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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15화 (115/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15화

“오랜만이야, 앰버.”

미리엄이 쭈뼛거리며 인사하자 앰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리엄에게 달려가 미리엄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세상에! 미리엄!”

앰버의 행동이 워낙 빨랐던 탓에 셜리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어이가 없다는 듯이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앰버는 셜리의 표정변화는 눈치채지 못한 듯 말했다.

“지옥문 구경은 어땠어? 문 색깔은 맘에 들던가?”

앰버의 말에 미리엄이 키득거리며 대답하려다가 셜리의 얼굴을 보곤 잽싸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어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앰버.”

미리엄이 뒤로 물러나자 셜리가 미리엄의 등짝을 세게 때리고는 그의 목덜미를 낚아채 더 뒤로 나오게 했다. 앰버는 그 모습을 보며 살짝 놀란 눈을 하곤 시선을 옮겨 프란시스를 보았다. 앰버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누구신지 딱 알아보겠어요. 저는 앰버 모건이라고…….”

앰버가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프란시스는 앰버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스쳐지나갔다. 엘리자베스가 당황하는 사이, 메리와 콜린, 토비 역시 프란시스를 따라 앰버를 무시하고 정문 앞에 섰다.

프란시스는 전에는 클레몬트 공작가였던 타운하우스를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 하커가 사들였다는 집이……?”

프란시스의 중얼거림에 앰버가 무시당한 손으로 팔짱을 끼고 말했다.

“맞아요. 레트니 애비뉴 2번가. 컬로든이 보이는 노스 리오든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이죠.”

앰버의 말에 메리가 앰버를 째려보았다.

“누가 본인한테 물어봤나. 왜 맘대로 대답을 한대……?”

엘리자베스는 콜린과 메리, 토비, 프란시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이 강력한 적의의 정체를 알 것만 같아서 민망한 기분으로 메리의 팔을 잡았다. 그만! 그만하라고.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때 프란시스가 앰버를 쳐다보며 말했다.

“컬로든 궁에서 두 번째로 가까운 집이 노스 리오든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이라면 노스 리오든에는 평화란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군.”

프란시스는 그렇게 말하곤 집의 안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앰버의 허락은 구하지도 않고 쌩하니 타운하우스 정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미리엄은 앰버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했지만 그에게 셜리의 억센 손길을 거부할 권리는 없어 보였다. 그렇게 앰버와 단둘이 남겨진 엘리자베스가 변명하듯 말했다.

“마, 말은 저렇게 하셔도 다들 내일 모레 있을 초대 때문에 온 거예요. 제가 도와달라고 했거든요. 새로운 사용인을 구하는 건 시간이 걸리는 일인데다가 저들만큼 케이를 좋아하고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진 사용인들은 없을 거예요. 프란시스는 사교계에 자주 다녔기 때문에 평민이어도 귀족의 예의범절을 잘 알아요. 그리고…….”

“벌써 맘에 들어요.”

“네?”

엘리자베스가 변명처럼 주절거리기 시작한 말을 끊고 앰버가 원인 모를 미소를 띠자 엘리자베스는 벙쪘다. 앰버는 쩔쩔매는 에드워드 앞에서 허리를 곧게 펴고 뭐라 말하고 있는 프란시스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프란시스 말이에요. 케이랑 닮았네요. 무척이나.”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둘이 닮았어요.”

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전부 닮아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궁금했다.

케이와 프란시스는 확실히 닮았다. 특히나 결코 굴욕을 배우지 않는다는 점이, 서로 닮았다. 그렇기에 절대로 강제로 그들을 가질 수 없고 다스릴 수 없었다.

그러니 엘리자베스는 소유하기 어려운 것들만 가지고 싶어 하는 셈이었다.

* * *

프란시스를 따라 엘리자베스가 타운하우스 내부로 들어갔을 때는 케이 하커가 2층에서 막 내려오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하얗게 질린 케이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케이는 멜니아식 정장인 턱시도를 입고 있었는데 커프스 장식이며 베스트에 달린 장식용 단추 따위가 엘리자베스에게는 무척이나 낯익은 것이었다.

그가 가면무도회에서 착용했던 것들이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그날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던 케이와의 달콤하고, 그래서 끔찍했던 키스를 떠올리며 어딘가에 숨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보다도 케이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거칠고 핏기가 없어 보여서 엘리자베스는 본능적으로 난간을 잡고 말했다.

“너 팔…….”

엘리자베스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망설였다. 팔의 상처를 아는 척해도 되는 걸까? 엘리자베스가 망설이는 사이에 케이가 거칠어진 입술로 말했다.

“대체 누가 이 집에 저 여자를 들여도 된다고 했지?”

케이는 현관에 서서는 표정 변화도 없이 머리를 매만지는 프란시스를 노려보았다. 에드워드가 프란시스의 옆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저, 저한테 물으신 거예요? 그, 그게 사실 제가 들인 건 아닌데…….”

에드워드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케이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 거친 기운은 엘리자베스로서도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케이 하커가 저런 기운을 뿜어낼 때면 엘리자베스는 물론이고 사용인들, 그리고 케이의 친구들까지 어느 누구 하나 빠짐없이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다들 케이가 미친놈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다가, 케이의 저 숨소리는 미친놈이 제대로 미쳐보겠다는 선전포고에 가까운 숨소리였으니까.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의 비겁한 지목에 에드워드를 흘겨보며 말했다.

“내, 내가……. 도움을 요청했어. 이제 겨우 이틀 남았는데 그 기간 동안 내가 세 명을 다 가르칠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 말을 들은 케이는 왜인지 부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는 난간을 거의 부술 듯이 꽉 쥐고 포식자처럼 프란시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모두가 겁에 질려 있는 상황에서도 프란시스는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케이는 계단 끄트머리에 엘리자베스가 잡고 있는 난간까지 손을 내렸다.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손끝이 닿았다. 엘리자베스가 흠칫 난간에서 손을 떼려고 하자 케이가 다소 거친 몸짓으로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당겼다.

“즐거워 보이는군.”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동그래진 눈을 보며 턱을 악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턱에 돋아나는 힘줄을 보며 어깨를 움찔하며 말했다.

“무슨 뜻이야?”

“고매하신 귀족 아가씨께서 귀족의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모르는 멍청하고 천박한 평민 셋을 가지고 선생 노릇을 하니까 즐거워 보인다는 말이지.”

케이의 목소리는 텁텁하고 거칠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숨소리를 가까이서 느끼자 그 밤이 다시 떠올랐다.

네가 감히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나에게 키스를 했던 밤. 내 입술에 네 입술을 짓이기고 혀를 섞고 또 허리를 다급하게 끌어안으면서 했던 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뭐든 해보라고. 감히 나를 위로했던 말.

그와 동시에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며칠 전 로킨트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당신은 그 여자가 얼마나 왕족인 걸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몰라.’

‘그 여자와 그 여자의 부모가 얼마나 감쪽같이 나를 속였던지.’

‘집도 부모도 그렇게 목매달았던 신분도 잃고 가난뱅이가 된 게 불쌍했으니까. 난…… 저 여자가 그냥 불쌍해.’

‘어찌나 대단한 장식품이던지. 모두 왕족의 유서와 기품이 깃들어서 팔아치울 수가 없었어. 왜겠어. 이제 그런 왕족의 유서와 기품을 사주는 곳은 없으니까. 그건 전부 망해버린 레본의 증거물일 뿐이니까.’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손을 쥐고 살기등등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케이의 등 뒤 벽에 걸린 액자들을 보았다. 엘리자베스의 부모가 천문학적인 액수의 빚을 지면서 구매했던 액자들.

그 안의 그림과 액자 모두 컬로든 궁이나 왕족의 별장에도 있는 것들이었다. 어떤 것들은 도무지 빚을 내더라도 같은 그림은 구매할 수가 없어서 그림은 가짜고 액자만 진짜인 것도 있었다.

케이의 말이 맞다. 이 집은 모두 허울만 좋은 쓰레기. 이 집을 꾸민 엘리자베스의 부모도, 엘리자베스도 그렇다. 그녀의 인생은 언제나 보기 좋은 장식품에 불과했다.

그렇더라도…….

엘리자베스는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끼며 케이의 손에 잡힌 제 손을 빼냈다. 이 곰처럼 커다란 사내의 몸집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엘리자베스는 이제 갖추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거친 움직임에 케이의 몸이 유려하게 튕겨나갔다.

엘리자베스는 아직 케이의 온기가 남은 손목을 매만지며 케이를 노려보았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대도, 아니, 그랬기에 더더욱, 너만이 나의 인생에서 진짜였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힘을 못 이겨 튕겨나간 주제에 금방 중심을 잡고 오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케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 넌 멍청하고 천박해. 그건 네가 평민이라서가 아니야, 케이 하커. 그건 네가 멍청하고 천박하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배워!”

엘리자베스는 울컥해서는 뒤돌아서 에드워드를 노려보았다.

“배우지 않으면 바뀔 수가 없고, 바뀔 수가 없으면…….”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의 등 뒤로 슬며시 현관 안으로 들어오는 앰버와 눈이 마주쳤다.

바뀔 수가 없으면 바꿀 수도 없어.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삼키며 프란시스와 눈이 마주쳤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멜니아의 고위층 인사인지 뭔지를 리오든 귀족들에게 소개할 수도 없어. 멍청하긴.”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러는 순간,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케이가 계단을 빠르게 내려왔다.

“그러겠지. 하지만 네 말대로 나는 신사가 될 가능성이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니 포기하겠어.”

케이는 프란시스를 노려보며 톱햇을 벗어들고 인사했다.

“그럼 전 이만.”

“케이…….”

앰버가 이미 현관문을 열고 있는 케이를 부르려고 하자 프란시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고얀 녀석. 손님들의 방문을 거절하다니. 그럼 어쩔 수 없구나. 감기기운이 있는 엘리자베스와 이 많은 손님들이 전부 밖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무슨…….”

프란시스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감기기운? 내가 감기기운이 있던가?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제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비를 맞고 나서 내내 연구실에 박혀서 잠도 제대로 못 잤지만, 최근의 엘리자베스는 겨우 그런 정도의 과로로 몸이 아픈 일이 없었다. 괴물이 되어가는 이 상황에서의 극히 드문 장점이었다.

“나가자. 다들 나가요. 원래 사교계에서는 초대 받지 못한 손님은 밖에서 기다리는 법이에요.”

프란시스는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녀는 케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손을 잡는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프란시스와 케이의 관계를 위해. 이 고집불통 케이 하커를 데리고 까탈스러운 귀족 손님을 맞이할 에드워드와 앰버를 위해.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팔짱을 끼고 얼른 입을 손으로 가리며 이렇게 했다.

“엣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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