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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21화 (121/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21화

“방문이십니까?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레이디를 발음하는 케이의 목소리를 듣고 어깨를 움츠렸다.

멜니아의 억양처럼 ‘에’에서 혀가 뒤로 가 있지도 않았고 노동자의 언어처럼 자음이 대충 발음되지도 않는다. 또박또박한 말씨에 자음은 뚜렷이, 모음은 좀 더 분명하지만 확실한 발음.

대체 언제 저런 말씨를 익힌 거지. 대체 언제.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어쩔 도리 없이 이렇게 묻고 말았다.

“뭐라고?”

멍청하게도. 노동자의 말씨를 써서, 뭐라고? 라고 묻고 말았다. 그 순간, 자신이 한 말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에는 균열이 갔다.

이 순간이 그 순간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쉐필드를 떠나와 처음으로 리오든에 도착했던 엘리자베스가 마차에서 나오던 순간, 더럽고 냄새나는 리오든에서 처음으로 피부가 맞닿았던 소년이 엘리자베스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던 순간.

‘귀족 아가씨는 마차에서 내리는 것도 혼자 못하는군.’

‘뭐라고? 알아듣지 못했어. 다시 말해줄래?’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케이의 얼굴을 보았다.

케이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케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귀족 아가씨는 같은 나라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나?”

남들이 봤을 때는 전혀 알아듣지 못할 문장이었지만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 말은 그러니까 이런 뜻이었다.

나도 너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케이를 보며 최대한 남들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정중하게 말했다.

“……방문입니다. 초대장도 없이 와서 정말 죄송하지만 들어갈 수 있을까요?”

엘리자베스의 어색한 귀족 말씨를 들으며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터주는 길을 보며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케이를 지나쳐 걸었다. 저마다의 담소에 심취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귀족과 사업가들은 엘리자베스가 걸어가면 살짝 시선을 교환했다.

엘리자베스는 저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무시하고 있으면서도 완전한 무시는 아니다. 왜냐하면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은 하고 싶어 하니까.

엘리자베스는 지금 자신이 여기에서 갑자기 옷을 벗고 춤을 춘다고 해도 귀족들은 절대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소개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 먼저 관심을 표하는 것은 귀족의 품위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엘리자베스의 기행을 영원히 저들끼리 떠들 것이다. 엘리자베스로서는 절대로 다시는 포함될 수 없는 저들의 ‘상류 사회’에서.

엘리자베스는 그 어색한 무시의 눈짓을 받아내며 자신이 목표로 한 한 사람에게로 걸어갔다. 그러자 루이 니콜라스 교수는 별로 놀랍지 않다는 얼굴로 사업가들에게서 천천히 일어나서 엘리자베스에게로 걸어왔다.

“엘리자베스.”

루이 니콜라스의 몸에 깃든 정확한 예의범절은 루이가 프란시스처럼 평민이었으나 귀족의 예의범절을 익히기 위해 공을 들인 티가 확실히 났다.

하지만 루이 경은 과학도였기에 로버트와는 달리 쉽게 ‘경’ 칭호를 얻었다. 돈을 가진 사업가가 아니라 돈이 없는 과학도니까, 오히려 쉬웠던 일이었다.

“교수님.”

엘리자베스는 다급하게 말했다. 루이 니콜라스는 엘리자베스의 초조함을 몰라주며 느린 움직임으로 엘리자베스를 창가 쪽으로 안내했다. 엘리자베스는 창가에 도착할 때까지 꾹 참고 있던 말을 창가에 도착하자마자 터트렸다.

“제 추천서를 언제 넣으셨어요?”

“저번 주쯤?”

루이 니콜라스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별로 동요하는 기색 없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대체 왜요?”

“추천하고 싶으니까? 그런 이유까지 일일이 내가 설명해야 하나?”

루이 니콜라스 교수는 무감한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당연하죠. 당연하잖아요. 저랑 케빈한테는 설명하셔야죠. 아니, 설명하셨어야죠. 대체 왜 전가요? 저는 3개월밖에 안 됐어요. 케빈은 몇 년이나 교수님 밑에서…….”

“자네는 과학자의 능력을 증명하는 게 수학 기간이라고 생각하나?”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수학 기간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과정의 문제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봐도 케빈 퍼킨은 저보다…….”

“훌륭한 과학적 지식과 탐구력, 그리고 이해도를 갖추고 있지. 나 역시 그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닐세.”

루이 니콜라스는 목소리를 결코 높이지 않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루이가 그럴수록 자신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뭘 말씀하시는 건데요?”

“수천 년 동안 수학, 철학, 역사 따위가 아카데미를 장악해왔어. 과학이라는 학과 체계가 아카데미에 정착한 것은 백년도 채 되지 않아. 그 전에 과학은 학문이 아니었지. 과학이 학문이 되고 나서 수학, 철학, 역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나?”

엘리자베스는 마음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대답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죠.”

“존경. 그래. 존경을 받았지. 예전에는 그 존경이 밥을 먹여줬네. 진짜로. 정말 그랬어.”

루이 니콜라스는 키득거리며 술잔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더 삼키곤 창틀에 올려두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들 쪽을 힐끔 쳐다보며 서서히 이쪽에서 멀어지는 귀족과 사업가들을 보았다.

귀족들은 모두들 귀족원에 한 자리는 가지고 있는 데다 왕족의 피도 약간씩은 섞였을 내로라하는 상류층이었고, 사업가들 역시 최근 사교계를 주름잡는 레본의 산업을 이끄는 유명한 부자들이었다. 서로의 심장을 파먹기 위해 준비가 탄탄히 된 자들.

엘리자베스는 그들 사이에 서서 그들의 대화를 유려하게 이끌어가는 케이를 보았다. 귀족들이 대대로 익혀온 그들의 말투를, 여기 모인 그 어떤 사업가보다 완벽하게 따라하는 케이를 말이다.

대체 어디에서 저런 말투를 배웠을까. 묻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그 좋은 선생님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여기 모인 귀족들에게 힘과 돈이 있었을 때만 해도 이 귀족들은 품위에 돈을 냈어. 하지만 요새는 반대지. 귀족들은 돈에 품위를 내.”

루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엘리자베스는 주변 귀족들을 보았다. 몇몇은 엘리자베스를 알아보고 서로 키득거리고 있었다.

몰락한 왕족, 케이의 파혼한 전 상대, 남자 옷을 입은 여성 과학자. 엘리자베스는 그들에게 그 자체로 요깃거리였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존경심을 돈으로 표현하지 않아. 왜냐하면 돈은 이미 그 자체로 존경이고 품위니까. 수학, 철학, 역사학자들이 지금 뭐하고 있는지 아나? 그들은 지금 아카데미에 있어. 아카데미에서 교수들이 쓴 교재는 누가 읽는지 아나? 아카데미 학생들이 읽지. 그럼 아카데미 학생들이 그걸 읽고 뭐가 되는지는 알아? 그들은 바로 아카데미 교수가 돼. 그래. 그게 돈을 끌지 못하는 학문의 미래지. 서로를 가르치고 배우고 서로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사는 것. 그 더러운 근친교배의 끝에 결국 어떤 식으로든 피가 고이다 못해 썩기 시작하면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고 나중엔 심장까지 내어주는 것.”

루이 니콜라스 교수는 평소에는 통 볼 수 없는 냉소적이고 일그러진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았다.

저것이 루이의 진짜 얼굴이다. 잘 웃고 잘 떠들며 잘 화내던 그의 얼굴들은 모두 가식이고 거짓이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과학을 팔아먹기 위해, 제 새끼 같은 논문과 학생들을 시장에 내어놓기 위해 잘라버린 진짜 살은…….

이쪽이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잘 듣게, 엘리자베스. 이 시대에 과학자에게 필요한 건 딱 하나야. 현실감각. 케빈 퍼킨은 그런 의미에서 자네한테 밀려난 거야. 수학 기간이나 노력, 과학적 지식이나 탐구력 때문이 아니라.”

루이를 노려보며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제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몰락한 왕족 출신 여성 과학자니까요?”

“그렇게 어렵게 말하지 말게. 난 자네의 글은 쉬워서 좋아했네만.”

루이는 코웃음을 치며 엘리자베스를 마주 노려보았다.

“자네가 퍼킨보다 더 팔아먹기 좋으니까. 그게 이유일세.”

루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할 말을 잃었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멀리서 자신의 쪽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 앰버를 보았다. 엘리자베스의 숨이 거칠어졌다.

“저를 사간다는 사람이 누구죠? 앰버인가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루이 니콜라스가 입을 열었다.

“앰버? 아, 앰버 모건.”

루이 니콜라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러곤 엘리자베스가 보고 있는 앰버 쪽을 보았다.

“그래. 그러고 보니 앰버 모건과 의외로 사이가 좋은가 보더군. 좋은 일이야. 앰버 양의 양부가 되는 모건 씨는 저 쪽일세.”

루이 니콜라스는 앰버의 옆에 서 있는 갈색 머리의 멜니아 신사를 가리켰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라고 하던가. 멜니아는 참 희한한 곳이야. 국왕을 선출한다니. 어쨌거나 앰버 양과는 계속 친하게 지내게. 도움이 될 테니.”

“……도움이 안 될 거예요.”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루이 니콜라스가 잠시 엘리자베스의 노기 어린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든지. 어쨌든 자네를 사간다는 쪽은 저쪽이 아니라 저쪽이야.”

루이 니콜라스가 손가락으로 이 곳이 클레몬트 공작가였을 때부터 걸려 있던 레본의 국기를 가리켰다.

“뭐라구요?”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루이가 대답했다.

“자네 논문이 곧 홀램브로 학술지에 실릴 거야. 아니, 그래야만 해. 국왕 폐하가 지금 자네를 주시하고 있으니까. 갸흐통에서 여자 과학자가 최초로 홀램브로 상을 노리고 있다지. 국왕은 갸흐통의 과학이 레본의 과학을 뛰어넘는 것을 두려워해. 상징적으로라도 말이야. 그래서 국왕이 자네를 사기로 했네.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지. 이 나라에서 국왕만큼 돈을 헤프게 쓰는 이는 없으니까.”

엘리자베스는 치밀어오르는 분노, 충동, 토기 따위를 참지 못하고 루이 교수의 마지막 문장이 끝맺어지기도 전에 창가를 떠났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저 쪽에서 여전히 노려보고 있는 로버트와 로버트를 위시한 사업가들, 그리고 귀족들, 앰버와 앰버의 양부라는 모건 씨를 뒤로 하고 빠르게 걸어갔다.

툭—

실수로 한 남자와 부딪히기 전까지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거기엔 새까만 피부를 가진, 엘리자베스에겐 낯설지만은 않은 이국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때 발표회에서 본…….’

엘리자베스는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렸다. 이 남자에게 레본어를 써도 될지 망설여졌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국의 남자 옆에 있던 윌리엄 조쉬가 엘리자베스를 힐끔 보며 말했다.

“아루쉬, 미안하지만 우리 레이디를 내가 잠시 데려가도 될까요?”

그러자 아루쉬라 불린 이국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뜻대로.”

어색한 억양의 목소리였다. 엘리자베스는 ‘아루쉬’라는 특이한 이름을 초대 리스트에서 보았던 것을 떠올리며 조쉬를 보았다.

그러자 이국의 남자는 사라지고 조쉬가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케이 하커는 점점 더 쓸모 있어지고 있는데.”

조쉬는 씨익 웃으며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귀족으로 태어난 것처럼 구는 케이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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