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29화
무거운 대리석 문을 열고 의회 청사 안에 들어가자 우선 홀이 나왔다.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말해준 의회 청사 내부의 설계를 떠올렸다. 길고 거대한 홀과, 그 안에 더 거대한 평민원과 귀족원의 토론의 장인 본회의장, 그 양 옆에는 도서관이 있었다.
의회 청사의 건물 도면은 단순했다. 모든 길은 정문으로만 통하고, 옆문이나 뒷문, 쪽문 같은 것은 전부 찰스 아이드 사건 이후 폐쇄된 지 오래였다.
엘리자베스는 무거운 대리석문이 닫히는 것을 보며 왠지 모르게 이 의회 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엘리자베스는 검문검색을 마치고 이미 홀 안에 잔뜩 모여 있는 귀족원과 평민원의 국회의원들을 보았다. 그들은 엘리자베스가 들어오자 반가운 듯 눈인사를 했다. 어제 타운하우스에서 보았던 콧대 높은 귀족과 자본가들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어제 타운하우스에서는 그들이 엘리자베스를 무시함으로써 얻는 것이 있었지만, 지금의 의회 청사에서 이들은 엘리자베스에게 친절함으로써 얻는 것이 있는 것이다. 어제 그들이 무시를 통해 얻어간 것이 품위라면, 오늘 이들이 친절을 통해 얻어갈 것은 불확실하지만 혹시 모를 의회의 1표였다.
엘리자베스는 부담스러운 이들의 눈빛을 무시하려고 노력하며 천천히 홀 내부를 구경했다.
홀에서 가장 눈을 끄는 것은 역시나 홀의 모서리마다 장식되어 있는 조각상이었다. 전부 목이 잘린, 그로테스크한 조각상은 찰스 아이드를 도와 의회주의의 기틀을 닦은 국회의원들이었다. 레트니의 조부가 모두 목을 자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국회의원 조각상 뒤에는 화려한 벽화가 이어졌다. 엘리자베스는 벽화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은 두메로의 성벽과 솔름에 스며든 몰록이라는 황소 모양의 악마에 관한 성경 속 이야기였다.
엘리자베스가 그것을 보기 위해 멈춰 서자 케이 역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케이는 나지막이 말했다.
“국왕 폐하께서 친히 새로 그리길 원하신 벽화야. 쉴로모. 장벽 안의 왕. 그게 국왕 폐하의 영명이니까.”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비는 찰스 아이드와 국회의원들의 목을 잘랐고 아비는 국회의원 동상의 목을 잘랐으며 레트니는 국회에 쉴로모의 벽화를 그릴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레트니가 원하는 게 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강력한 국가도, 사회의 통합도 아닌, 확실한 장벽 그 자체다.
엘리자베스는 벽화 속, 장벽 위에 서서 솔름의 백성들이 학살되는 장면을 보며 미소 짓는 쉴로모 왕을 보았다.
천한 것과 귀한 것,
왕과 백성,
귀족과 평민,
이쪽과 저쪽을 나뉘는 분명한 선.
그것이 바로 장벽인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벽화를 구경하며 천천히 걷는 사이에 케이는 자신을 부르는 수많은 귀족들의 인사를 끝없이 무시했다. 케이가 그들의 인사를 세 번쯤 무시했을 때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팔을 놓았다.
“괜찮아. 어차피 이 안은 안전하잖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케이는 곧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걸어가는 신사들이 잔뜩 모인 곳을 바라보다가 한 남자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새하얀 피부, 초록색 눈동자, 은발에 가까운 금발—
“솔튼 빌리스 경. 희대의 사기꾼이지.”
엘리자베스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그러자 로버트 하커가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살짝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로버트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로버트는 놀랍게도 엘리자베스에게 더더욱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여우같은 남자.
엘리자베스는 로버트를 그렇게 평가했다.
로버트는 케인에 몸을 구부정하게 기대고 시가를 물더니 말했다.
“저런 사기꾼도 감옥에서 나와 의석은 물론이고 경 칭호도 유지하는데, 그까짓 경 칭호, 나라고 못 받을 리가 없지. 안 그런가, 엘리자베스 양?”
엘리자베스, 양.
엘리자베스는 하루 만에 달라진 호칭에 비릿하게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로버트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이 자리의 신사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로버트 역시 ‘경’의 칭호를 위해 불확실하지만 알 수 없는 의석 1표를 얻고 싶은 것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칭호보다는 레본을 향한 충정이 중요한 법이죠.”
엘리자베스의 말을 들은 로버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레본이라니, 국왕 폐하를 위한 충정이지.”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의표를 정확히 꿰뚫은 로버트의 말에 이를 바드득 갈았다. 로버트가 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프란시스는 좀 어떤지 궁금하군. 나의 불쌍한 여인. 많이 힘들어 보였어.”
엘리자베스는 로버트의 목소리에 실린 진심을 느끼며 진저리를 쳤다. 감히 어떻게 로버트가 프란시스를 걱정한단 말인가. 프란시스를 저렇게 불안정하게 만든 것도, 그래놓고 유기하듯 정신병원에 처넣으려고 한 것도, 전부 본인인 주제에. 엘리자베스가 이를 악물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만 없으면 프란시스는 언제나 행복하게 지내요.”
“그럴 리가. 우리는 서로가 없이는 행복하지 않아.”
로버트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곤 천천히 케이 쪽을 보았다. 그는 시가의 독한 연기를 깊이 빨아들이고 눈을 가늘게 뜨며 연기를 뱉어냈다.
“하지만 나의 프란시스는 남자의 욕망을 너무 과소평가했어. 우리 엘리자베스 양처럼.”
로버트의 말을 들으며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로버트가 말했다.
“케이가 너를 지켜줄 거라고 믿나? 남자를 믿는 건 좋지 않은 일이야, 엘리자베스 양. 내가 이 더럽고 역겨운 세상을 더 오래 산 사람으로서 얘기해주지.”
로버트는 땅, 하고 케인을 바닥에 소리 나게 짚으며 엘리자베스에게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로버트의 표정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 같은 우월감과 자신의 인격을 버린 사람들 특유의 잔혹함이 나타나 있었다.
“내 아들이 재미있는 일을 꾸미고 있는 것쯤은 알고 있단다. 남자라면 큰 배짱을 하나쯤은 품어야 하는 법이니 방해할 생각은 없다. 민주주의는 분명히 돈이 되는 일이고, 그 돈을 통해 하커 가문은 영원히 레본에 충성할 테니. 하지만 돈벌이는 돈벌이일 뿐이야. 너를 향한 내 아들의 욕망이 그저 추잡한 욕망에 지나지 않듯이. 남자들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혁명가가 되는 것도, 사랑에 빠진 남자가 되는 것도 할 수 있는 종족이지.”
로버트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로버트를 노려보았다. 그와 거의 동시에 로버트와 엘리자베스가 함께 있는 것을 알아차린 케이가 이쪽을 보았다. 케이가 재빨리 함께 있던 신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이쪽으로 걸어오려고 할 때쯤이었다.
대리석 문이 우아하게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스며들어오는 엄청난 햇빛의 양 탓에 문 앞에 선 남자의 모습은 그림자처럼 보였다. 문을 지키고 서 있던 근위병이 말했다.
“국왕 폐하께서 드십니다!”
끼익.
그 순간, 홀에서 광장으로 나아가는 대리석 문과 동시에 본회의장으로 가는 거대한 나무문이 열렸다.
나무문 안으로 돔형으로 된 지붕으로 인해 거대하고 텅 빈 콜로세움 같은 느낌이 나는 본회의장이 드러났다. 그 거대한 공간의 천장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고, 3층 정도 되는 공간의 층마다 빨간 쿠션이 놓인 의석이 좌우로 정렬되어 있었다.
그곳에 가장 먼저 들어가 선 것은 군인들이었다.
홀에 모여 있던 국회의원들은 모두 그 자리에 선 채 홀로 들어서는 레트니를 향해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고, 엘리자베스와 로버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좌우로 갈라진 국회의원들의 중앙으로 레트니가 천천히 걸어왔다. 레트니는 예의 눈은 웃지 않고 입꼬리만 올리는 식으로 미소를 만들어 보였고 그 미소로 앞만 보며 걸었다. 그 뒤를 10명 정도의 사제들과 군인이 따랐다.
레트니는 나무문 앞까지 천천히 걸어가더니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몸은 그대로 둔 채 고개만 틀어 옆에 있던 시종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시종이 예의를 갖추곤 뒤로 물러나 엘리자베스에게 걸어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보았다.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친 케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 앞에선 시종이 말했다.
“폐하께서 엘리자베스 양을 모셔오길 원하십니다.”
엘리자베스는 레트니의 뒷모습을 힐끔 보았다. 그러고는 국왕이라는 작자의 영혼이 없는 얼굴을 떠올렸다. 다시는 대화하고 싶지 않은 상대였지만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상대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중을 따라 걸었다. 엘리자베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근위병 하나가 말했다.
“폐하께서 착석을 명하십니다.”
그 말에 신사들 역시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레트니는 나무문 안으로 들어가 거대한 광장 같은 공간에 마련된 총리의 자리 위에 설치된 왕좌에 앉았다. 엘리자베스는 신사들과 함께 본회의장 안으로 들어가 레트니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엘리자베스가 머리를 조아리자 레트니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들라.”
레트니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케이는 그 모습을 노려보며 멀찌감치 서 있었다. 레트니는 그런 케이도, 엘리자베스도 보지 않고 앞만 보며 왕좌에 기대듯 앉아 있었다. 레트니가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레트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대답을 망설였다. 어떻게 대답하는 게 예법에 맞을까. 귀족도 평민도 아닌 지금 엘리자베스는 어느 정도의 예의범절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인지를 정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레트니는 엘리자베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했다.
“너의 소식은 종종 들었다. 네가 하는 일은 레본의 미래를 밝히는 일이다. 알고 있느냐?”
레트니의 고저가 없는 말투 탓에 엘리자베스는 그것이 물음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채고 얼른 대답했다.
“모, 모두 폐하의 배려 덕분입니다.”
레트니는 엘리자베스의 대답이 퍽 맘에 든다는 듯이 입꼬리를 아주 살짝 더 올렸다. 엘리자베스가 하는 일은 사회전복적인 것이 아니라 국왕의 계획하에 이루어진 레본의 발전을 위한 공헌이라는, 그 말이 레트니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레트니의 관문 하나를 넘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레트니는 그렇게 잠깐 웃다가 다시 얼굴을 싹 굳히며 손을 뻗었다.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자 저 멀리서 시종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오려고 했다. 레트니는 그쪽을 보지도 않고 왼손으로 그를 저지한 후 말했다.
“저 선이 보이느냐.”
레트니의 물음에 엘리자베스는 의회 본회의장을 정확히 반으로 가르는 하얀 선을 보았다. 찰스 아이드가 의회주의와 동시에 정당 정치를 선포하며 만든 ‘공화파’와 ‘왕당파’가 서로 결투를 신청하기 위해서 서던 자리였다. 이제는 의회주의는 물론이요 정당 정치라는 것도 무색해졌지만 말이다.
레트니가 말했다.
“너는 어디에 서고 싶으냐. 선의 이쪽이냐, 저쪽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