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23화
엘리자베스는 너무도 가벼워서 후 불면 공기 중으로 떠오르는 깃털을 마주한 어린 아이처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프란시스에게 조심조심히 말했다.
“왜 여기 있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프란시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여기……?”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것 같아서 얼른 대화를 틀었다.
“메리 심부름 왔다면서요. 프란시스. 이제 돌아가요. 집으로 가야죠. 그거 이리 줘요.”
엘리자베스가 프란시스의 손에 들린 페이퍼 나이프를 가리키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프란시스는 이제야 자신이 나이프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자신의 손에 들린 나이프를 생경하게 바라보았다.
“……이거…….”
“줘요.”
엘리자베스가 단호하게 말하자 프란시스의 눈빛이 묘하게 살아났다. 엘리자베스는 단기적 알코올성 기억상실로 프란시스의 머릿속에 기억이 되돌아옴과 동시에 수많은 감정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프란시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죽여버려야 하는 남자가 있어.”
“저도 있어요.”
엘리자베스가 케이 하커를 떠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를 죽이게 되더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조금 다치더라도 프란시스에게서 나이프를 빼앗을 요량으로 프란시스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프란시스가 슬쩍 손을 뒤로 뺐다. 그러더니 자신의 손목 위로 나이프를 가져갔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죽이기 위한 행동에 그토록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사람을 처음으로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숨을 들이마시며 주먹을 쥐었다.
“프란시스.”
“하커를 불러와.”
프란시스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날, 다른 시간에요. 지금은 아니에요.”
엘리자베스가 이를 악물었을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가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윌리엄이었다.
윌리엄은 프란시스의 앞에 엘리자베스와 나란히 쪼그려 앉더니 씨익 웃었다.
“아름다운 레이디께서 정원에 앉아 있으니 여기가 꽃밭이군요.”
윌리엄은 그렇게 말하며 프란시스의 주의를 끌더니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들어가서 케이 하커를 데리고 와요.”
“……하지만.”
“케이가 아니면 그 누구를 불러오더라도 소란을 막을 수 없을 거요.”
윌리엄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자베스는 타운하우스로 들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이나 프란시스를 돌아보았다.
엘리자베스는 현관문을 열고 마지막으로 프란시스와 속닥거리는 윌리엄을 눈에 담고는 한쪽에서 샴페인을 터트리는 바람에 시끌벅적해진 내부에서 눈으로 케이를 찾았다.
다행히도 케이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케이는 다른 신사들보다 월등히 키가 컸고 또 케이는—
현관 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시선을 마주치며 케이에게로 직선으로 걸어갔다.
몇몇 귀족들과 어깨가 부딪쳤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지금 참정권 운동 따위, 이 나라 따위, 케이와 앰버의 작당모의 따위, 모두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초조한 마음으로 케이에게 걸어갔다. 그러자 샹들리에 아래에서 샴페인 몇 방울을 얼굴에 묻힌 케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가 걸어오자 케이의 근처에 있던 신사 숙녀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주시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실례지만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시죠. 엘리자베스 양.”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완벽한 귀족 억양을 들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응접실을 나가 계단 참으로 갈 때까지 수많은 귀족들의 경멸 섞인 목소리를 들었다.
“세상에, 엘리자베스 양이 케이 하커 씨에게 무슨 말이 하고 싶을까요?”
“뻔하죠. 케이 하커 씨가 큰일을 치르진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가능하겠어요?”
엘리자베스는 귀족들의 태도가 무시에서 경멸로, 경멸에서 혐오로 바뀐 이유를 알았다. 그건 엘리자베스가 공개적으로 케이에게 말을 걸었고 케이가 그것을 승낙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목소리를 묵묵히 들으며 케이를 따라 계단참으로 갔다. 그러자 응접실에서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는 마치 다른 세상의 것인 양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엘리자베스가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프란시스가 술을 마셨어.”
엘리자베스의 말에도 케이 하커는 등만 보인 채 돌아보지 않았다. 케이는 난간을 짚고 엘리자베스 쪽은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래서?”
“로버트 하커 씨를 불러오라고만 해.”
“그렇겠지. 미련하기로 치면 그 여자만 한 이도 없어.”
케이의 말투에 들어 있는 냉소에 엘리자베스가 울컥해서 말했다.
“프란시스는 미련한 게 아니라 나름대로 몸부림치는 거야!”
엘리자베스의 외침에 케이가 거친숨을 토해내며 뒤를 돌았다.
케이는 분노로 번뜩이는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몸부림을 바로 미련이라고 부르는 거야.”
“나처럼?”
엘리자베스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황당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니, 나처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잠시 묻고 싶었다.
이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엘리자베스는 꼭 대답을 듣고 싶었다.
너를 가르친 사람이 누구야? 너를 신사로 만든 사람.
그렇게 너를 바꾼 사람. 그게 누구야?
그게…… 나야?
엘리자베스는 그런 질문들이 왱왱거리는 머릿속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며 이를 악물고 발음을 씹듯이 말했다.
“프란시스가 칼을 들고 있어. 프란시스를 위해서가 아니라 네가 도모하는 그 일을 위해서라도 프란시스를 진정시켜야 돼.”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프란시스를 진정시킬 수 있는 이가 진정으로 케이가 맞을지 궁금했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칼?”
“그래.”
케이는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현관문 밖에 서 있는 프란시스가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그곳에 윌리엄이 없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왜? 분명 나에게 가보라고 해놓고 왜 프란시스를 혼자 둔 거지?
젠장할.
엘리자베스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을 때, 프란시스의 옆으로 다가서는 한 남자가 엘리자베스의 시선 끝에 들어왔다. 담배를 들고 있는 로버트였다.
케이도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랬기에 엘리자베스와 거의 동시에 뒷문을 살핀 것이다.
뒷문은 열려 있고 담배를 피우려는 듯한 신사들이 우르르 뒷문으로 나가고 있었다. 로버트 역시 그래서 뒷문으로 나갔다가 프란시스와 마주친 것이리라.
이를 악문 엘리자베스가 현관문을 연 케이의 옆을 스쳐 프란시스를 말리기 위해 뛰려고 했을 때였다.
프란시스의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죽어! 죽어버려! 내가 분명히 얘기했잖아. 그 아이들을 그냥 두라고. 그 아이들을……!”
엘리자베스의 온몸의 근육이 움찔거렸다.
엘리자베스는 뛸 준비를 했다.
그녀의 온몸이 팽창하고 도약을 예견했다. 엘리자베스는 순식간에 여기에서 저기로 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건 지금의 그녀에겐 손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은? 괴물 같은 속도와 힘으로 프란시스를 구한 다음은?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아주 잠시 망설였을 때였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로버트가 입술을 달싹였다.
거리가 멀어 로버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의 입술을 읽었다.
‘죽여. 내 사랑.’
그 순간, 프란시스의 몸이 튀어나갔다. 엘리자베스의 몸 역시 튀어나가려고 했다.
펑!
갑작스럽게 화려하게 빛나고 있던 실내의 등이 모두 나가지 않았다면.
엘리자베스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뻗어오는 손을 보았다.
케이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본능적으로 끌어안는 것을 느꼈다. 케이의 숨소리가 엘리자베스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 뜨거운 숨소리 속에는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엘리자베스를 껴안는 케이의 혀에서 피 냄새가 났다. 혀를 깨물었을까?
엘리자베스는 그런 이성적인 생각들이 순식간에 휘발되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피 냄새에 취하고 말았다.
너를 죽이고 싶다.
너를 갈가리 찢어 삼키고 싶다.
너의 살과 뼈를 분리해서 너를 조각내고 싶다.
엘리자베스는 몰려드는 충동을 느꼈다.
……너를 먹고 싶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뒷덜미를 끌어안았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입술을 당겨왔다. 어둠에 잠긴 케이의 얼굴 중에서도 케이의 눈만큼은 똑똑히 보였다.
케이가 잡종의 상징이라고 일컫길 좋아했던 탁한 갈색 눈동자.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눈을 보는 순간 섬뜩한 상상을 했다.
너의 눈동자를 뽑아버려야지.
그래서 너의 눈을 삼키고 혀를 잘라 너를 내 옆에 두어야지.
어떨 땐 손가락을 잘라서 먹고, 어떨 땐 발가락을 잘라서 먹어서, 너의 몸에 남은 것이라곤 너의 심장과 영혼, 그리고 귀 밖에 없게 만들어야지.
네가 너의 눈으로 내가 아닌 어떤 것도 담을 수 없고, 네가 너의 입으로 사랑이 아닌 어떤 말도 할 수 없고, 네가 너의 손과 발로 나의 피부가 아닌 어떤 몸도 취할 수 없을 때—
너의 귀에 사랑을 고백해야지.
그러면 그것은 절대 거절당할 리 없는 고백이 되겠지.
엘리자베스는 괴물 같은 상상 속에서 보았다. 케이의 뒷덜미를 스쳐지나가는 총알을.
“으아아아악!”
그 순간, 실내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지지직—
실내에 전기가 들어왔다. 다시 환해지고 나서 본 실내는 빛과 피 냄새로 가득했다.
엘리자베스는 짙은 피 냄새 속에서 케이를 밀어냈다.
“우우욱!”
엘리자베스가 먹은 게 없어 신물만 잔뜩 뱉어내는 사이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꽉 잡고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으로 당겼다.
“가만히 있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현관 쪽을 보았다. 그러자 프란시스의 몸을 안고 있는 윌리엄 조쉬가 보였다.
대체 어디서 갑자기 나왔지, 저 남자는.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실내가 웅성거리더니 귀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엘리자베스와 케이를 스쳐 현관문을 뛰쳐나갔다.
그 사이 웅성거림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의사! 의사를 불러와!”
“지코프 씨가 총에 맞았어! 당장 의사를 불러와!”
“총이라니. 여기 폭도들이 있는 거 아니에요? 보비들도 불러와야 해요!”
“당장 나가야 돼! 폭도들이 또 총을 쏠지도 몰라!”
난장판이 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품 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를 맡다가 고개를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았다. 그녀는 자신을 놔주지 않는 케이의 품 안에 안긴 채로 억지로 상체만 케이에게서 떼어내고 말했다.
“내가 가봐야 돼. 누군가가 총에 맞은 거지? 그렇지?”
엘리자베스가 말하자 케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리자베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의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