그러니 이제는 네가 레본에게 충성할 기회를 주고자 함이니라. 어떻게 하겠는가. 선의 어느 쪽에 서겠느냐는 말이다.”

국왕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케이를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지금일지도 모른다.

지금이 바로 3개월 전, 케이에게 당했던 배신을 돌려줄 차례인지도.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일그러진 눈동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은 여전히…….

이상했다.

그 이상한 감정의 이름을 자꾸만 엘리자베스의 의식이 ‘애정’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그때였다.

펑!

콰과광!

엄청난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뒤에 있던 기둥들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지진인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땅이 진동을 하고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실내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귀족과 자본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우르르 몰려 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주 느린 속도로.

엘리자베스는 또 다시 자신의 동체 시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가장 먼저 케이 쪽을 보았다.

그러자 케이가 시종를 밀쳐내고 엘리자베스에게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국왕이 앉은 왕좌 뒤쪽으로부터 몰려오는 먼지와 파편 폭풍도.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걸어올 때마다 진해지는 피 냄새를 맡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케이에게서는 피 냄새가 났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껴안는 것과 거의 동시에 케이가 밀쳐낸 시종의 이마 정중앙에 선명한 총알구멍이 나는 것이 보였다.

“윽!”

짧디짧은 비명이었다. 시종의 동공이 풀리고 몸이 뻣뻣해져서 뒤로 넘어가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보았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

누가 쏜 거지?

엘리자베스가 뒤를 돌았을 땐, 거기엔 솔튼 빌리스가 있었다. 그는 총을 들고 비릿하게 웃더니 하늘을 향해 또 총을 한 발 쏘았다.

펑!

폭발음과 함께, 케이의 넓은 품이 엘리자베스의 시야를 가렸다.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 알았다.

방금의 그 진동은 지진이 아니다.

다이너마이트의 충격파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함께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세상의 느린 속도가 천천히 제 속도로 돌아왔다.

철컥, 철컥.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세 개의 총구가 엘리자베스의 눈앞에 있었다. 국왕을 둘러싼 근위병들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왕좌 뒤편에 있던 유일한 출입구가 막힌 것을 보았다.

누군가가 밖에서 폭탄을 터트렸다. 입구로 향하는 길에 폭탄을…….

그 말은—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꽉 쥐고 자신의 등 뒤로 숨기려고 했을 때였다.

펑! 펑! 펑!

세 개의 총알이 순식간에 근위병들의 이마에 총구멍을 냈다. 그 뒤에 앉아 있던 국왕의 얼굴에 붉은 피가 뿌려졌다.

국왕은 그 상황에서도 조금도 눈을 감지 않았다. 공포에 질리지도 않았고, 그저 무표정하게 자신을 막아서다 죽어간 근위병들을 보았다.

철컥.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귀를 막고 쥐새끼처럼 숨어든 귀족과 자본가들 사이로 책상 위에 올라탄 이십 명 정도의 사내를 보았다. 그들 중 몇은 근위병의 옷을 입고 있었고, 몇은 사제의 옷을, 그리고 마지막 몇은 신사의 옷을 입고 있었다.

신사의 옷을 입은 자 중 하나가 솔튼 빌리스였다. 솔튼 빌리스가 말했다.

“다들 움직이지 마. 조용히 다시 착석한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책상 아래로 숨은 신사 놈들은 벌벌 떠는 신음소리나 낼 뿐이었다.

그때 케이와 엘리자베스의 뒤쪽에 있던 사제복을 입은 남자 하나가 국왕에게 총구를 들이댔다. 남자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국왕에게 말했다.

“하명하시오. 레트니 클레몬트.”

엘리자베스는 국왕의 대답을 기다렸다. 국왕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자신의 갸륵한 백성을 보듯 사제복을 입은 폭도를 보았으므로. 과연 국왕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엇일지. 엘리자베스는 기다려보았다.

국왕은 사제복을 입은 폭도의 총구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들 착석하라.”

그 말이 들림과 동시에 누군가가 외쳤다.

“이 미친놈들이! 감히 폐하에게!”

그 목소리가 힘이 되었는지 몇몇 귀족들도 일어났다.

펑!

퍼펑!

귀가 얼얼할 정도의 총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가장 먼저 외친 이가 피를 흘리며 죽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가 항의하기 시작했고, 또 그 두 번째 남자가 죽었다. 몇몇은 도주하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그때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도주로 기억하고 있지?”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잡아 당겼다. 엘리자베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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