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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25화 (125/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25화

엘리자베스의 말을 듣자마자 케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케이는 눈 깜짝할 새에 엘리자베스의 앞으로 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분노한 눈으로 말했다.

“제정신이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듣는 순간에 무도회에서 자신이 까마귀에게 했던 말과 그에 대한 까마귀의 대답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대답 앞에서 얼굴을 구겼다. 케이의 얼굴 근육이 분노로 뒤틀리는 게 엘리자베스의 눈에 생생하게 보였다. 케이는 앙 다문 턱 사이로 거친 음성을 뱉었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나 알아?”

“……당장 국왕이 나를 죽일 순 없을 거야. 밖에 구름떼처럼 모여든 시위꾼들 못 봤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시위꾼들을 쓸어버리려고 모여드는 보비들은 못 봤나 보지. 시위꾼들은 끽해봐야 돌멩이와 유리병을 들고 있지만 보비들은 총을 들고 있어. 귀족 아가씨.”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자신을 귀족 아가씨라고 부르는 케이의 말에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얄미운 녀석을 어떡하면 좋을까. 엘리자베스는 당장 케이의 얼굴을 주먹으로 박살내고 싶은 것을 참으며 말했다.

“……총알은 밖에서 날아온 게 아니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머리를 헝클이며 대답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봤으니까. 나의 눈은 이제 나의 눈이 아니라 괴물의 눈이니까.

엘리자베스는 목구멍으로 새어나오는 문장들을 가까스로 눌렀다.

국왕은 절대 엘리자베스를 죽일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이제 3개월 후면 완벽한 괴물이 될 거고 괴물은 보비들의 총 따위에 쉽게 죽지 않는다. 그러니 계획을 망치다 못해 여기 있는 모두의 목숨을 위험하게 할 수도 있는 내부인이 아니라 엘리자베스를 의회에 데려가야 한다.

엘리자베스는 침통한 표정의 앰버와 에드워드를 번갈아보았다. 그러고는 핏물이 옅게 물든 자신의 수술용 앞치마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관통상의 방향과 탄환 종류로 추정했어. 지금 내가 에드워드를 쏜다면.”

엘리자베스는 오른 팔을 들어 피가 고였던 근처에 서 있는 에드워드를 두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에드워드는 흠칫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엘리자베스는 흔들림 없이 응접실과 계단, 그리고 식사실 사이에 있는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환자의 대퇴부 관통상 사입공은 앞쪽. 열려 있었던 문은 뒷문과 현관까지 포함해서 총 5방향이지만 사입공의 방향을 생각하면 가능한 창문 방향은 이곳뿐이야.”

엘리자베스는 창문 앞에서 에드워드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에드워드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번쩍 들며 물었다.

“사입공이 뭐죠?”

“총알의 통과가 시작되는 공동이에요. 사입공은 사출공에 비해 상처가 깨끗한 편이죠.”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에드워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케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서 총상을 치료해봤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의문에 답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말리면 끝장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지금 케이를 설득할 패를 여러 개 갖고 있지 않았다.

“총알의 종류는 9mm 탄환. 아루쉬는 권총에 들어가는 탄환이라고 했고, 그러니 사거리는 끽해봐야 100m도 안 돼. 그런데 관통상의 방향을 보았을 때 그렇게 위에서 쏘지도 않았던 데다가 여긴 레트니 애비뉴 2번지야. 다른 건물은 저쪽에 없어. 정원 밖에서,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똑바로 서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표적을 맞췄다는 건.”

엘리자베스가 펑, 소리를 내며 에드워드를 손가락 총으로 쏘았다. 그러자 에드워드의 표정이 굳었다. 에드워드가 앰버를 보았다.

앰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부에서 한 짓이든지, 아니면 내부에 조력자가 있었든지 둘 중 하나겠네요.”

앰버의 말에 신발장을 발로 세게 찬 케이가 앰버를 노려보았다.

“그래. 잘들 하는군. 이젠 우리 귀족 아가씨께까지 조력을 요청하는 신세라니.”

케이는 앰버를 보던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마주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서. 나보다 나은 대안이라도 있어? 모두의 목숨이 걸린 일이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피식 웃었다. 케이의 얼굴에는 이제 분노 대신에 엘리자베스가 익히 보았던 체념이 짙게 깔려 들어갔다.

케이는 삐뚤어진 미소도, 오만한 태도도, 거친 목소리도 갖추지 않았다. 다만 켄드릭 앞에 서서 피를 흘리던 그때처럼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없어.”

“케이…….”

엘리자베스는 그 표정을 만든 게 자신이라는 생각에 속이 울렁거렸다.

나를 버리고 간 주제에, 나와 파혼하고 다른 사람과 약혼한 주제에, 케이 하커는 어떻게 엘리자베스 앞에서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걸까.

마치 엘리자베스가 케이 하커를 철저하게 무너뜨려 굴복시킨 것 같은 표정을. 나를 망가뜨리고 갈갈이 찢어놓은 것은 너야,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어떻게 그런 표정을 나를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는 개자식이 지을 수 있는 걸까.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손을 뻗었다.

케이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다만 목 안에 무언가가 심어져 있는 것 같은, 어떤 거대한 불행의 씨앗을 품은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목숨이 문제라면 나도 너처럼 우겨봤겠지만, 그래. 네 말대로 이건 모두의 목숨이 달렸으니까 그럴 수 없지.”

“내 말은…….”

“그걸 알고도 감히 내 앞에서 너를 가지고 협박하는 너를 내가 어떻게 하겠어.”

그는 응접실로 뚜벅뚜벅 걸어가 내팽개쳐둔 외투를 집어 들고 에드워드에게 이렇게 말한 뒤 2층으로 올라갔을 뿐이었다.

“멋대로들 해. 나는 프란시스 저 여자를 깨워서 로킨트에 데려다 놔야겠으니까.”

케이는 다시 삐뚜름한 얼굴을 장착하고 앰버를 노려보았다.

“난장판을 치든 수습을 하든 맘대로들 하라고.”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거친 폭풍처럼 자신의 옆을 스쳐지나가는 것을 어쩔 도리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 * *

지금까지는 엘리자베스가 앰버의 가정교사였다면, 그날 밤부터 새벽까지는 앰버가 엘리자베스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개회식에는 국왕이 올 때도 있고 안 올 때도 있어요. 이때까지 레트니는 한 번도 의회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죠. 레트니 클레몬트는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의회주의 철폐의 강력한 지지자이고, 총리를 우습게 아니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관심을 끌기 위해서 반드시 등장할 겁니다.”

케이는 2층에서 프란시스를 돌보던 아루쉬까지 데리고 로킨트로 떠났다. 그 후 새벽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앰버는 아마 의회 청사 앞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꾸만 케이의 체념한 얼굴이, 그리고 마지막에 엘리자베스에게 나지막이 말하던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복잡한 머릿속으로도 앰버가 줄줄이 읊는 수많은 의회와 관련된 정보를 어떻게든 습득하려고 노력했다.

앰버와 에드워드는 엘리자베스가 할 일은 그저 3명의 추천인 국회의원이 귀족원의 투표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서서 조용히 선서를 하고, 또 선서를 마치고 투표 결과가 8할의 동의를 얻지 못하게 되면 미리 준비한 마차를 타고 다시 로킨트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라고 했다. 물론 혹시 과격한 군중이나 왕실 쪽 사람에게 변고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지만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변고’ 쪽이라면 오히려 아무런 걱정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앰버는 그것이 제일 걱정되는 듯 의회 청사의 퇴로를 가장 열심히 설명해줬다.

앰버는 철저하게 퇴로를 교육시키면서도 때때로 엘리자베스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찰스 아이드 사태 이후로는 의회 청사에서 일어나는 소요 사태에 다들 대비하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귀족이든, 사업가든, 근위병이든 다들 무기류 소지가 불가능하고 국왕의 군대가 감히 국회의원 후보를 노리면 지금 분위기로는 내전도 가능하니까요.”

찰스 아이드.

그것은 약 150년 전 찰스라는 자가 일으킨 의회주의 혁명을 말하는 것이었다.

레본은 지금 이오페아에서 가장 왕정이 강력한 나라였지만 우습게도 지금의 레본이 가장 화려한 산업의 전성기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은 한때 철저한 의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였던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교도를 박해하던 이오페아 전체적인 분위기 탓에 레본에도 이교도와 신교도들이 함께 숨어들어 생활했는데, 그때 찰스 아이드라고 불리는 한낱 ‘기사’가 신교와 구교의 충돌을 빌미로 일어난 내전에서 승기를 잡고 왕의 목을 자른 일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찰스 아이드는 신교도와 이교도들의 신이었으며 왕의 목을 자르자마자 종교와 참정권의 자유를 선언하며 의회주의 개혁을 일으켰다.

그때 그 개혁의 바람에서 참수된 왕이 바로 레트니의 증조부였다. 레트니의 증조부는 의회 청사 앞에 있는 거대한 시계 첨탑 앞에서 군중들의 수많은 환호를 들으며 목이 잘렸고, 국왕의 목이 잘린 곳에는 찰스 아이드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러나 우습게도 종교와 정치의 자유를 옹호하던 찰스 아이드는 막상 의회를 장악하고 권력을 갖게 되자 군부를 이용해 독재를 하려 했고, 자신의 동상 앞에서 목이 잘렸다. 찰스 아이드가 국왕의 목을 자르고 겨우 5개월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 5개월 동안 수많은 종교와 정치 박해를 받던 이들이 레본으로 이주했고 그들의 신문물과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생각들은 레본에 뿌리내렸다. 그 뒤로 레트니의 조부로부터 레트니까지 이어져온 왕정복고의 움직임 속에서도 그들의 신문물과 개혁적인 사고는 레본을 부흥시켰고 레본이 대항해 시대를 통해 대륙의 패권을 쥐는 데 성공하도록 만들었다.

다만 찰스 아이드가 기틀을 닦아놓았던 의회주의는 축소되다 못해 거의 사라지게 된 사건으로 지금의 의회는 유명무실하다시피 했다.

그 일 이후 레본의 의회는 개회식 때 원래 식순에 들어 있던 국왕의 퍼레이드가 사라졌고, 대신에 의회 내내 국왕의 군대가 의회 청사를 철저하게 지키는 법이 만들어졌다.

앰버가 엘리자베스에게 보여준 의회 청사의 설계도를 보면 대부분의 출입구는 중앙, 그리고 정문으로 이어져 의회 청사는 마치 철옹성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만약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범인 색출이 용이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레트니가 아무리 엘리자베스를 미워한다고 해도 자신이 범인으로 몰릴 것이 분명한데 개회식 당일에 엘리자베스를 쏠 일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국왕은 엘리자베스를 갸흐통에 대항할 여성 과학자로 쓰고 싶어 하는 이가 아닌가.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앰버의 표정이 단호해 몇 번이나 앰버의 설명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서도 앰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오히려 제 쪽에서 앰버를 위안하고 또 위안해서 결국 잠자리에 들도록 했다.

그리고 그 밤, 엘리자베스는 꿈을 꿨다.

꿈속에는 디트리히 폰도, 엘우드 밀도 나오지 않았다.

꿈속에 나온 것은 실망한 표정의 케빈 퍼킨이었다.

케빈 퍼킨은 시계 첨탑 위에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의회 청사 앞, 이제는 잘려버린 찰스 아이드의 동상의 옆에 서서 케빈을 향해 외쳤다.

‘케빈! 내려와! 위험해!’

하지만 말은 목소리가 되지 못했다.

그때, 수많은 군중이 엘리자베스 쪽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저마다의 피켓을 들고 외쳤다.

[시간여행으로 손쉽게 학위를 얻은 가짜 과학자!]

[왕족이었던 주제에 어디서 국회의원이야! 가짜 평민!]

[꺼져라, 자본의 노예! 부교수 자리도 돈으로 사다니!]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목소리와 붉은 글씨들을 보며 어지러움을 느꼈다.

누가.

누가 날 좀 구해줘.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케빈이 품 안에서 총을 꺼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케빈은 첨탑 위에서 입모양으로 말했다.

‘죽어. 이 괴물.’

케빈이 방아쇠를 당겼다.

초록색 빛이 뿜어져 나오는 총알이 단숨에 엘리자베스에게 달려왔다. 하지만 우습게도 엘리자베스는 알고 있었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다. 이 죽음을.

‘하지만 그러면 영원히 괴물이 되겠지.’

엘리자베스는 죽음과 파멸의 갈림길에서 총알을 직시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때, 엘리자베스는 꿈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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