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혼하러 돌아왔다 128화 (128/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28화

군인들은 엘리자베스와 케이 하커를 데리고 의회 청사 앞으로 갔다.

의회 청사 정문 앞에서 보니 의회 청사를 둘러싸고 지키는 병력, 그리고 문 앞에서 검문검색을 실시하는 병력을 모두 합치면 400명 정도인 듯싶었다. 평소 엘리자베스가 개회식을 보았을 때보다 훨씬 경비가 삼엄한 편이었지만 2만 군중이 모인 탓에 그 400명도 그저 한 줌으로 보였다.

물론 실제로 총을 든 군인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무기를 사용한다면 알 수 없는 싸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2만이라는 것은, 결코 그저 2만이 아니었다.

리오든 인구가 400만. 그 중 5푼이 움직였다. 이들의 가족, 친구, 연인은 얼마나 많을 것이며, 오늘은 오지 못했지만 마음만 보낸 이는 또 얼마나 될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2만은 20만일 수도, 200만일 수도, 이 수도의 귀족과 자본가를 제외한 모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광장에서 총탄이 발사되는 순간, 국왕은 그들을 등지게 될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무감한 표정의, 도무지 영혼이 어느 구석에 들어가 있는지 알 수 없었던 레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영혼이 없는 자이기에 더더욱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케이와 함께 검문검색 줄의 차례를 기다렸다. 곧 차례가 돌아오자 정문 바로 앞에서 검문검색을 받던 다른 의원들과 달리 엘리자베스와 케이는 의회 청사의 직원쯤으로 보이는 목 끝까지 올라오는 단정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 앞, 구석진 곳으로 안내되었다.

“재킷을 벗어주세요.”

직원의 말에 따라 케이와 엘리자베스는 웃옷을 벗었다. 두 사람의 옷은 군인의 손에 들려갔고, 군인은 재킷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양팔을 들어주세요.”

직원의 말에 따라 케이와 엘리자베스는 팔을 들었다. 그러자 케이의 몸을 군인이, 엘리자베스의 몸은 그 직원이 뒤지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아무리 여자라고는 하지만 그녀의 온몸을 만지는 손길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여자는 아무 감흥 없는 얼굴로 엘리자베스가 허리춤에 꽂아둔 총을 꺼내어 작은 상자에 집어넣었다.

케이의 몸에서는 잭나이프, 단도, 그리고 리볼버가 하나씩 나왔다. 군인은 그것을 엘리자베스의 총을 넣은 상자에 함께 넣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군인이 걸어와 말했다.

“이건…….”

군인은 엘리자베스에게 K. P. 라고 적힌 유리병과 머리핀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뒤에서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을 케이의 시선을 느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평소에 지병이 있어 먹을 약과…… 머리핀에 불과해요. 문제가 있나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군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군인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재킷에 병과 핀을 다시 집어넣고 재킷을 돌려주었다. 엘리자베스는 재킷을 입었다. 그러자 뒤에서 케이 역시 옷을 입으며 말했다.

“많이 보던 머리핀이네.”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명단에 서명하기 위해 걸어가며 케이 쪽은 일부러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물어볼 게 있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나중에. 조금 나중에 대답하지. 그때까진…….”

케이는 앞에 걸어가는 엘리자베스의 팔을 잡아 돌려세웠다. 그러곤 재킷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어 머리핀을 만지작거리던 엘리자베스의 손을 꺼내었다. 그녀의 손에서 머리핀을 빼앗아든 케이가 엉망으로 망가진 엘리자베스의 모자 밑 머리를 쓰다듬더니 머리핀을 그녀의 머리 위에 꽂아주었다.

“하고 있어. 보기 좋으니까.”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머뭇거리다가 케이의 어깨 뒤를 힐끔 보았다. 그러자 두 사람이 검문을 기다리는 내내 청사 앞 그늘에 서서 그들을 훔쳐보고 있던 윌리엄 조쉬가 씨익 웃으며 엘리자베스에게 인사했다.

“나도 반가워요.”

마치 엘리자베스가 먼저 인사라도 했다는 듯이. 그를 일부러 모른 체하고 있던 엘리자베스는 얼굴을 구겼다.

그때, 조쉬의 목소리에 케이가 돌아섰다. 그러자 조쉬가 톱햇을 벗어들고 신사답게 인사하며 말했다.

“부인께서는 좀 괜찮으신가요? 제가 어제 부인을 제대로 에스코트하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케이 씨.”

엘리자베스는 조쉬의 걱정 어린 표정을 보며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대체 어제 그 눈 깜빡할 사이에 조쉬는 정원에서 어디로 사라졌던 걸까. 그때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더 당겨왔다.

“부인께서는 괜찮습니다.”

케이가 단답으로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품 안으로 숨기는 듯이 굴자 조쉬는 재밌다는 듯이 살짝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나저나 당신이 엘리자베스 양의 보호자라니, 참 신기한 일이네요. 보호자는 보통 아버지나 남편, 남동생이 하는 일이죠. 파혼한 약혼자는 그 중 어디에도 들지 않구요.”

조쉬의 말에 케이는 눈썹을 꿈틀하며 말했다.

“엘리자베스의 인생에는 보통이라는 게 없는 편입니다, 윌리엄 경.”

그 말에는 어딘지 주인을 자랑스러워하는 충견 같은 감정이 담겨 있던지라 조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겠죠.”

조쉬는 묘한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본 케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조쉬의 입맞춤을 받아야 이 사태가 진정되겠다 싶어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쉬가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보니 남다르군요, 엘리자베스.”

조쉬는 그렇게 말하며 어딘지 모르게 여운이 남는 목소리로 말했다.

“행운을 빌어요.”

엘리자베스는 조쉬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

그러자 옆에서 케이가 분노가 담긴 숨소리로 코웃음을 쳤다. 그때였다.

“이쪽에서 서명해주세요.”

엘리자베스는 대화에 집중한 사이 자신의 차례가 돌아온 것을 알고 케이의 팔짱을 끼고 서명을 했다.

엘리자베스.

그녀는 아버지의 성도, 남편의 성도 없는 자신의 이름을 필기체로 적었다.

케이는 그 옆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이름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옆에 서 있던 군인들이 일사분란하게 총기를 위쪽으로 치켜들었기 때문이었다.

“국왕 폐하 드십니다!”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2만의 군중을 헤치고 등장하는 국왕의 마차가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국왕의 마차를 보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서명을 마친 윌리엄 조쉬가 케이와 엘리자베스 옆에 서서 톱햇을 벗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이 와중에 뚜껑이 없는 마차라. 역시 대단한 분입니다, 우리의 폐하께서는.”

윌리엄 조쉬의 다정한 목소리에 케이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케이 역시 조쉬의 말에 대답할 겨를이 없는 듯 국왕의 등장을 주시했다.

그랬다. 국왕의 마차는 넓적하고 화려한 뚜껑이 없는 마차였다.

국왕은 퍼레이드 때 쓰는 금관을 쓰고 봉까지 들고 점박이가 박힌 망토까지 두르고 있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마차의 말은 누가 봐도 뛰어난 종마였으며, 그 종마 옆을 걷는 국왕의 군대는 모두 빨간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군대의 숫자는 정확하진 않지만 적어도 400명. 의회 청사 앞을 지키는 숫자와 비슷했다.

그들의 숫자는 물론이요, 그들의 분위기가 풍겨내는 위압감 속에서 군중이 길을 텄다. 군대는 오와 열을 맞추어 걸었고, 군인들이 지키는 바깥 경비선 안으로는 사제들이 걸었다. 그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십자가를 들고 성수를 뿌리며 국왕의 마차가 가는 길을 축복했다.

엄청난 숫자였고, 엄청난 화려함이었다. 마치 나라에 큰 축제라도 생긴 것 같은 퍼레이드였다.

엘리자베스는 그 거대한 국왕의 행렬이 지나갈 때마다 갈라졌다가 다시 모여드는 인간의 파도를 보았다. 그들은 물론 구호를 멈추지 않았다.

“종교와 정치의 자유를!”

“우리에게 미래를 달라!”

“우리는 하나다!”

그 위협적이고 사회전복적인 구호 속에서도 레트니는 이 멀리에서도 볼 수 있도록 마차에서 몸을 일으켜 백성들에게 손 인사를 했다. 손바닥을 보이지 않으며 허공을 우아하게 젓는 레트니의 손짓은 의회 청사의 모두가 내려다볼 수 있었다.

실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국왕의 목을 자르자고 외치는 이들을 가르고 나타난 레트니는 이 사람들을 모두 자신의 지지자인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물론 레트니의 이 행동은 결코 화해나 화합의 의미가 아니었다. 이것은 그러니까 이런 것이었다.

네까짓 것들이.

레트니의 행동이 주는 의미는 모두에게 전파되었다.

국왕의 행렬이 멈춰서고 국왕이 바닥을 밟기 전 카펫이 깔리자, 군인들의 경비선 바깥에 선 시위대는 모두 뭔가 위축되고 두려운 표정이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조쉬의 말대로 ‘우리의 폐하’가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를 실감했다.

레트니는 지금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네까짓 것들이 2만이 아니라 20만이, 아니, 200만이 모이더라도 레본은 절대로 전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엘리자베스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카펫이 깔리자 옆에서 말을 타고 달리던 누군가가 말을 세웠다. 국왕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그 누군가가 에스코트하듯 손을 잡아 내려주었다. 국왕이 걷기 시작하자 그 누군가 역시 함께 걸었다.

로버트 하커.

엘리자베스는 국왕을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로버트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국왕은 엘리자베스와 조쉬, 케이, 그리고 수많은 군인과 국회의원들이 멈춰서 있는 회랑 위로 천천히 올라오더니 멈춰 섰다. 로버트는 그로부터 세 발자국 쯤 전에 멈춰 섰다.

국왕이 뒤를 돌았다.

참으로 상징적인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레본의 살아 있는 태양, 국왕과 그를 비호하는 군대와 종교인들, 그리고 레본의 위대한 사업가, 로버트 하커.

국왕이 군중들을 주시하며 섰다. 그러자 다시 또 우레 같은 시위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에게 미래를 달라.”

국왕은 그에 화답하듯 또다시 손을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쏟아지는 햇빛을 맞으며 환하게 웃는 레트니를 보았다.

그것은 미소이지만, 미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미래를 달라.”

대답이었다.

레트니는 자신이 저들의 미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살아 있는 태양이자 살아있는 신을 영원히 모시는 것이 바로 레본의 미래이다. 레트니는 자신의 온몸으로 그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레트니의 영혼 없는 미소가 무서웠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살짝 떨려오자 케이가 그녀의 손을 깍지껴 잡았다. 케이가 말했다.

“레트니는 지고 말 거야. 반드시.”

케이의 말에 조쉬가 피식 웃었다.

“그럴 겁니다. 그 방식이 문제겠지만.”

조쉬는 그렇게 대답하더니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조쉬가 들어가는 것을 가만히 보던 케이가 떨고 있는 엘리자베스를 잡아 당겼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케이를 따라 의회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