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혼하러 돌아왔다 117화 (117/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17화

‘앰버가 켈토에 갔다가 우연히 사왔다는데.’

‘거짓말이에요! 저 남자가 사다 달라고 했다구요!’

엘리자베스는 기억 속에 잠겨 있던 머리핀과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비교했다. 같은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한. 전생에서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내밀었던 머리핀과 닮았지만 똑같지는 않은 디자인의 머리핀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들고 그대로 굳어진 채로 자신이 골랐던 앰버의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보았다. 그러고는 드레스와 목걸이 위에 머리핀을 포개어 놓았다. 어울리나?

엘리자베스는 그런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건 대체 누구의 것이었을까?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전생에서는 내 것이었지만 이번 생에는 앰버의 것일 수도 있을까? 아니면 전생에서 내 것이 된 것은 그저 내가 케이의 옆을 차지하고 비키지 않았기 때문일까. 운명을 거슬러서.

엘리자베스는 우습게도 시간여행기라는 엄청난 문명의 산물을 접하고 난 뒤로 자꾸만 운명을 거론하게 되었다. 자꾸만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엘리자베스를 잡고 놔주지 않는 것만 같았다.

엘리자베스가 도무지 결판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생각들로 골머리를 썩고 있을 때,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자베스는 물건을 훔치러 온 도둑이 된 기분이 들어 얼른 머리핀을 다시 서랍 안에 넣었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자 문 안으로 이미 들어온 앰버가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쳤다.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보더니 밝게 들어오던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앰버의 질문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엘리자베스가 다급하게 나가려고 할 때였다. 앰버가 엘리자베스를 위로하고 싶은 듯 방 안으로 들어왔다가 엘리자베스가 미처 끝까지 닫지 못한 서랍장을 보곤 눈을 가늘게 떴다.

“아. 내가 줄 게 좀 있어요.”

앰버는 부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지금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에 가슴께를 살짝 쓸어내리며 말했다.

“나중에요. 나중에.”

“지금 줘야 될 것 같아요.”

앰버는 엘리자베스가 자꾸만 시선을 피하자 다급하게 서랍 안에서 머리핀을 꺼냈다. 붉은 루비가 박힌 머리핀.

엘리자베스는 머리핀을 다시 보는 순간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가 시선을 내리자 앰버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모레 있을 파티에 엘리자베스도 올래요?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오늘 에렌델 스트리트에서 엘리자베스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 귀걸이도 샀어요. 내가 드레스도 하나 빌려줄게요. 그 드레스랑 귀걸이, 거기에 이 머리핀을 하면 딱 좋을 것 같아요. 왜요? 붉은색은 단정하지 못해서 싫은가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었다. 엘리자베스의 흐려진 눈을 본 앰버의 환하게 웃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앰버가 무슨 말을 하기에 앞서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멜니아에서…… 사온 거예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앰버가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가 사왔어요.”

“알겠어요.”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대답에 별 반응 없이 알겠다고만 하고 돌아섰다. 그러자 앰버가 다급하게 엘리자베스를 붙잡듯 말했다.

“사실은 케이가 산 거나 다름없어요. 거짓말했어요. 미안해요.”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산 거나 다름없는 건 뭐예요?”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심각하게 바라보며 문고리를 잡은 엘리자베스에게로 다가갔다.

“음……. 나랑 케이 하커가 멜니아에서 헤어지기 전에 우리 짐이 좀 섞였어요. 그때 케이가 그려놓은 스케치 속에 이 머리핀이 있더라구요. 루비 머리핀이라니. 케이 하커가 옷 만드는 일을 했던 건 알죠? 그러니 직접 디자인한 머리핀을 선물하고 싶었던 거겠죠. 그래서 내가 그 스케치를 훔쳐다가 멜니아에서 업자에게 부탁해서 실물로 만들었어요.”

엘리자베스는 왜 이 머리핀이 전생과 닮은 듯 다른지 이해했다. 이 머리핀은 어떤 가게에 전시되어 있던 게 아니라 앰버가 직접 의뢰해 만든 것이었으니까. 거기에 만든 시점은 물론이요, 만든 사람도 다를 가능성이 높으니 같은 디자인이라고 해도 묘하게 다른 지점이 있었던 것이다.

이번 생에서의 엘리자베스의 궤적은 이 머리핀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뭔가 다르지만, 또 같은. 그런 운명을 반복하는 삶.

엘리자베스가 얼굴에 은은한 조소를 띤 채 말했다.

“근데 이걸 왜 나한테 줘요?”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의 아내였을 때, 세디온 타운하우스에서 담배를 피우던 두 사람을 떠올렸다.

실컷 싸우고 나서 타운하우스에 초대받아 도착해 또 창가에 서서 뚱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금방 사라져버린 케이 하커가, 자신의 남편이, 앰버와 있던 것을 보았을 때 자신은 무슨 생각을 했던가. 둘이 참……. 잘 어울린다, 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마치 어떤 미술 작가가 한 프레임 안에 넣겠다고 결심한 인물들처럼. 그래서 예술 같은 순간이 끝나고 종래에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고 해도 두 사람은 영원히 서로 비슷한 빛깔을 품고 살아갈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나.

“왜냐뇨. 당연히 케이가 당신을 위해 만들고 싶어 한 거니까…….”

앰버가 당황해서 말하자 엘리자베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뭘요?”

“나를 위해서 만들고 싶었는지. 아닌지. 그걸 앰버가 어떻게 알아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엘리자베스의 의심을 알겠다는 듯 한숨처럼 길게 숨을 뱉어내고는 머리핀을 가리켰다.

“루비잖아요. 엘리자베스. 난 빨간 머리를 가졌어요. 당신은 아름다운 금발을 가졌구요. 누가 빨간 머리 여자한테 루비를 줘요. 빨간 머리를 가진 여자가 머리 위에 빨간 보석을 얹을 리가 없어요.”

엘리자베스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배려심 같은 게 없나 보죠, 케이 하커한테는.”

“케이는 옷가게에 엄청 드나들었어요. 적어도 그 정도는 알 거예요. 그 정도는……. 그 정도는 케이를 믿어 봐도 되잖아요. 그리고 누가 봐도 이 머리핀은 당신한테…….”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나한테 어울린다구요? 이제 그만. 그만해요. 내가 아는 케이 하커는 사기꾼이에요. 거짓말쟁이라구요. 바느질도 못 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잘 하고, 처음엔 나보고 멜니아로 떠나라더니 결국은 자기가 떠나버렸잖아요. 그런데 대체 이 거짓말쟁이의 마음을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뭘 믿으라는 거예요.”

“케이만큼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은 없어요.”

“헛소리.”

엘리자베스는 앰버를 노려보았다. 자신이 말도 안 되게 무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파도처럼 넘실대는 마음을 뱉어내지 않고는 자신이 쓸려나가기 직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을 더 듣기 싫어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자 리오든의 퀘퀘한 매연과 오수 냄새를 잔뜩 재킷에 묻혀온 케이 하커가 현관문에 서 있었다.

케이 하커는 계단 위에 서 있는 엘리자베스를 보더니 천천히 시선을 옮겨 자신의 코트를 받아주는 콜린에게 물었다.

“아직도 저녁 식사를 안 했나?”

케이의 질문에 콜린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셜리 부인께서 레시피를 익히는 데 시간이 좀 걸리셔서요. 방금 메리가 돌아와서 돕고 있습니다. 금방 돼요. 같이 식사하시죠.”

콜린의 말에 케이가 삐뚤빼뚤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보며 말했다.

“저 여자가 나랑 먹고 싶어 할지 모르겠는데.”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주먹을 꽉 쥐었다. 엘리자베스가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심정으로 위를 힐끔 보자 거기엔 곤란한 표정으로 내려온 앰버가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앰버를 노려보며 말했다.

“식사 시에 주의해야 되는 예의범절이 제일 복잡하고 어려운 법이야. 같이 먹으면서 가르쳐줄게.”

엘리자베스는 말을 마치고 케이를 보았다. 그러자 케이는 별 대꾸 없이 식사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재빨리 걸어온 엘리자베스가 현관 앞에 놓여 있던 케인으로 케이의 가슴팍을 꾹 누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엘리자베스의 행동에 앰버는 물론이고 에드워드와 프란시스도 당황한 얼굴로 두 사람을 주시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집주인은 손님부터 안내하는 거야. 손님부터.”

엘리자베스는 케인을 위협적으로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자 케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고기를 자르는 건 집주인이 해야 하는 일이야. 나이프를 들 때는 좀 더 품위 있게. 자세가 구부정하잖아.”

엘리자베스는 식사 자리 내내 잔소리를 했다. 앰버와 에드워드에게도 많이 했지만 엘리자베스의 대부분의 잔소리는 대상이 케이였다.

앰버와 에드워드, 케이를 놓고 보자면 그나마 귀족들의 예의범절에 대해 제일 잘 아는 것은 케이였음에도 엘리자베스는 유독 케이에게 엄격하게 굴었다. 케이가 물을 마시는 것 하나, 손을 드는 손가락 위치 하나, 나중에는 억양 하나하나까지 고쳐주었다.

케이가 앰버에게 간단한 말을 했을 때였다. 엘리자베스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똑바로 발음해. 웅얼거리지 말고. 터 발음을 똑바로 하란 말이야. 워—터. 따라해 봐.”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뭘 어떻게 발음했다고?”

“물 좀 줄래?”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질문에 케이의 발음을 따라하며 앰버에게 말했다. 완벽한 노동자의 발음이었다. 그걸 들은 에드워드가 눈치 없게 놀란 눈으로 말했다.

“와. 엘리자베스, 누가 들으면 언어학자인줄 알겠어요. 노동자 발음은 언제 그렇게 익혔어요?”

에드워드의 말에 케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러게. 화학을 한다더니 이제 언어를 연구하기로 했나? 내가 실험체고?”

케이는 오만한 얼굴로 에드워드가 내미는 물을 받아들고 몇 모금 마시더니 입가에 남은 물을 소매로 닦았다.

“냅킨으로 닦아야지.”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잔소리가 날아오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곤 다리를 꼬았다.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일말의 품위도 없이 케이는 제 머리를 헝클이며 엘리자베스를 보고 말했다.

“서비에트1).”

“뭐?”

엘리자베스가 이를 악물자 케이가 피식 웃으며 재밌다는 듯이 여전히 꼰 다리로 이제는 팔까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포크로 음식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서비에트로 닦아야지. 이렇게 말해야 된다고. 다시 말해봐.”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엘리자베스가 식기를 내려놓자 프란시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뭘 뭐 하는 거야. 네가 나한테 하나 가르쳐줄 때마다 나도 가르쳐주는 거야. 네 연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를 마주 노려보다가 냅킨을 집어들어 제 입가를 닦아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