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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14화 (114/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14화

앰버는 엘리자베스를 굳이 왕립학술원까지 데려다주고는 빙 둘러 타운하우스로 돌아갔다.

엘리자베스는 왜인지 몰라도 너덜너덜해진 기분으로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아직도 실험을 시작하지도 않은 엘리자베스에게 분노한 루이 교수님의 화난 얼굴이 엘리자베스를 맞이했다.

오늘 출근도 늦게 하신 것 같은데 오자마자 실험 결과지부터 찾으시다니! 엘리자베스는 낭패를 본 얼굴로 루이 니콜라스 교수의 책상 앞으로 불려갔다.

“넌 대체…… 왕립학술원에 왜 오는 거냐? 나들이야? 어? 나들이냐고!”

“아, 아뇨!”

엘리자베스는 루이 니콜라스 교수님은 자신이 키워보고 싶은 제자에게는 유독 엄격하시다는 케빈 퍼킨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 어쩌면 나를 정말로 유망한 제자로 생각하시고…….’

“이럴 거면 나가!”

엘리자베스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루이 니콜라스 교수님 앞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건 위대한 과학자가 되기 위한 관문 같은 거다. 관문…….’

콰광!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할 때 루이 니콜라스 교수님이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손수 앞문을 열어주셨다.

“아이고, 우리 제자님은 손이 무거우셔서 직접 문을 못 여시는 것 같으니 제가 열어드려야죠! 뭐 해! 나가라고!”

엘리자베스는 열린 문 밖에서 키득거리며 이 광경을 구경하는 학생들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관문은 개뿔! 이건 함정이야!’

엘리자베스는 울적한 표정으로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루이 교수님에게 말했다.

“다, 다음부터는 절대…….”

“나가.”

“저 정말 안 나가면 안 될까요……?”

“나가!”

엘리자베스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루이 니콜라스의 고함을 들으며 문 밖으로 쫓겨 나갔다.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제 눈앞에서 쾅! 닫히는 문을 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으려니 옆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크큭……. 마녀가 결국 쫓겨났네.”

“왜 또 모르지. 앰버 플래스만큼 예뻤으면 루이 니콜라스 교수님이 데리고 계셨을 텐데. 오늘 오전에 앰버 플래스인지 앰버 모건인지 그 여자가 교수님이랑 밀담을 나눴다던데.”

“외모만 문제겠어? 파혼당한 걸 보면 성격도 보통이 아닐걸. 여자가 과학이라니. 말세야, 말세.”

엘리자베스는 노골적인 비웃음에 고개를 들었다.

것들을 어떻게 죽여버리고 논문을 써야 신박한 살해방법이라며 홀램브로에서 실어줄까? 이 순간, 엘리자베스의 고민거리는 그거 딱 하나 뿐이었다.

그때 벌컥 닫혔던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루이 니콜라스 교수님이 거대한 양동이를 들고 나왔다. 엘리자베스는 루이 교수님을 보자마자 저 신사처럼 차려입은 양아치들에 대한 생각은 전부 잊고 얼른 루이 교수님에게 매달리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때 루이 교수님이 담담한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실험 때 쓰다 남은 염산을 처리할 곳이 없어서.”

교수님은 그렇게 말하더니 남학생들을 향해 양동이를 휙 부었다. 남학생들은 그 안에서 흘러나온 액체를 맞고는 비명을 지르며 복도 끝으로 흩어졌다.

“으아아악!”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남자들을 보았다. 복도 바닥에는 미끈거리는 초록색 액체가 잔뜩 퍼져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재빨리 제 발을 그 액체로부터 먼 곳으로 피신시키며 루이 교수님을 보고 물었다.

“진짜 산이에요?”

“미쳤냐?”

루이 교수님은 나지막이 대답했다. 엘리자베스는 자연스럽게 루이 교수님을 따라 다시 들어가려고 문을 잡았다.

그러자 루이 교수님이 엘리자베스의 손을 탁 쳐내며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그러곤 문을 다시 쾅 소리가 나게 닫아버렸다.

“실험 마치기 전까진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라!”

엘리자베스가 어이가 없어서 거친 숨을 뱉었다. 대체, 대체! 과학자들의 성격은 왜 저렇게 엉망일까!

* * *

엘리자베스는 그날 밤도 케빈에게 로킨트 저택에서 저녁을 먹어줄 것을 부탁했다. 케빈은 흔쾌히 허락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그러죠. 사실 이미 프란시스 부인께서는 엘리즈보다 저를 더 좋아하게 되신 것 같아요. 제가 무슨 말만 할 때마다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시라니까요?”

“진짜 죽겠다는 표정은 아니고?”

“아 진짜! 엘리즈!”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가 케빈의 형편없는 유머 감각에 대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러자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미소를 보며 흐트러진 얼굴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걸음을 멈춰버린 케빈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아니, 아니에요.”

케빈은 고개를 내젓다가 잠시 멈췄다가 또 다시 내젓고는 조용히 말했다.

“……엘리즈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왠지 모르게 저도 흐트러진 얼굴을 하고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그래.”

나도 나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 예전에는 안간힘을 써야만 좋아지던 내 자신이, 이제는 무척이나 좋기 때문이야. 남들의 경멸이나 혐오, 비웃음 따위는 가볍게 어깨 뒤로 던져버릴 수 있을 정도로 이미 나는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야. 프란시스의 말처럼 이제는 나도 나를 돌봐줄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야.

“정말요?”

케빈은 왜인지 반짝반짝 빛나는 얼굴로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질문이 자신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나온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케빈과도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기숙사 문이 보이기 시작하자 케빈의 어깨를 툭 치곤 얼른 기숙사 위로 올라갔다. 실험실에서 망쳐도 좋을 옷으로 갈아입고 얼른 다시 실험실로 돌아가야 했다.

인생이 망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자꾸만 변화해야 했다. 변화하지 않으면 정말로 죽어버리니까. 육신보다도 영혼이 먼저.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 * *

엘리자베스에게 누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귀찮은 실험이 뭐냐고 묻는다면 서너 시간의 간격을 가지고 균 배양을 확인하거나 약물을 주입하는 등, 실험 과정을 살펴봐야 하는 실험이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3시간 간격으로는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고 그렇다고 뜬 눈으로 지새기에는 지루하고 졸린 시간인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3시간에 한 번씩 자신을 깨우도록 24시간 동안 다 타버리는 길이의 양초에 8개의 못을 박아놓고 못이 그릇에 떨어질 때마다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죽고 싶다.”

엘리자베스는 새벽 4시쯤 눈을 비비고 일어나자마자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취소! 취소입니다!”

엘리자베스는 후다닥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라도 빌어먹을 놈의 신이 엘리자베스의 말을 기도로 알아들을까 봐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피곤한 표정으로 천천히 걸어가서 광학 현미경을 들여다보았다.

무럭무럭 잘 크고 있는 귀여운 세균들.

엘리자베스는 페트리디시 위에 놓인 배지 A 위 빠글빠글한 균들을 보았다. 그 다음은 배지 B. 고온 살균을 통해 인체에 무해한 균과 유해한 균이 모두 살균된 상태의 배지였다. 마지막으로 배지 C. 저온 살균을 통해 유해한 균만이 사라진 배지였다.

엘리자베스는 잘 통제된 실험 결과를 기록지에 적으며 약간의 쾌감을 느꼈다.

처음에 실험 결과를 기록지에 적을 때는 온갖 수치 실수를 해서 케빈에게 1차적으로 여러 번, 루이 교수님께 2차적으로 끔찍하게 한 번씩 혼났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때를 떠올리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겨우 3개월 만에 이렇게나 근사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앞으로 3개월 동안도 엘리자베스의 인생이 근사하게 변할 수 있다는 뜻일까?

엘리자베스는 진보를 믿어보겠냐는 앰버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엘리자베스에게 3개월 이후의 삶이 주어진다면 엘리자베스는 당장에 앰버에게 달려가서 말해줄 것이다.

나도 당신과 함께 진보를 믿어보겠노라고. 나도 당신의 말처럼 유토피아가 된다는 보장도 없는 세상의 변화를 위해 끝없이 달려보겠노라고. 변화는 그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임을 나도 이제는 알고 있노라고.

반드시 말해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기어코 먼 곳에서 동이 터오기 시작하는 실험실 창문을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끔찍하게 굳어버린 어깨를 주물럭거리며 실험 결과지를 들고 이제 막 출근한 루이 교수님의 책상으로 갔다.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할 수 있을까요?”

루이 교수는 엘리자베스의 눈 밑에 생긴 시커먼 그늘을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일찍?”

엘리자베스는 루이의 목소리에서 얼음장 같은 노기를 읽고 몸을 웅크렸다. 루이가 말했다.

“넌 왜 이렇게 미련하냐? 당장 가서 자! 그 꼴을 하고 어떻게 인류 지식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루이의 호통 앞에 어깨를 잔뜩 옹송그리느라고 루이가 하는 말이 일찍 퇴근하라는 말인 줄도 모르고 잠시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러자 곧 막 출근한 케빈이 헛기침을 하며 엘리자베스에게 걸어와서는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살짝 쥐고 끌고 나갔다.

“정신! 정신 차려요오!”

케빈은 아까는 두려움에, 지금은 피로에 초점이 없는 엘리자베스의 눈앞에서 박수를 몇 번 치더니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뒷문으로 나갔다. 그러자 거기에는 하커 가의 인장을 단 마차가 있었다.

“……?”

엘리자베스가 케빈을 의아하게 보자 케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잠은 집에 가서 잘 줄로 알고 있었죠. 그래서 마차 타고 왔어요.”

“흥! 그냥 댁이 타고 싶었던 거 아니고?”

케빈의 말에 토비가 마부석에서 혀를 끌끌 찼다. 엘리자베스는 두 사람이 또 유치한 말들로 서로를 공격하는 것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얼른 마차 손잡이를 잡았다.

“얼른 자요. 얼른.”

케빈이 엘리자베스의 뒤에서 말하자 엘리자베스가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못 자. 할 일이 있거든.”

“무슨 일인데요?”

케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엘리자베스는 마차 안에 타서 문을 닫은 뒤 차창 너머로 말했다.

“세상을 바꾸는 일.”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케빈이 갸웃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기운이 없다는 듯 대답하는 대신 토비에게 출발해달라고 부탁할 뿐이었다.

* * *

점심시간 즈음, 벨룬타 공원 옆 타운하우스에 하커 가의 인장을 단 마차가 두 대나 도착했을 때 앰버는 정원을 다듬는 에드워드 옆에서 담요를 깔고 퍼져 있던 차였다.

앰버는 시끄러운 마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곧 마차에 달린 인장을 알아보고는 몸도 일으켰다. 그녀가 에드워드에게 속삭였다.

“케이를 불러와요.”

앰버만큼이나 당황한 표정의 에드워드가 케이를 부르러 저택 안으로 들어간 사이, 앰버가 정문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마차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기어 나왔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귀부인, 생활력이 강해 보이는 여성, 그리고 신사의 예의범절을 몸에 익힌 중년의 남성— 또 다른 마차에서는 젊은 여자 둘과 젊은 남자 하나가 내렸는데 그 사람들 중에는 드디어 앰버가 아는 얼굴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미리엄!”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는 앰버를 보던 귀부인과 중년 여성이 혀를 끌끌 찼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을 힐끔 보고는 얼른 앰버에게 걸어갔다. 앰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수업은 분명 저녁…….”

“저녁부터 수업해서 되겠어요? 지금 수업 진도가 완전 엉망인데! 지원군들을 데려왔어요.”

엘리자베스는 허리춤에 손을 척 올리고 말했다.

“이쪽부터 소개할게요. 이 쪽은 프란시스, 여긴 콜린과 메리, 토비구요. 셜리, 미리엄이에요. 미리엄은 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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