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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27화 (127/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27화

두 사람이 서로의 뺨에 기대어서 숨을 몰아쉬는 사이에 마차가 멈춰섰다. 토비가 마차 창문을 두드렸다.

똑똑—

케이가 자신의 목덜미에 안긴 엘리자베스가 움찔하는 것을 느끼더니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대로 있어.”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더 꽉 제 품에 안았다. 그리고 창문을 살짝 열었다. 토비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의회 청사 앞이 난리예요. 어디쯤까지 가서 세워야 할지.”

토비의 말보다도 마차 창문을 열자 밖에서 들려오는 아우성 소리에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팔을 꽉 쥐었다.

“우리에게 미래를 달라!”

2만 명이 하나가 된 듯 내는 목소리였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팔을 쥐자 케이가 옅은 신음을 흘렸다.

케이가 말했다.

“시계 첨탑 뒤쪽 골목은?”

“그쪽으로 가려면 지금 말머리를 돌려야 해요. 그쪽 길이 뚫려 있을지도…… 읏!”

토비는 앞에 있는 군중들에게 길이 막힌 듯 곤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이어 토비의 성난 외침이 들려왔다.

“이봐요! 위험하다구요!”

케이가 차창을 조금 더 열더니 밖의 상황을 보았다. 그러더니 품 안에서 동전 꾸러미를 꺼내 토비에게 내밀었다.

“덩치가 큰 놈들은 시위대가 아니라 협잡꾼이야. 마차를 막아서서 돈을 뜯어내려는 거니 그냥 줘버려.”

케이의 말에 토비가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들이 길을 트면 바로 말머리를 돌려. 시계 첨탑 뒤쪽 골목으로 간다, 토비.”

“네, 도련님!”

토비의 대답과 동시에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었다. 케이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팔에 났던 상처. 관리하고 있는 거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려주다가 멈칫했다. 케이는 뭔가를 물어보고 싶은 듯 엘리자베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대답했다.

“거의 나았어.”

“나았다고?”

그렇게 쉽게 나을 상처가 아닌 것 같았는데. 엘리자베스가 당장 상처를 보자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안았던 손을 풀어내더니 제 품 안을 뒤졌다.

그러곤 엘리자베스에게 작은 약병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안에 든 약을 보고 케이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케이가 말했다.

“로킨트 저택에 갔더니 케빈 퍼킨이 기다리고 있더군. 총격 사건 얘기를 들었다고, 기숙사로 돌아오지 않길래 왔다고 했어. 이걸 전해달라고 말이야.”

케이가 내민 약병을 받아든 엘리자베스가 이를 악물었다.

케빈…….

익숙한 약병에는 K.P.라고 적혀 있었다.

케이가 말을 이었다.

“나를 무슨 집안의 원수라도 보듯이 보던걸. 두통이 심했어? 그 어린놈 말로는 네가 두통이 너무 심해서 만들어달라고 한 약이라고. 전보다 더 효과가 있을 거라고 전하라던데.”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들으며 이 익숙한 약병 속 약이 엘리자베스의 이지 상실을 막기 위해 만들었던 저번 약의 효능을 개선한 신약이라는 것을 알았다.

엘리자베스는 약병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그 감촉이 주는 뜨거운 감정들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것을 담담하게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또 전할 말은?”

“없어.”

“있는데 숨기는 거 아니지?”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흘겨보자 케이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모르지.”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그 순간, 마차가 서는 것을 느끼며 제 옆의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시계 첨탑 아래에 모여 있는 수많은 군중이 그녀의 시야에 한 번에 들어왔다. 케이가 창문을 닫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끌어당겨 자신을 보게 만들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부턴 내 손을 놓치면 안 돼. 절대 뒤를 돌아보아서도, 오랫동안 한 곳을 바라보아도 안 돼.”

“왜?”

엘리자베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에 깍지를 끼며 대답했다.

“이건, 네 안전을 위한 거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 역시 네 안전을 위한 거고, 오랫동안 한 곳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도 네 안전을 위한 거야. 누군가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면 너는 거기에 휘말리게 되는 거고, 오랫동안 한 곳을 바라보면 타블로이드지가 네 모든 행동에 의미를 부여할 거니까.”

케이는 그렇게 말하곤 엘리자베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케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건 나를 위한 거였어.”

케이는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마차 문을 열었다.

펑! 펑! 펑!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가 쉼 없이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섬광을 쫓아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의회 청사 외벽에 있는 조각상들 위에 올라탄 기자들이 보였다.

기자들이 거기에 매달려 서서 곡예를 펼치는 이유가 있었다. 골목길과 큰길은 전부 군중들로 가득했고 사람들의 피부에서 흘러나오는 열기로 인해 한여름 대낮처럼 바깥이 후끈거렸다.

케이는 마부석에서 뛰어내린 토비에게 뭔가를 중얼거리곤 토비의 톱햇을 빼앗았다. 그리고 군중의 숫자에 압도된 엘리자베스에게 손짓했다.

‘뛰어 내려.’

케이의 입모양을 본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품 안으로 뛰어들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선물 상자처럼 꼭 안아들었다. 그러곤 토비에게서 빼앗은 톱햇을 깊숙이 씌우며 자신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자신의 허리춤으로 옮기고 자신의 허리춤을 잡은 그녀의 손에 다시 손깍지를 꼈다.

“더 꽉 안아. 내 말 잊지 마.”

“네 손 놓지 않고, 뒤도 돌지 않고, 한 곳을 오래 보지도 않을 거야.”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재킷을 꽉 쥐고 웅얼거리자 케이가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잘 하네.”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품 안에 쏙 안긴 채로 자신이 어디로 휩쓸려 가는지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두 사람이 걷는 길에는 크고 작은 파도들이 있었다. 그 파도들은 어떤 여성이 에밀리의 석방을 외치면 그 앞에서 잠시 멈춰서기도 했고, 이교도들과 노동자들의 파도가 부딪혀 서로 곤란해하기도 했고, 8살이나 9살 정도의 어린 노동자들의 파도가 줄을 서서 지나가는 바람에 어른들이 낄낄거리며 그 앞에서 휘파람을 불며 길을 터주기도 했다.

파도들은 거칠고 거셌지만 왜인지 모르게 조화로웠다. 엘리자베스는 파도들이 내는 긴 바다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리오든에서 핍박받는 그 누구든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더 이쪽으로 모이십쇼! 모이면 모일수록 힘이 커지는 겁니다! 우리에게 종교와 정치의 자유를!”

첨탑 위에 올라간 연사가 하는 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연사의 목소리를 듣는 바람에 그 순간에 어쩔 도리 없이 첨탑 위를 보았다.

쨍한 햇빛이 엘리자베스의 눈을 파고들어왔다.

엘리자베스는 강한 매혹을 느끼며 첨탑 앞에 모여든 인간의 파도를 보았다.

펑!

그 순간 플래시 소리가 들려왔다.

‘절대 한 곳을 오랫동안 바라보지 마.’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떠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에서야 케이의 말이 또 떠올랐다.

‘절대 뒤를 돌지 마.’

“엘리자베스다! 공녀야!”

“여성 과학자다! 저희 신문하고 인터뷰 한번 해주세요!”

순식간이었다. 기자들이 엘리자베스를 지목하자마자 시위대가 엘리자베스와 케이 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케이의 손을 꽉 쥐었다.

‘절대 내 손을 놓지 마.’

엘리자베스는 마지막 말만큼은 꼭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케이의 손을 간절하게 잡았다. 케이는 순식간에 두 사람에게 달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엘리자베스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는 엘리자베스가 헉헉거릴 정도로 빠른 걸음으로 몰려드는 인파를 뚫고 의회 청사 외벽 건물로 붙었다. 그러고는 엘리자베스를 청사 외벽에서 청사 정문으로 이어지는 작은 돌난간 위로 올렸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손이 떨어졌다. 엘리자베스가 겁에 질린 눈으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기자들과 시위대를 보았다. 그러자 케이가 외쳤다.

“가! 뒤돌지 말고 가!”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뒤를 돌지 않고 앞을 보았다. 엘리자베스의 다리 위로 보이는 새까만 시위대의 머리들에는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자꾸만 시위대의 외침이 들려왔다.

“우리에게 미래를 달라!”

엘리자베스는 아슬아슬하게 돌난간의 끄트머리까지 갔다. 모서리만 돌면 정문 회랑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구겼다.

무서워.

도망가고 싶어.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난간 모서리에 섰다.

그때였다.

정문 회랑 끄트머리에서 손이 내밀어졌다. 엘리자베스가 놀란 눈으로 손을 내민 자를 보았다.

“케이.”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올려놓고 저 아래로 인파를 헤집고 어느새 정문 회랑까지 왔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고 말았다. 케이는 주춤거리는 엘리자베스를 종용했다.

“내 손 놓지 말라고 했잖아.”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일은 너를 죽여버리더라도,

오늘은.

오늘은 너를 꼭 붙들어야겠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을 잡고 폴짝 뛰었다. 엘리자베스가 휘청이자 케이가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두 사람이 정문 회랑 위에서 아래를 보았다. 장관이었다.

사람이 만든 바다가 거기에 있었다.

“참정권을 보장하라!”

“신도 주인도 없다!”

“종교의 자유를 달라!”

엘리자베스는 침을 꿀꺽 삼키며 회랑과 시계 첨탑 중간에 놓인 찰스 아이드의 동상을 보았다. 목이 잘린 찰스 아이드의 동상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을 꽉 쥐고 물었다.

“이제 어떡하지……?”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이가 오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살아남아야지. 우리도, 저들도.”

“살아남는다고…….”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회랑 저편에서 걸어오기 시작한 왕의 군인들을 보았다.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가 말했다.

“그래야 뭐든지 할 수 있지.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케이의 건방지고 냉소적인 대답이 이상하게 엘리자베스의 거세게 뛰던 심장을 안정시켰다.

지금 엘리자베스가, 이 2만 명의 군중이 뭔가를 한다고 변하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는 그 단순한 명제가 그녀에게 뭐든 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소총으로 두 사람을 저격하는 군인 둘과, 두 사람에게 걸어오는 군인을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긴장한 얼굴로 군인들과 눈을 맞췄다. 가까이 온 군인이 말했다.

“신분 확인이 있겠습니다. 성함이…….”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엘리자베스.”

그래, 이제 나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가 아니라 엘리자베스니까.

최초의 여자 평민 과학자.

그게 나니까.

엘리자베스가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평민원 추천인, 엘리자베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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