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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19화 (119/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19화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손을 떼고 앰버의 전체적인 차림새를 살폈다. 핀 덕분에 앰버는 조금이나마 더 정숙하고 얌전해 보이는 차림이 되었다. 엘리자베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앰버가 머리핀을 풀어내며 엘리자베스에게 건넸다.

“……앰버?”

“엘리자베스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르죠. 케이는 속을 모를 사람이니까. 하지만 아닐지도 몰라요. 그러니 케이한테 물어봐요. 케이한테 물어보고 이게 정말 내 것이라고 하면 그때 내가 할게요.”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당장 더 괜찮은 단추나 브로치를 찾기엔 촉박…….”

“난 도둑이 아니에요.”

앰버가 단호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의 손에 머리핀을 쥐어주었다.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내미는 핀을 머뭇거리다가 받아들었다. 거절하기에는 앰버의 표정이 너무도 단호했다.

* * *

결국 케이는 자정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를 먼저 돌려보내고 자정까지 기다리다가 지쳐서 기숙사로 돌아왔다.

몸이 무척이나 피곤했는데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잠에 들었다 깼다를 반복한 탓에 늦잠을 자고도 몸이 찌뿌둥했다.

엘리자베스는 루이 니콜라스 교수님의 연구실로 먼저 들렀다. 소논문에 대한 평가를 들을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이었는데, 교수님은 연구실에 안 계셨다. 케빈의 자리를 보았지만 케빈도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살짝 웃었다. 하긴. 오늘이 부교수 심사 발표일이니 케빈이야말로 늦잠을 잘 만도 했다. 어제 잠을 설쳤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누가 밀가루 포대라도 얹어놓은 듯이 무거운 어깨를 주물럭거리며 루이 니콜라스 교수님의 자리에 쪽지를 썼다.

[말씀하셨던 실험 재료 사러 나갑니다.]

엘리자베스는 원래 소논문에 대한 평가—라고 쓰고 욕이라고 읽을—를 듣고 나가서 사려고 했던 실험 재료들이 적힌 종이를 챙겼다. 실험 재료들이 대부분 리오든 서쪽에 있어서 지금 외출하면 옴니버스의 때를 잘 맞추더라도 오후에나 들어올 것이다.

‘타운하우스에서 여는 파티가 오후 5시부터라고 했는데…….’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심장이 다 떨리는 것 같은 기분으로 연구실을 나섰다.

왕립학술원 정문을 통과하며 보니 웬일인지 에밀리의 석방을 요구하는 피켓을 든 여자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의아해하며 옴니버스가 잡힐 만한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옴니버스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품 안의 동전을 셈해보며 그냥 개인 마차를 탈까 싶어 마차도 찾아보았다. 그러나 마차조차도 딱히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기며 컬로든 궁 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던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개인 마차도, 옴니버스도, 그리고 피켓을 든 여자도 없는 이유를 알았다.

컬로든 궁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 다다른 엘리자베스는 귀가 터질 것 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귀족원 엿 먹어!”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되찾아야 합니다!”

“여성들이여. 이제는 말보다 행동을!”

엘리자베스의 눈앞에는 수많은 평민들이 마차가 갈 길을 막아서고 궁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었다.

순간 엘리자베스는 몸을 움츠리고 얼굴을 가렸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병목 현상을 일으키며 잔뜩 모여 있는 마차들을 향해 걸어갔다. 인파의 중심으로.

“내일은 의회 청사 앞에서 모입시다!”

“귀족원들에게 던질 계란을 사모아요! 모금함에 돈을 넣어주세요.”

“계란이라니, 그게 무슨 사치야. 그냥 내 똥 좀 퍼다줄 테니 그걸 던져!”

엘리자베스는 키득거리며 술에 취해 소리 지르는 한 무리의 남자들과, 그 남자들을 노려보며 벽에 기대 서 있는 목까지 덮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아들, 딸 다 같이 나들이라도 나온 듯한 사람들을 보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그저 한 무더기의 평민이었던 이들은 가까이서 보니 다양한 목소리와 색깔을 가진 이들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급진적인 말이 끈적거리는 붉은 액체로 적힌 피켓을 든 남자와 대체 여기 왜 왔는지 알 수 없는 신사 옷차림의 남자, 그리고 판탈롱을 입고 목에서 피를 토할 기세로 소리치는 여자도 지나쳤다.

내일이 바로 의회의 개회일이었다. 제 아무리 평민원이 그저 이름만 평민원일뿐, 귀족들과 붙어먹는 신흥 사업가 계층의 대변인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겉으로나마 몇 가지 평민의 요구에 걸맞은 법안을 제출했다. 그런 이유로 평민원이 생긴 이후 노동자들, 이주민들, 그리고 여자들과 같은 이익집단들은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담긴 법안이 통과되도록 의회와 궁 앞에서 시위를 하곤 했다.

솔튼 빌리스가 증기기관을 가지고 레본을 거의 말아먹을 뻔한 이후, 매 해 볼 수 있는 광경이긴 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이번에는 조금 더 감회가 남달랐다. 그 이유는 몇 걸음 걷다보면 심심치 않게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라는 이름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엘리자베스의 기억 속에 남은 촛불 덩어리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가 경찰청에 잡혀 있는 동안 밤새도록 경찰청 앞을 지키고 있던 촛불을 든 군중.

엘리자베스는 그들이 보여줬던 그 조용한 인내를 잊지 못했다.

그 강렬한 순간의 기억 하나 때문에 이제 엘리자베스는 궁 앞에 모여든 이 인파를 예전의 엘리자베스처럼 그저 폭도나 위험한 시위꾼들 정도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엘리자베스는 이들과 ‘우리’가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들이 나눠주는 전단지를 전처럼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었고 시위꾼들을 돌아가지 않고 틈바구니를 일부러 헤치고 들어갔다.

조금이라도 숫자가 많아 보여야 궁 밖을 지키는 보비들과 근위병들의 표적이 되지 않을 거야.

우리는 우리를 서로 지켜줘야 해.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저 밖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기자들이 이 인파의 머릿수를 대충이라도 셀 때,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머릿수도 꼭 들어갔으면 했다. 그래야 하나라도 더 많은 숫자가, 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변화를 외치고 있다고 여겨줄 것이 아닌가.

실험 재료를 사러 가야 하는 게 아니라면 엘리자베스는 조금 더 오래 이곳에 남아 머릿수를 채워줄 생각도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들이 자신을 변화시켜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시위대 무리의 중심을 통과해 걸으며 약간 전율했다.

진보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엄청난 전염병이 아닌가. 어느새 엘리자베스마저도 감염되어버린, 엄청난 전염병.

엘리자베스는 마차를 잡으려다가 그대로 굳어서 자신이 헤쳐 나온 인파 쪽을 다시 보았다. 거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다시 보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변화 때문이 아니었다.

보비들의 총과 무기 앞에서 연약하기만 한 저 살점들 때문도 아니었다.

저들이 가진 전염력 때문이었다.

저들이 세상을 바꿀 거야.

우리가,

‘우리’가…….

세상을 바꿀 거야.

엘리자베스는 갑자기 그게 믿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잠시 그 자리에 자신을 통과하는 전율을 즐기며 서 있다가 천천히 걸어나와 마차를 잡았다.

* * *

마차 길이 막혀서 엘리자베스가 학술원에 도착한 것은 생각보다 늦은 때였다.

엘리자베스는 당연히 연구실로 향했는데, 여전히 루이 니콜라스 교수님은 계시지 않았고 케빈만 연구실에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교수님 책상에 아직도 놓여 있는 자신의 쪽지를 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교수님은?”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빈이 고개를 들었다. 케빈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엘리자베스 쪽을 보진 않으며 말했다.

“……케이 하커와 앰버 모건 양이 주최하는 파티에 초대되셨다는데요.”

그 파티 초대 리스트엔 원래 루이 니콜라스 교수님이 없었는데? 엘리자베스는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케빈을 보며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설레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 부교수 심사 발표! 미리 축하해, 케…….”

쾅!

엘리자베스가 밝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을 때 케빈이 엘리자베스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연구실을 나가버렸다. 엘리자베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얼굴을 구기고 케빈이 열고 나간 앞문을 열었다.

“너 사람이 말하는데…….”

엘리자베스가 케빈에게 따지려고 했을 땐 복도에 케빈은 없고 조셉 패거리 중 하나인 윌리스만 서 있었다. 그는 뭐가 재밌는지 웃음기가 가득한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불길한 기분에 시선을 피하며 다시 들어가려고 했다. 윌리스가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축하해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

윌리스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축하한다는 건 뭐고.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는 뭐지?

엘리자베스는 윌리스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윌리스가 씨익 웃으며 복도 창 너머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1층 회랑을 가리켰다.

“아직 못 봤나?”

“뭘?”

엘리자베스는 윌리스랑 대화하는 게 싫어서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며 말했다.

“부교수 심사 결과 말이야. 크. 역시 망했어도 한 번 왕족은 영원한 왕족이야? 같은 연구실에서 몇 년 동안이나 개고생한 선배를 제치고 3개월 만에 부교수까지.”

윌리스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윌리스가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아이고. 이제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에게 까불지 말아야지. 부교수씩이나 되셨으니 얼마나 무서울까. 전에 무도회에서도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에게 몇 마디 까불었다고 케이 하커가 우리를 죽여버릴 듯이 굴던데. 전 약혼자에 이어서 루이 니콜라스 교수님까지 꼬시다니. 대체 어떡하면 그렇게 인생을 편하게 살지?”

덜컥!

윌리스는 말을 마무리하기가 무섭게 그대로 창문틀에 등을 부딪혔다. 엘리자베스의 매서운 눈이 윌리스를 노려보며 엄청난 악력으로 윌리스의 멱살을 쥐고 창문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이었다.

“크억!”

윌리스는 등과 가슴을 강타한 힘에 격통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엘리자베스는 순식간에 하얗게 질린 윌리스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똑바로 말하라고. 알아듣게. 부교수가 뭐?”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스가 겁에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 뭐야. 무슨 계집애가 힘이 이렇게…….”

쾅!

윌리스가 지껄이자 엘리자베스가 더 세게 윌리스를 몰아쳤다. 윌리스는 그 엄청난 힘의 차이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픔보다 두려움이 윌리스의 심장을 조여왔다. 윌리스가 두려움으로 떨려오는 숨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 그게……. 오, 오늘 부교수 심사 결과 발표가……. 나, 났잖아. 거기에 네 이름이…… 내가 무, 무례했다면 사, 사과…….”

엘리자베스는 윌리스의 뒷말을 듣는 대신에 윌리스의 멱살을 그대로 허공에서 놔버렸다. 윌리스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그대로 주저앉는 것을 확인하지도 않고 엘리자베스는 1층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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