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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26화 (126/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26화

또다.

엘리자베스는 익숙한 갈증과 어지러움, 그리고 토기를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이미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오는 것으로 보았을 땐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3층에 있는 메이드룸 창문 너머로 여전히 컬로든 궁 앞에 운집해 있는 군중을 보았다.

꿈속에서 엘리자베스에게 가짜 과학자, 가짜 평민이라고 외치던 이들은 이제 막 궁 앞에서 의회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지만 곧 개회식이 시작되면 국왕이 저 궁을 나와 의회 청사 앞까지 퍼레이드를 할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궁 앞에서 의회 청사까지 가는 길목에 그 누구의 피도 흐르지 않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다.

엘리자베스의 신은 진보였다. 이 세상이 변화한다는 믿음.

얼마 전부터 엘리자베스에게 깃든 유일한 믿음은 그것이었다. 다만 그 진보의 과정 속에 죽어가는 것은, 피를 흘리는 것은, 오롯이 자신이기를.

엘리자베스는 구도의 마음으로 옷을 꺼냈다. 어젯밤 앰버의 옷장에서 꺼낸 단정한 검은 투피스였다.

엘리자베스는 발목을 드러내는 검은 치마에 위에는 셔츠와 조끼, 그리고 재킷을 입었다. 마무리는 남성용 톱햇에 모자 높이만 약간 낮춘 듯한 묘한 느낌의 모자로 했다.

거울 속의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부조화 속에 있었다.

평민도, 귀족도 아닌 여자.

여성이지만 과학자인 사람.

신의 가루를 만들었지만 신도 인간도 아닌 괴물.

엘리자베스는 그런 스스로를 거울 속에 신중하게 비춰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스스로의 부조화를 약간 맘에 들어 하는 경지에 올라있었다.

옷을 다 입은 엘리자베스가 1층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채비를 한 앰버와 에드워드가 서 있었다.

앰버는 이 상황이 두렵기보다는 설레는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며 리볼버 실린더를 살피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내려오는 것을 본 그녀는 리볼버 약실을 집어넣고 치마 슬릿을 들쳐 가터벨트 가죽에 리볼버를 익숙하게 고정시켰다.

그러곤 엘리자베스에게는 신발장 위에 올려둔 리볼버를 내밀었다. 두 사람이 들고 있던 것보다 크고 두꺼운 것이었다.

“어차피 의회 안에 진입하기 전에는 빼앗기게 되겠지만 들어가기 전, 나온 후에 혹시 모르니까 하나는 있어야죠. 무겁긴 해도 이게 나아요. 명중률이 높거든요. 하나만 기억해요. 목표물을 정조준하기 전까지는 방아쇠에 손도 대지 말아요.”

앰버가 내미는 리볼버를 받아든 엘리자베스는 묵직한 감각에 의해 뒤로 밀려났다. 그것은 엘리자베스가 겨우 그 정도 무게도 이기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될 변화의 파도에 대한 불안감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리볼버를 꽉 쥐고 앰버가 담배를 문 채 가르쳐주는 곳을 몇 번 만지작거렸다.

엘리자베스가 총을 쏴 본 것은 딱 한 번뿐이다.

딱 한 번.

몰록을 향해서.

그러니 이번에 엘리자베스가 총을 쏜다면 그것이 엘리자베스가 인간을 쏘는 처음이 될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본 에드워드가 짐짓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에드워드는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내밀며 말했다.

“사진 잘 나왔던데요.”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내미는 신문을 보기 위해 총을 신발장 위에 내려놓았다.

거기엔 익숙한 사진이 있었다. 3개월 전 컬로든 궁 앞에서 찍혔던 엘리자베스가 아이를 안은 사진이었다. 그 위에는 커다란 헤드라인이 적혀 있었다.

[신의 가루를 만들어낸 여성 과학자, 국회의원 되나?]

엘리자베스는 신발장 앞에 놓인 다른 신문들도 보았다. 다 비슷한 헤드라인에 같은 사진이었다.

“……이건.”

엘리자베스의 말에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케이 짓이죠.”

에드워드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신문을 쥐고 오랫동안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에드워드가 말했다.

“안전장치 같은 거예요. 덕분에 지금 궁 앞에 2만 명이 운집했다는데요. 3개월 전의 딱 2배의 숫자죠. 케이가 분주히 움직인 덕에 우리의 호위는 큰 필요 없겠어요. 이들이, 엘리자베스의 호위가 될 테니까요.”

에드워드는 그렇게 말하며 신문에 찍힌 수많은 군중을 가리켰다. 그때의 1만이, 2만이 되어 엘리자베스를 지키게 된 것이다.

이로써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가 새벽 동안에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는지 알게 되었다.

“우린 몰라도 엘리자베스는 분명 후세에 이름을 알리게 될 거예요.”

앰버는 엘리자베스가 신문을 살피는 것을 보며 장난스레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에 고개를 들어 앰버를 힐끔 보았다.

여자의 이름을 역사는 기억하지 않는다, 던 엘리자베스의 말은 또 이렇게 손쉽게 깨졌다.

그래. 어쩌면 이것은 이미 진보의 시작인지도 몰랐다.

엘리자베스는 신문을 내려놓고 앰버가 준 총을 집어들었다. 약실을 빼서 그 안에 들어 있는 5개의 탄환을 살폈다.

그녀의 손이 벌벌 떨려오는 것이 엘리자베스의 눈은 물론 앰버와 에드워드의 눈에도 보였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이미 들켰다고 해도 최대한 침착해 보이는 움직임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말했다.

“그럼 갈까요?”

엘리자베스가 말하자 앰버가 부드럽게 웃으며 에드워드의 팔짱을 꼈다. 얼굴이 빨개진 에드워드가 앰버를 에스코트해서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동이 터오고 있는 레트니 애비뉴는 온통 주황빛으로 가득했다.

세 사람이 정원의 중반쯤을 건넜을 때, 엘리자베스는 걸음을 멈췄다. 대문 근처에 서 있는 검은 재킷 차림의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눈이 앰버와 마주쳤다. 앰버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그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대문에 몸을 기대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 풀어헤쳐진 셔츠, 그리고 여명을 품은 탁한 눈동자.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 안에는 앰버가 주었던 루비 머리핀이 들어 있었다. 앰버에게 주지도, 자신이 하지도 못한 머리핀을 엘리자베스는 기도문처럼 그냥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친 케이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타.”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그제야 대로변에 세워진 마차를 보았다. 마부석엔 토비가 앉아 있었다. 토비가 엘리자베스에게 눈으로 인사를 했다.

케이가 서 있는 레트니 애비뉴는 어젯밤, 사교 모임에 가기 위해 모여들었던 귀족들, 젠트리들, 그리고 그들을 규탄하기 위해 모인 시위대로 북적거리던 것과는 상반되게 텅텅 비어 있었다.

귀족들은 어제 있던 총격 사건의 여파로 꽁무니를 감췄을 것이고, 젠트리들은 뜯어먹을 귀족들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시위대는 모두 궁 앞으로 모였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텅 빈 도로로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그녀가 앰버와 에드워드를 돌아보자 앰버가 에드워드의 팔을 꽉 쥐고 말했다.

“우린 뒤따라 가며 엄호할게요.”

앰버는 그렇게 말하더니 얼른 뒤를 돌았다. 에드워드는 한 박자 늦게 앰버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두 사람이 마구간 근처로 사라지자 케이는 마차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타지.”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내민 거친 손을 잡았다. 케이에게선 여전히 기계와 기름 냄새가 났다.

요란스럽고 대단한 나의 구원자.

엘리자베스는 그가 자신의 연인이나 남편이 될 수 없다고 해도 여전히 자신을 변화시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아귀 힘에 끌려 마차 위에 올라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태우고 함께 마차에 탄 뒤에 마부석을 향해 말했다.

“앰버와 에드워드가 준비되면 솔치노 쪽으로 돌아서 의회 청사로 가. 시위대랑 부딪히지 않을 도로를 통해서 가야 된다. 할 수 있겠나, 토비?”

케이의 말에 토비가 긴장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요!”

이내 대문 안에서 슬슬 움직이는 두 사람의 마차가 보였다. 토비는 천천히 말머리를 돌리더니 마부석에 앉은 에드워드에게 손짓했다. 에드워드가 마주 손짓하자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케이는 마부석의 창문을 닫고, 엘리자베스와 케이 쪽으로 나 있는 차창 역시 닫았다.

엘리자베스는 덜컹거리기 시작하는 마차 안에서 케이를 보며 물었다.

“내가 미워?”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이의 얼굴이 굳었다. 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언제나. 널 만나고 네가 밉지 않은 적은 없었어.”

케이는 약간 쉰 목소리로 말을 마치곤 마차 벽에 몸을 기댔다. 케이는 눈을 감고 눈꺼풀 위를 매만지며 말했다.

“내가 의회 청사 안까지 너를 에스코트할 거야. 여성 국회의원은 보호자를 동반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나를 네 보호자로 신청할 거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 안에 들어 있는 리볼버를 만지작거렸다.

그때였다. 케이가 순식간에 리볼버를 만지작거리던 엘리자베스의 손목을 잡아챈 것은.

엘리자베스의 손목을 움켜쥔 케이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총을 꺼낼 마음이 아니라면 총을 만지작거리지도 마. 그건 내 패를 전부 보여주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눈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에게 잡힌 엘리자베스의 손이 다시 덜덜 떨려왔다. 그러자 거친 숨을 내뱉던 케이가 그 손을 보았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천천히 손목을 쥐었던 손을 내려 엘리자베스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

“흐윽…….”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숨을 토해내며 케이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지 않은 쪽 손으로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감싸쥐고,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어깨에 더 파고들 수 있도록 안았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도망가고 싶으면 말해. 당장이라도…….”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일 때였다. 어쩌다 시위대와 마차가 가까워진 것인지, 마차 벽 너머로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정치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라!”

“찰스 아이드를 다시 의회로!”

“여성 과학자가 국회의원이 되도록 투표해!”

그들의 거친 목소리 속에서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더 꽉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널 데리고 레본을 떠나줄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듣는 순간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녀는 흐느끼듯이 말했다.

“2만 명이 있어……. 저 밖에 2만명이…… 네 사람들이잖아.”

“네 사람들이지. 그리고 그게 누구의 사람들이건, 그게 2만이 아니라 20만이건, 네가 원하면 다 두고 도망가게 해줄 거야.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너를 꽁꽁 묶어 납치해줄 테니까. 그러면 그들을 버린 건 나인 거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나 하나겠지.”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더 세게 케이의 재킷 자락을 쥐었다.

아니야, 케이 하커.

나는 이미 지옥행 티켓을 사놨으니까. 너를 지옥에서 만난다면 그건 반가운 일이겠지만, 감히 그것을 바라지는 말아야겠지.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목덜미에 아주 짧게 입을 맞추었다.

지금 그녀가 감히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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