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16화
케이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프란시스를 노려보았다.
프란시스는 담담한 얼굴로 케이를 마주보더니 말했다.
“한가한가보구나. 무슨 일인지 몰라도 멜니아 고위층과 리오든 귀족들을 연결하는 일이라니 듣기만 해도 레본 사업가에게는 중요하디중요한 일인데. 그런 일에 자존심을 개입시키다니.”
프란시스의 말에 케이는 창피함으로 새빨개진 얼굴로 입을 가리고 있는 엘리자베스를 힐끔 보고 말했다.
“이곳에 올 리오든 귀족들이 뒤로 우리들을 평민이라고 제 아무리 비웃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돈 앞에서는 활짝 웃어줄 겁니다. 그게 잘나신 귀족 나리들의 습성이니까.”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했다. 그러나 프란시스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넌 귀족들을 몰라. 네놈은 그저 하커 가의 사생아로 네 아버지의 등 뒤에 숨어 만찬에 불려 다닐 뿐이었으니. 귀족들을 모르니까 쉽게 비웃을 수 있는 거야. 하커 사의 돈으로 먹고 사는 레본이 어떻게 아직까지도 로버트에게 ‘경’ 칭호 하나 허락하지 않았는지 아니?”
프란시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등등한 분위기는 케이 하커에 비견해도 절대로 뒤지지 않았다.
“레본은 왕정이야. 저 아름다운 여자가 온 멜니아처럼 대통령이 있는 곳이 아니라고.”
프란시스는 앰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앰버는 고소하다는 눈으로 케이를 보고 있었다.
“돈이 아무리 무섭다고 한들 레본에서 권력은 돈이 아니라 핏줄인 채 몇 백 년을 이어져왔다. 왕의 피가 얼마나 섞였는가. 어떤 가문의 피를 이었는가. 기존의 권력을 쥔 것들이 쉽게 권력을 놓아줄 것 같으냐? 그들은 레본과 함께 망하더라도 절대로 자신의 권력을 넘겨주지 않아. 권력을 나눠주는 거면 몰라도.”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귀족들의 예의범절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잘 숙지하고 있었던 프란시스의 모습 하나하나를 떠올렸다. 어떨 때는 귀족보다 더 귀족처럼 프란시스는 강박적으로 귀족의 예의범절을 지켰다. 프란시스가 애초에 그런 예의범절을 배워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엘리자베스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건 로버트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예의범절에 맞춰서 고분고분 개처럼 기는 모습을 보여야 자신들이 여전히 자비를 베푸는 쪽이라는 우월감에 휩싸여 조금이라도 권력을 내주겠지.”
“우리는 그들에게 자비를 구걸하는 게 아닙니다. 자비를 내주려는 거지.”
케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분노한 옆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프란시스가 그렇게 어렵게 배운 예의범절을 또 케이에게 가르쳐주려는 이유 역시 엘리자베스는 알 수 있었다. 케이를 돕기 위해서.
프란시스는 반박할 말을 뱉으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때 엘리자베스가 서둘러 다시 한 번 했다.
“엣취!”
연기를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거슬린다는 듯 얼굴을 구기고 자신을 보는 케이를 보았다. 케이가 밖으로 나가려는 듯하자 엘리자베스가 얼른 말했다.
“그럼 우린 밖에서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정말이야.”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새빨개진 얼굴을 보고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곤 토비와 메리, 콜린, 프란시스, 자신이 구매한 이 타운하우스에 쳐들어온 손님들을 보더니 황당하다는 듯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프란시스가 케이가 쥐고 있다가 놓은 문고리를 잡고 현관문을 열더니 말했다.
“잘 됐어. 어차피 나가는 길이라면 같이 에렌델로 가자. 저 아가씨 옷부터 시작해서 세간 살림까지 새롭게 단장할 게 한두 개가 아니야. 직접 와보니 더 엉망이구나.”
프란시스는 그렇게 말하며 앰버와 이 집안을 가리켰다. 이미 승부는 정해졌다는 얼굴이었다.
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프란시스를 노려보다 혀를 쯧 차곤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더니 나머지 사람들이 얼어 있는 사이에 벌써 저만큼 걸어가서 소리쳤다.
“토비! 당장 나와! 이번 계절치 급료를 전부 치러주마. 부인이든 누구든 하여튼 이 잔당들이 원하는 곳으로 마차를 끌고 가줘. 나는 외출하고 돌아올 거니까.”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구기고 말했다.
“언제 돌아오는데?”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뒤를 돌더니 말했다.
“저녁 식사가 끝날 쯤. 아무리 가정교사를 하기로 했어도 적어도 네가 죽여버리고 싶다는 남자와 식사는 피해야 되지 않겠어?”
케이는 정원 앞에 서서 오만하고 건방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미소를 보며 저도 모르게 케이에게 붙잡혔던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저 이상한 놈.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무슨 말을 더 하기도 전에 이미 정원을 가로질러 나가버렸다. 엘리자베스와의 결혼 생활 내내 절대로 쓰지 않을 것 같았던 톱햇까지 쓰고 말이다.
* * *
어쨌거나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 같은 것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와 메리가 프란시스가 적어주는 리스트에 따라 장을 보고 오는 사이에 셜리를 데리고 같이 입구에 비치할 방문카드를 만들었다. 원래는 인쇄소에 맡기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시간도 없고 사실 방문카드라는 게 형식적인 것이니 문 앞을 장식할 정도만 있으면 될 것 같아 직접 만든 것이었다.
방문카드를 다 만들고 나자 셜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자베스 앞에 앉아 말했다.
“저는 이런 좋은 집에서 메이드로 일해본 적이 없는데요, 아가씨.”
“괜찮아요. 저도 없어요, 부인.”
셜리는 부인이라는 말에 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계속 부인이라고 부르세요? 그런 건 귀족들끼리나 부르는 호칭이잖아요.”
“꼭 귀족한테만 쓰이는 호칭은 아니에요. 레이디라고 부르지 않는 기혼녀들에게는…….”
엘리자베스는 찬찬히 셜리에게 메이드로서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정보들을 전달했다. 메리가 초대 당일에는 자신이 아는 믿을 만한 메이드를 두 명 정도 알아본다고 했으니 사실 셜리가 직접 손님들을 만날 일은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부엌일을 돕다가도 우연히 귀족들을 마주칠 수 있으니, 호칭이나 어휘 선택에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됐다.
리오든의 귀족들은 프란시스의 말대로 자신들의 세계가 몰락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더더욱 자신들의 권력을 넘겨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돈도 없고, 난잡한 성생활과 돈 때문에 여기저기서 들여온 양자들 덕에 프란시스가 말하는 그 핏줄의 개념이라는 것도 흐릿해진 귀족들에게 그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문화였다.
수저를 잡는 법, 서로를 부르는 법, 걷는 법, 웃는 법, 어떨 때는 입술을 움직이고 표정을 짓는 법까지. 귀족들은 자신들만의 공기를 만들기를 즐겼다. 그리고 그 공기 속에서 숨 쉬는 법을 모르는 우매한 이들은 질식하기를 바랐다. 엘리자베스는 그 유독한 공기 속에서 살아왔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셜리에게 말했다.
“물론 이 모든 게 다 멍청해 보인다는 건 알아요, 셜리 부인. 그래도 멍청한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필요한 일이에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셜리는 엘리자베스가 급하게 늘어놓는 수많은 정보들 앞에 겁을 먹은 표정을 살짝이나마 풀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셜리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렵긴 하지만 케이 씨한테 도움이 된다고 하니 열심히 해야죠.”
셜리는 의욕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엘리자베스가 미리 주었던 귀족들의 레시피를 익히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셜리의 뒷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케이에게 애정을 많이 가진 것처럼 보여요. 미리엄 씨도, 셜리 부인도.”
엘리자베스의 말에 셜리가 앞치마를 질끈 묶으며 말했다.
“그럼요. 케이 하커만큼 우릴 많이 도와준 사람은 없죠. 돈도 많이 빌려줬지만 이제는 제약 공장이 된 그 공장이 로버트 사장님에게서 케이 씨에게로 넘어가면서 노동자들 다 살 만해졌거든요.”
셜리의 말에 응접실에 앉아서 프란시스에게 찻잔을 드는 법을 가지고 한참 혼나고 있던 에드워드를 힐끔 보며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그럼 저 사람도 케이와 함께 일하던 노동자인가요?”
아까 보니 에드워드와 미리엄은 아는 사이인 듯 서로 눈인사를 했었다. 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에드워드요? 에드워드도 9살 때부터 공장에서 일한 동료예요. 일한 지 1년 만에 물레를 돌리는 벨트에 발이 끼어서 발을 절게 됐어요.”
엘리자베스는 셜리의 말에 놀란 눈으로 응접실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조용히 말했다.
“큰 사고잖아요?”
셜리는 엘리자베스의 말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아무 말 못했죠, 에드워드도. 에드워드는 그게 3번째 구한 직장이었고 앞에 두 직장에서 쫓겨난 상태였거든요.”
“아홉 살에요?”
“리오든 노동자들은 보통 말만 떼면 일을 시작해요.”
엘리자베스는 셜리가 말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노동자들의 생태보다도 셜리의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 때문에 의기소침해졌다.
열여덟 살 때부터 틈만 나면 케이를 꼬여내기 위해 공장에 발을 들였는데도 단 한 번도 공장 노동자들의 생태를 제대로 궁금해해본 적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궁금했을 뿐, 케이의 세상이 궁금하진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엘리자베스가 발을 들인 케이의 세상은 뭐랄까…… 도무지 사랑이란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로 치열하고 거칠었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에게 몇 번이나 등짝을 맞으며 찻잔을 들어올리는 에드워드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뭐 그래도, 케이 씨가 공장장이 되고 나서는 훨씬 상황이 나았어요. 여기저기서 불평을 들으면서도 케이 씨는 안전에 민감하게 굴었거든요. 사고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사고가 나면 후처리도 대부분 공장에서 처리해줬구요. 그래서 다들 케이 씨 공장에서 일을 못해 안달이었는데요.”
엘리자베스는 셜리의 말을 들으며 복잡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위층에서 앰버한테 어울릴 법한 보석을 좀 찾아볼게요. 앰버가 찾아봐도 좋다고 했으니까.”
엘리자베스의 말에 셜리가 알겠다고 한 뒤 다시 조리에 들어갔다.
엘리자베스는 의기소침해진 표정으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앰버의 옷방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잔뜩 어질러지고 술과 담배 냄새, 그리고 향수 냄새가 뒤엉킨 곳을 찾으니 그곳이 바로 앰버의 옷방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뒤져봐도 좋다고 한 옷장 하나와 서랍장 하나를 열었다.
앰버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다른 곳도 맘대로 보라고 했지만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앰버의 비밀을 하나씩 더 알게 될 때마다 자꾸만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느낌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옷장과 서랍장을 열어 프란시스가 말한 ‘그나마 가장 조신하고 귀족적인’ 옷과 보석을 찾아보았다. 후보군은 초라했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나마 리오든 미혼 여성 귀족이 입을 법한 여리여리한 드레스 하나를 찾아서 그 위에 어울리는 목걸이를 올려놓고 고민했다.
반지와 귀걸이 없이 간단하게 실크 장갑과 머리핀만 더해도 좋을 텐데.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생각 없이 허락받지 않은 서랍장을 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서랍장 위 칸에서 익숙한 머리핀을 발견하고 그대로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