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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24화 (124/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24화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당장 뒷문으로 도망쳐. 귀족들이 도망치는 걸 봤으니 시위꾼들이 도로를 점거했을 거야.”

과연 케이의 말대로 벌써 정원 밖의 문 앞에는 촛불을 켠 사람들이 잔뜩 모여들어 있었다. 마부들의 험한 고성과 시위꾼들의 목소리가 얽혀 음성은 파도처럼 일렁였다.

“난 의사라니까.”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밀어내고 도망가지 않고 남아 있는 몇몇 귀족들에게로 걸어가려고 했지만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왔다. 그것은 로버트 하커와 윌리엄 조쉬, 그리고 프란시스였다. 프란시스는 기절했고 기절한 프란시스를 윌리엄 조쉬가 업고 걸어왔다. 로버트는 그런 윌리엄에게 친절하게도 문을 열어주었다.

엘리자베스는 로버트를 보고는 어떻게든 케이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케이 하커는 오히려 그녀를 더 제 품으로 끌어와 당길 뿐이었다. 로버트는 그런 두 사람을 보더니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케인으로 바닥을 짚고 말했다.

“네 어머니가 상태가 좀 불안정한 모양이야. 불쌍한 프란시스. 나랑 있는 걸 아직은 질색을 할 테니 날 밝을 때까진 여기서 보살피도록 해라. 나는 이만 가보마.”

로버트는 그렇게 말하더니 어느새 케이와 엘리자베스의 등 뒤에 와있는 앰버를 향해 톱햇을 벗어 인사했다. 로버트는 엘리자베스의 허리춤을 감싸쥔 케이를 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앰버에게 말했다.

“앰버 모건 양.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내 아들내미를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의회가 끝나면 식사라도 합시다.”

엘리자베스는 전생에서 케이와 친하게 지내는 앰버 플래스에 대해 로버트가 뱉었던 차마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말들을 떠올렸다.

로버트만큼 급변하는 이 세계에 잘 어울리는 이는 없을지도 몰랐다. 상황에 따라 면을 바꾸는 데에는 귀재였으니.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서는 로버트를 보다가 몸을 비틀어 케이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윌리엄에게 업혀온 프란시스의 턱 아래쪽에 손을 가져다댔다. 시간이 없었으므로 경동맥을 통해 10초 동안 맥박을 재고, 호흡을 확인했다. 앰버가 들고 있던 촛대를 이용해서 동공 반응도 확인했다.

엘리자베스는 손에 피가 잔뜩 묻은 앰버를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프란시스를 부탁해요. 그냥 옆에서 보고 있다가 숨이 막혀 하는 것 같으면 깨워서 일으켜 세우고 목이 마르다고 하면 물을 주면 돼요. 술, 담배 같은 거 옆에 두지 말구요. 위험한 것들도 치워줘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앰버를 스쳐지나가 총을 맞고 쓰러진 신사에게로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총상을 입은 남자에게로 걸어갈수록 짙어지는 피 냄새가 엘리자베스의 신경을 자극했다.

엘리자베스는 제 코를 잘라내고 싶은 기분으로 팔뚝 안 살로 코를 꽉 막고 점점 높아지는 피 냄새의 밀도 속으로 걸어갔다.

이미 도망칠 손님들은 다 도망친 후라 총상을 입은 남자 옆에 있는 이들은 몇이 안 됐다. 에드워드는 한쪽 구석에서 대통령 후보라고 하던 모건과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남아 있는 다른 이들은 보비를 불러라 의사에게 연락을 해라 우왕좌왕하는 중이었다.

단 한 사람, 새까만 피부를 가진 아루쉬라는 이국의 남자만이 바닥에 쇼크로 인해 대자로 뻗어버린 남자의 복부를 압박하며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아루쉬가 환부를 압박하여 출혈을 멈추게 하는 솜씨를 보며 아루쉬의 옆에 앉았다.

피 냄새가 지독하긴 했지만 아까처럼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피 냄새의 농도가 옅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엘리자베스의 이성은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었다.

케이 하커와 있을 때와는 달리.

엘리자베스는 환자를 돌보는 의사의 마음으로 돌아와 남자의 허벅지에 난 관통상의 크기가 상당하다는 것과 아루쉬가 재빨리 환부에 천을 채워 넣는 것을 보다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지혈대가 될 만한 것이 필요하다.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을 땐 아까는 그녀의 눈에 띄지 않았던 루이 니콜라스 교수가 제 몸에서 벨트를 풀어내는 중이었다. 엘리자베스와 루이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엘리자베스는 루이를 노려보다가 루이가 내미는 벨트를 받아들었다. 엘리자베스는 루이에게 하고 싶은 수많은 말들을 삼키고 아루쉬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뒤에서 루이의 말이 들려왔다.

“난 의사를 불러오겠다. 아마 내가 가는 게 가장 빨리 의사를 불러올 방법일 거다.”

루이의 말에 아루쉬가 고개를 들더니 벨트를 들고 있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어색한 레본어로 말했다.

“당신. 의사?”

엘리자베스는 아루쉬의 말에 잠시 망설였다. 의사라고?

엘리자베스는 스스로에게 다시 물었다. 하지만 이젠 의사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루쉬는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곤 엘리자베스에게서 벨트를 받아들고 남자의 허벅지 관통상 위쪽을 꽉 묶었다. 고통이 상당했던지 남자가 신음소리를 내었다.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정신이 되돌아왔을 때 그것을 붙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얼른 남자의 귓가에 속삭였다.

“정신 들어요? 이름이 뭐예요?”

그러자 남자가 중얼거렸다.

“젠장할……. 망할 놈의 시위꾼들…… 시위꾼들의 짓이지……. 엉? 젠장할……. 케이의 제안을 덥석 받는 게 아니었지…… 아니었어…….”

남자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바쁘게 처치하는 아루쉬를 보며 남자에게 다른 질문을 시켰다.

“오늘 날짜를 말해 봐요. 레본 국왕의 이름은? 이건 무슨 색이죠?”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시위꾼들의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엘리자베스는 총알을 보았으니까. 총알이 날아온 위치를 분명히.

이 엄청난 동체시력은 총알마저도 알아볼 수 있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총알은 결코 밖에서 날아온 것이 아니었다.

* * *

의사가 와서 수술을 시작한 것은 8시쯤의 일이었다.

그 전에 이미 관계자가 아닌 이들은 전부 돌려보내졌다.

윌리엄 조쉬는 유감스러운 얼굴로 프란시스를 걱정하다가 프란시스가 들고 있던 나이프에 찔린 손을 치료 받기 위해 가장 마지막에 떠났다.

“미안해요. 내가 잠깐 한눈 판 사이에…….”

관통상에 박혔을 총알을 찾아 적출하고 지혈과 소독, 봉합 따위를 전부 마쳤을 때는 이미 시간이 10시가 넘어갔다.

수술에는 아루쉬가 아니라 엘리자베스가 들어갔다. 아루쉬는 이국에서는 이런 외과적인 수술이 없다며 곤란해했다. 결국 수술장에 들어가 의사를 돕는 것은 엘리자베스의 몫이 되었다.

케이는 이미 너무 많이 맡아버린 피 냄새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엘리자베스가 수술장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지만 엘리자베스가 고집을 부렸다. 결국 2시간 동안 엘리자베스는 끔찍하게 비린 피 냄새를 맡았다.

수술장에서 풀려난 직후 엘리자베스는 응접실에 모여 앉은 에드워드와 앰버, 그리고 케이, 아루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뛰쳐나가 정원 한구석에서 구역질을 해댔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옆에 와서 물을 권하다가 그녀가 물까지 토하기 시작하자 분노한 얼굴로 의사의 멱살을 잡았다.

“엘리자베스가 토하는 거랑 이 의사랑은 아무 상관도 없어!”

앰버의 분노에 찬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실내에서 일어나는 소동을 들으면서도 별 수 없이 계속 구역질만 했다. 그렇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에는 온갖 위험하고 폭력적인 상상들이 떠다녔고 이걸 전부 게워내지 못하면 이 생각들이 순식간에 엘리자베스의 내면을 장악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아직은 내가 나 스스로를 역겨워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야.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여겼다.

케이에게 곤욕을 치른 의사가 욕지거리를 뱉으며 나가버리고 엘리자베스는 난장판이 된 실내로 다시 들어왔다.

깨진 유리병과 벽에 튄 피, 바닥에 그대로 남은 핏자국, 그리고 침통한 표정의 앰버와 에드워드, 그리고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끔찍한 광경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앰버가 어느새 생겨버린 짙은 눈 그늘을 단 채로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는 분이 풀리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녀석은 왜 저렇게 성질머리가 더러울까. 꼭 프란시스를 닮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생각으로 어두워진 머릿속을 약간 환기시키며 물었다.

“이제 망한 건가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 하커는 제 머리를 헝클이며 말했다.

“어차피 이번 초대는 형식적인 거니까. 돈 좀 먹이고 할 일을 주지시키고 내일 의회에서 잘 부탁한다 인사 정도 하는 그런 겉치레 같은 거였을 뿐이야. 이제 그만 가. 에드워드, 토비를 불러서 엘리자베스를 먼저 데려다줘. 거리 분위기가 흉흉하니 조심해야 할 거야.”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서랍에서 익숙한 듯 리볼버를 꺼내어 에드워드에게 내밀었다. 에드워드가 머뭇거리며 그것을 받아들려고 할 때였다. 앰버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형식적이라고? 그 형식적인 행사에서 내일 평민원에서 로버트가 추천하기로 한 인사 한 명이 총에 맞았어. 이제 세 자리 중 하나가 비었으니 평민원 자리를 늘리는 건 물론이고, 안 그래도 의회를 맘에 들어 하지 않던 국왕이 의회 개회를 무산시킬 명분까지 줬지.”

앰버는 초조한 듯 담배에 불을 붙이며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그런 앰버를 마주 노려보며 말했다.

“국왕이 그렇게까지 할 순 없어. 내 아비와 나에게 받아 처먹은 돈이 얼마인데 감히 의회를 닫게 해? 그냥 새로운 인사를 밀어 넣으면 돼. 킬리언도 있고 대니스도 있어. 아,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돌커프로 해. 그쪽은 돈만 주면 뭐든 하는 인간이잖아.”

앰버는 케이의 말에 울컥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킬리언은 안 돼. 급진적인 인사잖아. 저번에 하는 말 못 들었어? 그 자식은 레본에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레본을 폭파시키고 싶어 하는 거야! 그리고 대니스? 대니스야말로 왕정에 우리를 팔아넘길 놈이고 돌커프는 노동자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자본가지. 킬리언으로 하면 혈기 때문에 일을 망칠 것이고 대니스와 돌커프로 하면 평민들이 우리에게서 신뢰를 잃을 거야!”

엘리자베스는 붉은 머리의 여자가 그토록 분노하는 것을 처음 보았으므로 약간 어깨를 움츠렸다. 앰버의 목소리에 실린 힘에 실내의 모두가 움츠러든 사이에도 케이는 조금도 기세를 꺾지 않고 말했다.

“그게 의회를 멈추게 하는 것보단 낫지. 우리 쪽이든 아니든, 일단 앉혀놓고 돈을 먹여서 꼭두각시로 만들면 그만이야!”

“그런 식으로 일을 진행할 거면 그냥 귀족원들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줘서 매수하면 그만이었어. 왜 이렇게 우리가 돌아왔는지 알잖아. 이건 신뢰가 걸린 문제야.”

앰버와 케이가 무섭게 싸우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골똘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두 사람의 서로를 노려보며 씩씩거리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엘리자베스의 작은 목소리에 앰버와 케이가 둘 다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화난 눈을 보는 순간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의사가 아니어도 의사가 되어야 하고, 평민들의 대표가 아니어도 대표가 되어야 하는 때였다.

‘우리’가 ‘우리’가 되어버렸으니까.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내가 할게요. 그 국회의원이라는 거. 할 수 있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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