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혼하러 돌아왔다 122화 (122/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22화

엘리자베스는 조쉬가 턱짓하는 쪽에 서 있는 케이를 보았다. 익숙하게 앰버를 에스코트하며 신사 행세를 하고 있는 케이를.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앰버와 케이를 자꾸만 번갈아보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그림처럼 어울렸지만 때때로 두 사람 사이에는 균열이 일었다.

앰버는 가끔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케이에게 뭔가를 속삭였고 그럴 때마다 케이는 신사다운 모습으로 앰버에게 뭔가를 말해주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럴 때마다 잠시 깨졌던 두 사람 사이의 그림 같음이 한순간 다시 회복되어 돌아오는 것을 자꾸만 바라보며 윌리엄에게 물었다.

“……그래서 케이도 당신의 동지로 만들 생각인가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윌리엄이 눈을 가늘게 뜨며 턱을 쓰다듬었다.

“아뇨. 이제 케이는 동지가 아니라 이용대상일 뿐이지.”

“왜요?”

“너무 많은 것을 가졌으니까.”

윌리엄은 그렇게 말하며 눈빛으로 타운하우스에 들어와 있는 화려한 귀족들과 사업가들을 가리켰다. 특히 로버트 하커가 서 있는 벽난로 쪽은 더 오래 가리켰다.

로버트 하커는 아마도 여기 있는 신사들 중 가장 비싼 천일 것이 분명한 번들거리는 옷으로 몸을 감싸고 호쾌한 얼굴로 대화를 이끌고 있었다. 하커의 주변에는 내로라하는 귀족원의 인사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저런 자를 윌리엄 조쉬 같은 이가 뭐라 부르는지 알았다. 윌리엄 조쉬의 빨간 책에서 읽었으니까.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이제 케이도 유산계급이 되었으니까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내 책에 감명 받았나 보군. 하지만 당신 같은 사람에게 빨간 책은 어울리지 않아요.”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코웃음을 쳤다. 지금 자신만큼 빨간 책에 잘 어울리는 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신사숙녀를 위한 에티켓 북>. 그 책은 충분히 감명 깊었어요. 윌리엄 경. 역시 사교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답더군요.”

“오, 역시 그 책을 알아봐주는 군요. 하지만 그런 책은 당신 같이 가정교사를 가진 여자들한테는 어울리지 않을 텐데.”

윌리엄은 여우처럼 말하며 슬며시 앰버와 케이 쪽을 보았다.

“……저런 이들이라면 몰라도. 내 책을 저들에게 권해줬소?”

“그럴 걸요.”

“역시 그랬군.”

윌리엄은 재밌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엘리자베스가 그런 윌리엄을 노려보자 윌리엄은 웃음을 멈추곤 부드럽게 말했다.

“역시 당신이 케이의 선생님이었어. 그렇죠?”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잠시 굳어버렸다. 아까부터 내내 피해왔던 하나의 가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가 케이 하커를 신사로 만들었다.

그 가설이 맞아떨어지기 위해선 몇 가지 논리 단계가 필요했다.

엘리자베스가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이던 시절, 매일 같이 그녀가 케이 하커의 공장에 숨어들어서 케이를 보아왔듯이, 그리고 그 관찰 결과를 매일 같이 학습하고 또 학습해서 노동자의 언어를 익혔듯이—

너도 나를 봐왔다.

너도 내가 너를 보는 내내, 나를 봐왔다. 나의 약혼자로 이런 타운하우스 창가에 앉아 뚱한 표정을 짓던 내내 너도 나를 봐왔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이 주는 울림에 자꾸만 몸이 떨려왔다.

왜 그랬을까. 왜 너는 나를 봤을까. 너도 나와 같은 이유였을까.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리자 윌리엄이 피식 웃었다.

“역시 그런가 보군. 당신은 언제나 그쪽 편이려나 보군.”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윌리엄을 노려보며 물었다.

“여기 왜 왔어요?”

윌리엄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중앙에 있는 응접 테이블에 다른 귀족 영애들과 같이 앉아 이 쪽을 의식하면서도 이 쪽을 결코 돌아보지 않는 솔턴 영애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해서? 아름다운 레이디를 혼자 두는 것은 신사가 할 일이 아니오.”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겨우 그런 이유로 윌리엄이 여기 오지 않았을 거라는 건 윌리엄도 엘리자베스도 아는 사실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거짓말쟁이.”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할 때, 엘리자베스의 시선은 케이에게로 가 있었다. 귀족들의 예의범절 따위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이 굴었던 주제에 이 타운하우스의 그 누구보다 완벽한 예의를 구사하는 케이에게.

그러므로 윌리엄은 이렇게 물었다.

“나 말하는 건가?”

“그럼 여기 누가 또 있어요.”

“날 말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윌리엄은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따라 케이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다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자신의 팔짱을 끼게 했다.

내내 생각했지만 정말이지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아닐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윌리엄을 뿌리치려다가 순간, 케이와 눈이 마주쳤다.

윌리엄의 팔짱을 낀 엘리자베스를 보며 케이의 표정에 묘한 균열이 갔다. 엘리자베스는 그걸 눈치채고 윌리엄의 팔을 꽉 쥐었다.

윌리엄이 말했다.

“아이고. 아픈데?”

“아프라고 한 거예요.”

“나갑시다. 데려다줄게요.”

윌리엄은 또 키득거리며 엘리자베스를 잡아끌고 콜린이 열어주는 현관문을 나섰다.

엘리자베스는 나오기 직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솔턴 영애를 보았다. 어린 영애가 입을 마음의 상처는 유감스러웠지만 이 남자는 원래도 솔턴 양의 것은 아니었지 싶었다.

엘리자베스는 우글거리는 인간 떼의 냄새에서 해방되어 시원한 밤바람을 맞이하며 말했다.

“여기 왜 왔어요?”

“같은 질문을 방금도 들은 것 같소만.”

“방금도 대답을 못 들은 것 같아서요.”

엘리자베스는 걸음을 일부러 늦췄다.

어둠에 잠긴 정원 어딘가에 있을 법한 토비를 찾았지만 토비가 없었다. 그러므로 엘리자베스는 마음 놓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윌리엄 경도 귀족원이잖아요. 그럼 분명 법안을 만들고 귀족들을 설득해볼 방법도 있었을 텐데, 왜 그 방법은 쓰지 않았어요?”

엘리자베스는 눈을 치켜떴다.

이제 생각해보니 윌리엄 조쉬도 귀족원이었다.

어린 날 조쉬 자작 부부가 죽고 나서 귀족원 자리를 세습받은 것이었고, 윌리엄은 엘리자베스에게 정체를 들키기 전까지는 의회에 참석도 하지 않는 허울만 남겨둔 귀족원으로 유명했다.

귀족원의 많은 귀족들이 사실 의회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귀족들은 의회 정치라는 것이 나라가 돌아가는 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외면했고 외면하다보니 무지했다. 그들은 여전히 법이란 왕의 말을 받아 적은 것에 그치지 않고 의회란 봄에 열리는 수많은 사교계 행사 중 하나라고 여겼다.

윌리엄 역시 그런 이들 중 하나인 것처럼 굴곤 했다. 윌리엄은 대체로 개회 기간에 술을 진탕 퍼먹고 의회에 ‘공석 1’로 자리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가 주류 귀족임을 더더욱 확고히 했다. 주류 귀족이란 무릇 의회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면 안 되고, 정치나 제왕학 대신에 예술, 미학과 같은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 하니까.

윌리엄 조쉬는 그런 주류 귀족에 딱 걸맞은 이였다. 그게 위장이라면 훌륭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대체 그 위장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당신은 남성이고, 귀족이에요. 귀족원에 자리까지 있죠.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당신만큼 적절한 사람은 없었을 텐데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이 눈썹을 꿈틀했다.

“상당히 공격적인 말투군.”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의 말에 의구심을 느꼈다.

무정부주의라는 것도 엘리자베스에게는 그저 예술이나 미학과 같은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었으니까.

정부가 없는 나라는 없고, 신과 주인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없다.

그런데도 윌리엄은 그게 가능하다는 듯이 글을 써댔고, 엘리자베스가 읽은 그 글은 현학적이고 고지식해보이기는 해도 알맹이가 없었다.

유산계급, 무산계급, 혁명, 자본—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빠져 있는 허황한 언어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 조쉬의 삶이 사실은 그런 허황한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엘리자베스가 멈춰서버린 윌리엄보다 한 두 발자국 더 걸어가 돌아서서 말했다.

“자신에게 불리한 말 앞에서 상대방의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투를 지적할 수 있는 것도 남성 귀족으로 태어나 남성 귀족으로만 살았던 당신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에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정도 특권으론 세상을 바꿀 순 없지. 세상을 바꾸는 건 법이나 의회, 특권 따위가 아니라…….”

윌리엄 조쉬는 엘리자베스의 어깨 너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쥐었다. 그러곤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총이나 칼이오. 저런 것처럼.”

엘리자베스는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윌리엄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엘리자베스는 정원 한구석에서 떨고 있는 한 여자를 보았으므로 윌리엄의 말 따위엔 집중할 시간이 없었다. 그 여자는 귀를 막고 있었고 그 앞에서는 토비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잰 걸음으로 그쪽으로 걸어갔다. 토비가 얼른 엘리자베스를 알아보고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

엘리자베스가 놀란 눈으로 구석에 쪼그려 앉은 프란시스를 보았다.

“프란시스.”

엘리자베스가 얼른 프란시스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자 짙은 술 냄새와 함께 프란시스의 손에 들려 있는 기다란 페이퍼 나이프가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흠칫 놀라서 토비를 올려다보았다. 토비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메, 메리가 급하게 필요한 게 있다고 해서 오전에 오셨었는데요. 손님들이 들이닥치는 통에 메이드 룸에 계시라고 했는데 제가 방금 올라가보니 웬일인지 잔뜩 취해 계시더라구요. 제가 모셔다 드리려고 하는데……. 페이퍼 나이프를 들고…….”

엘리자베스는 토비의 옷자락에 묻은 피를 보고 놀란 눈으로 토비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살짝 베인 것 같았다.

“소독약으로 소독해야겠다.”

“괜찮아요.”

“괜찮긴. 쇠에 다친 상처는 언제나 주의해서 살펴야 한다고.”

엘리자베스는 토비에게 엄하게 말하며 얼른 소독약을 꺼내오라고 했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토비는 머뭇거리더니 실내로 들어갔다. 엘리자베스는 토비가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보다가 프란시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프란시스는 멍한 얼굴로 피가 살짝 묻은 페이퍼 나이프를 들고 땅만 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가 왜 술을 마셨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로버트 때문이겠지.

프란시스는 분명 메이드 룸에 있다가 잠시 내려왔을 거고, 그때 보았을 것이다. 자신을 망하게 한,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를.

프란시스에게 이 파티에 로버트가 온다는 사실을 엘리자베스는 알려주지 않았었다.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길게 뱉으며 프란시스를 다시 불렀다.

“프란시스. 뭐 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프란시스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공허한 눈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