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20화
[부교수 임용 결과
약학부 부교수: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1층에 모여 있는 신사차림의 학생들을 물리치고 벽보를 확인했다. 그리고 거기 쓰인 글귀를 읽은 후, 자신에게 모이는 신사들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벽보를 뜯어버렸다. 저쪽에서 경비병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학생! 벽보 훼손하면……!”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무시하고 회랑 끄트머리에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케빈을 보며 걸어갔다. 돌아서는 케빈을 따라잡은 엘리자베스는 다급하게 말했다.
“케빈. 이건 말이 안 돼. 난 추천서 제출도 안 했고…….”
케빈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루이 니콜라스 교수님이 추천서 쓰셨대요.”
“뭐?”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어두운 얼굴을 보며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케빈이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모르던 일이에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지금 내가 알고 있었어야 한다는 뜻이야?”
‘전 약혼자에 이어서 루이 니콜라스 교수님까지 꼬시다니. 대체 어떡하면 그렇게 인생을 편하게 살지?’
엘리자베스는 윌리스의 말을 떠올리며 케빈을 노려보았다. 이러면 안 되는 건 알지만, 지금 케빈의 마음을 위로하는 게 먼저라는 건 알지만, 엘리자베스는 서운함이 더 앞섰다.
케빈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모른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매일매일 연구실에서 얼굴 보는 사이인데! 게다가 앰버 모건이 얼마 전에 갑자기 교수님을 찾아오더니 초대장도 주고 갔어요!”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케빈은 엘리자베스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모르죠. 케이 하커가 또 무슨 짓을 했는지.”
“하.”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고 이를 악물었다.
“그래. 내가 케이와 루이 교수님을 모두 꼬시는 재주가 있는 여자였나 보네. 정말로.”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대로 돌아서 가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니.
케이 하커가 아니야.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탐나요. 왕립 아카데미의 최초의 여성 과학자인데다, 신의 은총이라 불리는 학질 치료제를 만들어냈고, 심지어는 왕의 조카이니 왕이 대놓고 살해할 수도 없는 존재. 당신이 의회에 있다면, 그만큼 멋진 일은 없을 거예요.’
그날, 무슨 일로 그렇게 피곤하냐는 질문에 앰버가 대답했었다.
‘비밀.’
이라고.
앰버 모건.
당신이야.
당신…… 이 이상한 여자!
엘리자베스는 거친 숨을 뱉어내며 벽보를 구겨들고 당장 거리로 나갔다.
* * *
엘리자베스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지만 이미 공장 퇴근시간에 이르러, 컬로든 궁은 물론이요 귀족들의 사교모임이 시작되는 레트니 애비뉴에까지 시위꾼들이 잔뜩 모여 있었으므로, 그녀가 인파를 헤치고 레트니 애비뉴 2번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져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타운하우스 앞에 도착하자 익숙한 문양이 박힌 마차가 타운하우스 앞에서 방문 허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안에 앉아 시위꾼들 쪽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엘리자베스를 보자 눈을 반짝 빛내며 마차에서 내렸다.
엘리자베스는 익숙한 남자의 얼굴에 별로 놀라움을 느끼지 않았다. 로버트 하커. 저 남자의 이름은 이미 리스트에서 본 적이 있다.
엘리자베스는 헐떡거리는 숨을 고르고 마차에서 내린 남자에게 인사했다.
“로버트…… 씨.”
엘리자베스의 말에 남자는 톱햇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구나. 엘리자베스.”
경어는 물론이요, 호칭까지 생략된 로버트의 태도는 자신들의 사용인을 대할 때나 다름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로버트의 태도 변화에 굴욕을 느끼기보다는 편안함을 느꼈다. 원수에게 경칭을 듣는 것만큼 불편한 일이 또 있던가.
“네, 오랜만이에요.”
“나는 잘 지냈다.”
엘리자베스가 묻지 않았는데도 로버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더니 엘리자베스의 바지와 셔츠 차림을 훑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너도 잘 지낸 것 같구나. 그런데 여긴 왜 왔지? 설마 너도 시위꾼이 되어 네가 살던 타운하우스에 계란을 던지러 온 건 아니길 바란다. 내 아들의 앞길을 막으러 온 건 더더욱 아니길 바라고.”
로버트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에게로 걸어왔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로버트는 고압적인 태도로 엘리자베스에게 걸어오더니 품 안에서 지폐를 한 장 꺼내어 내밀었다.
“그만 돌아가. 오늘 자리는 레본의 미래가 달린 파티다. 그런 차림으로 여성 과학자가 올 자리는 아니지.”
로버트는 레트니 애비뉴에 막 들어오기 시작한 가스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로버트가 내미는 지폐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것을 천천히 받아들었다. 그러자 로버트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받는구나?”
“그럼요. 돈은 돈이고 당신이 싫은 건 싫은 거니까.”
“뭐?”
로버트가 더 재밌다는 듯이 얼굴을 구기며 웃었다.
“……하지만 저 안에 잠깐 얼굴을 봐야 할 사람이 있어요. 당신 아들은 아니구요.”
엘리자베스가 로버트를 노려보며 말하자 로버트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말을 못 알아듣는군. 여기에 네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로버트는 아름답게 치장된 타운하우스 정원을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3개월 전까지만 해도 제 집이었던 곳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는 로버트의 말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그래서 별 도리 없이 엘리자베스가 웃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엘리자베스는 흠칫 놀라 웃음을 멈췄다. 엘리자베스의 머리 위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디. 안 들어가시고 뭐하시죠? 안 그래도 당신이 언제 오시나 목을 빼고 기다렸답니다.”
엘리자베스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지 않고도 누구인지 알았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굳어지는 로버트의 표정을 보며 천천히 돌아서 그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윌리엄 경.”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 조쉬가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과장된 모습으로 엘리자베스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윌리엄 조쉬 뒤에 있는 마차 옆에 서 있던 솔턴 영애가 황당하다는 듯이 마차 안으로 다시 쏙 들어가버렸다.
‘같이 왔구나.’
엘리자베스는 초대장에 없던 윌리엄 조쉬와 초대장에 있던 솔턴 영애가 함께 등장한 이유를 알았다. 솔턴 영애의 파트너로 특별히 동행한 것이리라.
그 말은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뜻도 되었다. 실제로 그렇든 아니든 미혼의 두 귀족이 나란히 등장하는 순간 이 타운하우스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두 사람은 그 사실을 알고도 함께 나타나기로 한 것이다.
‘……솔턴 영애라.’
엘리자베스는 도무지 윌리엄 조쉬와 어울리지 않는 솔턴 영애를 윌리엄이 자꾸만 받아주는 이유가 따로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또 굉장히 위험한 일이겠지.
윌리엄은 인사를 마치곤 다시 몸을 일으켜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 자신의 팔짱을 끼게 하고 로버트를 보았다.
“아, 로버트 씨.”
로버트는 윌리엄 조쉬를 알아본 듯 살짝 웃으며 예의를 갖췄다. 로버트 하커는 결코 귀족들 앞에서 면을 구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저번 주 만찬회에서 뵈었지요?”
로버트 하커가 말하자 윌리엄이 미간을 찌푸리며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다가 아, 하며 말했다.
“제가 신사분들이랑 대화를 자주 안 해서. 그렇네요. 계셨던 것도 같습니다.”
윌리엄의 말에 로버트의 표정이 굳었다. 로버트 하커씩이나 되는 인사를 만찬회에서 보고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로버트 하커가 존재감이 없었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대놓고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로버트 하커는 솔턴 영애와는 달라서 이런 미묘한 무시와 경멸을 잘 읽어냈다. 로버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고 있을 때였다.
타운하우스 안에서 토비와 콜린이 걸어 나왔다. 콜린과 토비는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딱히 내색은 하지 않았다. 토비는 로버트 하커의 마차를 끌고 갔고, 콜린은 로버트를 맞이했다.
로버트가 윌리엄에게 옅게 인사하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엘리자베스가 윌리엄을 보며 물었다.
“……이제 빨리 가봐요. 당신의 파트너가 상당히 섭섭해할 테니까.”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이 코웃음을 쳤다.
“이미 섭섭할 대로 섭섭할 거니 잠시 더 있는 건 큰 차이가 없소.”
“파트너가 섭섭해할 짓을 왜 하는 거예요, 굳이?”
엘리자베스가 황당하다는 듯이 묻자 윌리엄이 당연하지 않으냐는 듯이 말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하니까? 곤혹스러운 것 같아서.”
“자꾸 놀리지 마요.”
엘리자베스가 짜증스럽게 말하며 윌리엄의 팔짱을 놓았다. 그러자 윌리엄이 나지막이 말했다.
“놀리는 거 아닌데.”
윌리엄은 엘리자베스가 뭔가 말하기에 앞서 엘리자베스의 손에 들린 지폐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의외군. 돈을 받아 챙기다니.”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의 말에 얼굴이 빨개져서는 들고 있던 지폐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돈은 돈이에요. 돈은 죄가 없죠.”
“역시 매력적이야.”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구겼다.
“닥쳐요. 조쉬.”
윌리엄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씨익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손을 들어 다시 한번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안녕이란 인사를 그렇게 하는 걸로 알겠소. 그럼.”
윌리엄은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놓아주곤 마차로 돌아갔다. 엘리자베스는 온몸에 돋아난 닭살을 손바닥으로 마구 문지르며 타운하우스의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러자 말을 매어 두고 막 나오던 토비가 엘리자베스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못 오신다더니요?”
“앰버를 불러줘.”
엘리자베스가 다급하게 말할 때였다. 창문 안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슬쩍 지나갔다.
루이 니콜라스.
“……앰버 모건 양은 지금…….”
“아니, 아니야. 그냥 내가 들어가는 게 좋겠어.”
엘리자베스는 루이 니콜라스 교수가 이 파티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으며 얼른 타운하우스 현관 앞에 섰다. 그러자 뒤를 돌던 콜린이 살짝 놀란 얼굴을 하다가 얼른 표정을 관리하고 말했다.
“초대객이 아니시니 방문이신가요?”
콜린은 엘리자베스가 직접 만든 방문카드를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깃펜으로 방문카드를 쓰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가 엘리자베스 앞에 섰다.
누구보다 유려하고 신사다운 몸짓으로, 남자는 엘리자베스 앞에 멈춰 섰다. 엘리자베스는 그 몸짓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