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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18화 (118/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18화

두 사람이 서로를 내내 노려보는 사이 테이블에 앉은 이들 모두가 침묵했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엘리자베스였다.

“서비에트.”

엘리자베스가 완벽한 발음으로 ‘서비에트’라고 말하자 케이가 피식 웃었다.

“정말 잘 하네.”

“누구한테 배웠는지 알아?”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러자 케이가 피곤한 듯 뒷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알아야 하나?”

“궁금해했잖아.”

엘리자베스는 다리를 꼬고 앉은 케이를 슬쩍 보더니 제 다리도 꼬았다. 그러곤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었다.

그걸 본 앰버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와 눈을 마주쳤다. 앰버는 잠시 망설이는 듯싶더니 뒤에 있는 서랍장에서 성냥을 꺼내어 엘리자베스에게 내밀었다.

“불 필요해요?”

엘리자베스는 팔각 성냥갑을 가만히 들여보다가 고개를 젓고는 담배를 물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위에 놓인 양초에 담배를 가져다대고 살짝 빨아들였다. 담배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프란시스가 살짝 웃고 말았다.

케이는 황당하다는 듯이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내가 저런다고?”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누구 흉내를 내는지 알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에드워드가 그제야 알았다는 듯이 놀란 얼굴로 손바닥을 마주쳤다.

“와, 정말 똑같아요. 이제 보니까 노동자 언어 연구가가 아니라 케이 연구가네요.”

에드워드의 말에 케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케이는 에드워드를 노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눈이 마주쳤다. 케이는 담배를 길게 빨아들이고 허공에 연기를 뱉어내는 그녀의 자연스러운 손짓을 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그냥 깽판 치는 거야. 네가 방금까지 한 것처럼.”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리고 앰버가 고소하다는 얼굴로 가져다주는 유리 재떨이에 담배를 톡톡 털어내며 말했다.

“누구한테 담배 배웠는지 또 안 물어봐?”

케이는 그제야 엘리자베스가 지금까지 했던 말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깨달았다. 로킨트 펍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엘리자베스와 나누었던 대화 말이다.

맥주를 마실 줄도 모르고, 노동자들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겁에 질려 있던 귀족 아가씨가 대체 어디서 맥주와 노동자의 언어와 춤, 그리고 담배를 배워왔는지 물었던 것 말이다.

그것들의 출처도 전부 엘우드 밀일까. 케이는 자연스럽게 흐르는 사고의 흐름이 결국 또 엘우드 밀이라는 이름 앞에 고이는 것을 느끼며 비릿하게 웃었다.

엘우드 밀은 대체 어떤 놈일까.

케이는 지난 3개월 동안 그 생각이 자신을 지켜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끔찍한 항해를 견뎌 이국 땅에 도착해, 도착하자마자 습격을 당하고, 그래서 죽을 뻔했을 때도. 또 습격 이후에 광활한 이국의 대지를 보며 수많은 별들 아래에서 뭐 그냥 이대로 죽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을 때도.

케이의 발을 지상에 붙들어놓았던 것은 우습게도 엘우드 밀이라는 얼굴도 본 적 없는 놈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네놈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나.

엘리자베스처럼 순수한 혈통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탁하지 않은 금발, 깨끗한 초록색 눈동자, 거기에 삐뚤어진 곳 없이 곧게 뻗은 콧날, 아름다운 입술에서는 무슨 달콤한 말을 뱉어내려나.

완벽한 궁정의 어휘를 사용하며 엘리자베스 앞에서 교양 있게 사랑을 고백하겠지.

사랑이라니.

케이에게 사랑은 초창기의 전기 같은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레본에 나타나 레본 땅을 일렁이게 했던 전기 같은 것 말이다.

어두운 밤에도 실내를 낮처럼 환하게 만들고 석탄이 묻은 더러운 노동자들의 팔과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증기 없이도 모터를 돌아가게 하는 어떻게 보면 기적 같고 어떻게 보면 거짓말 같은 것.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고는 하지만 생각만큼 효율이 높지 않아 다들 쓰지 않고, 그런 주제에 다들 그것만 있으면 만사가 해결될 것처럼 구는 것.

그래.

나한테 네가 말하는 사랑은 전기처럼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나타나 모두를 현혹시킨 마법 같았다.

나도 현혹되었으니까.

네가 사랑을 말할 때마다 나는 내 눈으로 본 적도 만진적 도 없는 그것에 자꾸만 마음을 빼앗겼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결국은 수많은 귀족들이 가정집에 전기를 들여놓고, 여전히 전기를 갈구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사업가들마저 전기로 미래를 논하게 되었듯, 나 역시 네가 말한 그 사랑을 끝없이 갈구하고 그 사랑의 미래를 논하게 되었고, 끝내는 그 전기가, 그 사랑이, 그 거짓말이 결국은 내 세상을 바꿨다.

그래서 네가 밉고…… 싫어.

내 세상을 바꾸고 떠나버린 나의 귀여운 거짓말쟁이.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보며 오만하게 웃었다.

“누구한테 배웠는데? 담배도, 노동자의 언어도, 춤도, 맥주도. 전부 누구한테서지?”

케이는 정신없이 거짓말에 빨려드는 자신을 막아설 칼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엘리자베스에게 그 말을 요구했다. 칼 같은 말.

그러나 케이가 들은 것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너.”

“뭐?”

케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엘리자베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너한테 배웠다고. 네가 내 약혼자로 지내는 2년의 시간동안 귀족들의 예의범절에 대해, 나의 삶에 대해 하나도 몰랐던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너만 봤어. 누군가가 네 가죽을 뒤집어쓰고 너처럼 말하고 너처럼 행동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너만…… 너만 봤어.”

엘리자베스는 말을 하다가 목소리가 갈라지자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더니 물잔을 찾아서 급하게 다 마셔버리곤 소매로 입술에 남은 물을 대충 눌러 닦았다.

“저 먼저……. 먼저 갈게요.”

엘리자베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앰버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

하지만 케이는 일그러진 얼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 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고 콜린에게 맡겼던 재킷을 찾았다. 그리고 그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포켓북을 찾아 앰버에게 내밀었다.

“이거, 귀족들의 예의범절을 담은 <신사 숙녀를 위한 에티켓북>이에요. 내가 말한 것 대부분이 글로 쓰여 있어요. 글 읽을 줄 알죠? 에드워드는요? 못 읽으면 앰버한테 도움을 요청해요. 도서관에 있길래 빌려왔어요. 꼭 돌려주세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머뭇거리며 책을 받아들었다. 앰버는 케이를 원망스러운 듯이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윌리엄 경이 주필로 있는 신문을 내는 출판사네요?”

“네. 그 바람둥이가 저술에 도움을 줬을 거예요.”

엘리자베스가 담담하게 말하는 동안도, 엘리자베스가 나간다고 하자 저택의 온 사람들이 다 나와볼 때까지도, 케이는 식탁 앞 자신의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기. 엘리자베스.”

앰버가 엘리자베스를 말리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엘리자베스가 먼저 식탁에 앉아서 포도주를 마시려는 프란시스에게 걸어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술 안 마시기로 했잖아요, 프란시스. 저 먼저 갈게요. 토비랑 같이 돌아가요. 저는 오늘은 진짜로 기숙사에서 자야 할 것 같아요. 피곤하고, 또 새벽에 할 일이 있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의 뺨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라. 너무 늦게까지 일하지 마. 엘리자베스.”

“네.”

엘리자베스가 프란시스에게 숙였던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케이와 엘리자베스의 눈이 마주쳤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눈을 보는 순간 잠시 주저앉고 싶었다. 케이의 붉어진 눈 속에 어린 감정을 엘리자베스가 순간 읽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그 순간 대체 왜 나는 그런 착각을 했을까.

엘리자베스는 저택을 나와서 혼자 학술원 쪽으로 잰 걸음으로 달리듯 걸어가면서 내내 생각했다.

왜 나는 순간 네 얼굴에서 사랑이란 글자를 읽었을까. 그건 너랑 절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데. 그냥 내가 너무 목말라 있었던 걸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며 종래에는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스스로가 케이에 대한 기대감에 젖어 있다는 게 창피했다.

* * *

다음 날 엘리자베스가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케이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고집불통 인사의 성질을 괜히 건드려놓았다는 생각에 후회스러웠다.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행동이 재밌었다는 듯이 굴었지만 에드워드는 케이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며 안절부절못했다.

엘리자베스는 내일 있을 초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앰버에게 이미 들은 차였으므로 자신이 내일 초대를 망친 장본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했다.

엘리자베스의 초조함과는 별개로 엘리자베스가 도움을 요청한 콜린, 토비, 메리, 셜리, 미리엄은 금방 자신들의 업무에 적응해갔다. 거기에 메리가 부른 메이드들까지 더해지자 집 안은 마치 클레몬트 공작부부의 ‘기념관’처럼 죽은 사람들의 물건을 박제해놓은 수준에서 탈피해 서서히 귀족들의 파티가 열리기에 적절한 장소로 변해갔다.

앰버가 어제 주문한 것들도 속속들이 도착했다. 특히 식기들은 새롭게 다 주문해서 찬장을 채웠는데 메리는 이 정도면 웬만한 후작가의 타운하우스에 못지않을 거라며 뿌듯해했다.

에드워드와 앰버 역시 완벽하진 않아도 귀족들이 쓰는 말을 못 알아들어 되물을 정도는 아니게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귀족들의 언어를 쓰지 못할 바엔 차라리 멜니아식 어투를 써서 되물으라고 충고해뒀다. 귀족들은 조금 다른데 천한 것보다는 아예 색다른 것을 더 후하게 평가해줄 것이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모든 준비를 마쳐놓고 마지막으로 앰버와 함께 초대 리스트를 점검했다. 앰버가 보여준 초대 리스트를 보며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아는 이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충고를 더했다.

앰버는 응접실에 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문득 고개를 들어 창문을 내다보는 엘리자베스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케이는 아무래도 새벽에나 올 것 같은데요.”

“케이를 기다린 거 아니에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얼른 창가에서 시선을 돌렸다. 앰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겠죠.”

“그래서 세디온 후작의 경우에는…….”

엘리자베스는 또 설명을 이어가다가 밖에서 토비가 깡통을 잘못 차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행동에 짜증을 느끼다 앰버와 눈이 마주치고 시무룩하게 말했다.

“나 때문에 케이 하커가 일에 집중 못하는 것 같아서요. 미안해서 그러는 거예요.”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변명 아닌 변명에 별 대꾸 없이 조용히 말했다.

“내일 올 거죠?”

“그건…….”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좀 곤란해요. 알다시피 난 케이의 전 약혼자잖아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식탁 근처에서 톱햇을 쓰고 인사를 중얼거리고 있던 에드워드가 힐끔 그녀 쪽을 보았다. 앰버 역시 ‘전 약혼자’라는 말에 잠시 움찔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드워드가 식탁에 앉아서 에드워드의 인사 자세를 봐주고 있던 프란시스에게도 물었다.

“……프란시스 부인께서도 못 오시나요?”

프란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혼자서는 자신 없는데.”

“자신 없을 게 뭐가 있어요?”

그 말에 프란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에드워드의 어깨선을 다시 바로 잡아주며 말했다.

“열심히 했는데. 방금 인사 엄청 잘 했어요. 에드워드 씨.”

프란시스의 말에 에드워드의 얼굴이 확 펴졌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어 보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앰버 양의 옷을 좀 봐주고 올게요.”

엘리자베스는 앰버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가서 미리 골라두었던 옷을 앰버에게 권했다. 엘리자베스가 최대한 정숙한 것으로 골랐다고는 하지만 앰버의 굴곡진 몸매와 옷이 만나니 정숙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살짝 곤혹스러워하며 벌어진 가슴께를 조금 잡아당겼다. 엘리자베스는 장 위에 흩어져 있는 액세서리들 틈에서 가장 옷과 어울리는 것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딱히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결국 엘리자베스의 손이 멈췄다. 엘리자베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주인의 허락도 없이 서랍장을 열었다. 그리고 붉은 머리핀을 꺼내어 앰버의 벌어진 가슴께를 여미는 데에 썼다.

“머리핀보다 이렇게 브로치처럼 쓰는 것도 좋을 거예요. 옷이랑 어울려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손을 저었다.

“나랑은 안 어울려요. 엘리자베스.”

“아니에요. 어울려요. 두 사람은 모르지만.”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앰버가 잠시 입을 열었다가 아무 말도 없이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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