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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13화 (113/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13화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질문에 미간을 찌푸렸다. 앰버가 말했다.

“집에서 애만 보는 기혼 여성들이나 가정교사 일로 생계를 꾸리는 젊은 여성들은요?”

앰버는 앰버의 수수께끼 같은 질문들에 점점 위축되는 기분으로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았다. 그러다가 푸스스 웃음을 터트리더니 손차양을 만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리오든에서는 흔치 않은 파란 하늘이었다. 아마도 어제 비가 온 덕인 듯 싶었다.

“참정권 운동은 노동 운동하고는 달라요.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요구는 바뀌고, 변할 거예요. 지금은 진보적이라고 하는 생각들이 10년 후에는 보수적인 생각이 되겠죠. 계속 변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뚱뚱하고 비대해진 나라가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이 바로 민주주의구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영명 축일에 윌리엄 조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케이가 원하는 것은 멜니아에서 민주주의를 수입하는 것이라는 말. 윌리엄은 케이의 의도가 레본을 멜니아에 팔아먹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 의도가 무엇이든 엘리자베스는 민주주의라는 게 끊임없이 진보적으로 이 나라를 굴릴 수 있는 방법이라는 앰버의 말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소수의 왕과 귀족들만의 생각으로는 이제 이 나라는 너무 커졌고 뚱뚱해졌다. 더 이상 레본은 과거 봉토를 하사받은 봉신들이 기사를 이용해 영지민들을 다스리고 영지민들은 그 대가로 위험한 야생동물과 떠돌이 산적들에게서 보호받는 식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과거에는 작게는 가정에서도 이런 거래는 일어났다. 여자들은 아이를 낳고 키우고 가정 내의 일에 힘쓰기로 약속한 대신 남자들의 보호를 받고 소유물로 여겨지는 삶을 감내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연이 정복되고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의 삶은 타고난 짐승의 본능과 습성으로부터 점점 벗어나고 있었다. 교육, 과학, 연구, 기술에는 힘이 아니라 지능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분야가 늘어나고 있고 그 과학 기술을 통해 작은 무기로도 커다란 짐승들을 정복할 수 있는 힘을 인간들은 갖췄다. 그 힘은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위험하고도 따뜻한 것이었다.

과학 기술은 몰록 같은 괴물을 만들 수도 있지만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 수도 있었다. 자유로워진 인간들은 마구 날뛰고 뛰놀다가 절벽 끝에 매달리겠지만 결국 그 인간들을 구제하는 것 역시 인간이 될 것이다.

다수의 인간.

개별적으로는 약하고 힘없는 존재였으나 모이면 반드시 맞는 길을 고르는 인간.

엘리자베스는 그런 의미로서의 민주주의를 존중했다.

앰버가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어느 역사학자가 한 말이라는데. 나는 사실 글을 많이 읽지 않아서 이름도 기억은 안 나지만, ‘진보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계에 지상 낙원이 도래할 것이라고 여기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이 끊임없이 진보하려고 노력할 거라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진보란 모든 사람이 똑같이 진보할 거라는 것을 뜻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뭐 그런 말이었는데, 내가 머리가 좋지 않아서 정확하진 않지만…….”

앰버는 자신의 말을 들으며 생각에 골똘히 잠기는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진보를 믿어볼래요?”

“네?”

앰버의 질문에 엘리자베스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걸까? 아직 앰버의 말을 다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앰버의 제안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엘리자베스의 심장부터 두드렸다.

“무, 무슨 뜻이에요?”

엘리자베스가 멍청하게도 말을 더듬자 앰버는 부드럽게 웃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번에 국왕이 평민원에 세 자리를 추가할 거예요.”

“대단한 일이에요.”

엘리자베스는 평민원에 자리가 하나만 늘어나도 연일 신문에 레본의 왕정이 흔들린다는 기사가 떠오르는 것을 기억했다. 그런데 세 자리라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단한 일이죠. 그렇지만 혁명적인 일은 아니에요. 어차피 평민원이라고 해봤자 소위 시민권이라고 불리는 특권을 가진 소수의 사업가층에서만 투표를 하게 되고 투표 결과로 누가 선출되어도 귀족원과 평민원을 통틀어 8할 이상의 찬성이 나와야 하니까요.”

“그거야…….”

이 세상이 갑작스럽게 바뀔 순 없는 일이 아닌가.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욕심이 너무 과하다고 여겼다.

“우리는 우리 쪽 사람들을 밀 거예요. 이틀 후에 있을 파티에서 귀족들과 사업가들과 얘기가 잘 되면 우리가 원하는 세 사람이 무난하게 평민원에 이름을 올릴 거고, 새로이 구성된 의회에서는 입법 권한을 가지게 되겠죠.”

“그럼 그때 노동 시간 제한이나 아동 노동 금지 법안을 만들면 되겠네요.”

엘리자베스가 반가운 얼굴로 말하자 앰버가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얼굴을 보자 왠지 미궁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앰버가 말했다.

“하나 더. 임기를 다한 평민원 의원은 보통 선거로 뽑을 수 있는 법안을 만들 거예요. 귀족원은 임명직, 종신직이고 본인이 사임하지 않는 한 절대 임기가 끝나지 않지만 평민원은 다르죠. 그리고 평민원의 선출직에 대해서는 평민원 내부에서 과반수 동의만 얻으면 입법이 가능해요.”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말하는 동안 왜인지 싸늘한 느낌이 들어 몸을 수그렸다.

보통 선거라고?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욕망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이제야 심장이 아니라 머리로도 이해했다. 앰버는 지금 ‘진정한 의미의’ 평민원의 자리를 원하는 것이다.

그걸 과연 국왕과 귀족들이 두고 볼까? 제 아무리 평민원 내부 동의만 얻으면 된다고 하더라도 이교도, 여성, 빈민,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장의 부품 역할에 비견되는 노동자들이 선거구 투표에 참여하는 것을?

그것은 작은 변화지만, 결국 큰 변화에 대한 예언과도 같았다. 평민원에서 시작된 보통선거는 평민원의 의원들 구성을 바꿀 것이다. 이교도, 여성, 빈민, 노동자 출신의 의원들이 평민원을 차지할 것이고 평민원을 차지한 그들은 입법에 관여할 것이다. 작은 표라도 정당 정치로 나뉘어버린 지금의 귀족원은 점점 평민원의 눈치를 볼 것이고 평민원이 작은 승리를 거두는 날도 있을 것이다.

평민원의 작은 승리는 역사가 될 것이고 역사는 결국 진보할 것이다.

진보라니.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앰버가 말한 진보라는 단어의 무시무시함을 이해했다. 그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하자 엘리자베스의 심장은 설렘이 아니라 공포로 뛰기 시작했다.

“국왕이 이 모든 계획을 알고도 가만히 둘 리가 없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모르게 해야죠.”

“중간에 세 자리 중 한 자리라도 잘못 되거나 한 사람이라도 변절하면…….”

“펑! 모든 게 날아가죠. 그동안 케이가 썼던 천문학적인 돈은 물론이고, 국왕이 우릴 가만 두지 않을 거예요.”

앰버는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고는 허공을 향해 쏘는 시늉을 했다.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과거에 보았던 피를 흘리던 붉은 머리의 여자를 떠올렸다. 역사가 우리를 기억할 거라고 말하던 여자.

엘리자베스는 가슴이 답답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가 과거로 돌아오고 나서 제대로 바꿔버린 운명은 거의 없었다. 물론 프란시스가 있긴 했지만 프란시스도 아직 안정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 앰버는? 앰버의 운명은 앰버 플래스가 앰버 모건이 됨으로써 바뀐 걸까? 아니면 이 모든 것도 결국 다시 앰버의 어깨에 총상이 나고, 앰버가 목숨을 바치러 가는 쪽으로 흘러가는 과정일까?

엘리자베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앰버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탐나요. 왕립 아카데미의 최초의 여성 과학자인데다, 신의 은총이라 불리는 학질 치료제를 만들어냈고, 심지어는 왕의 조카이니 왕이 대놓고 살해할 수도 없는 존재. 당신이 의회에 있다면, 그만큼 멋진 일은 없을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살해’라는 단어에 흠칫 몸을 떨며 말했다.

“대놓고 살해는 못해도 은밀하게는 할 수도 있다는 거네요.”

“그럴 수도 있죠.”

“지금 나를 설득하려는 거예요, 겁을 주려는 거예요?”

“둘 다예요. 위험한 일이니까 위험한 줄 알면서도 뛰어들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그럼 내가 세 자리 중 한 자리를…….”

엘리자베스가 주변을 자꾸만 돌아보며 초조하게 묻자 앰버가 살포시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미 찼어요. 내가 말하는 건 나중 일이에요. 물론 현재든 나중이든 케이는 절대 싫어하지만.”

“케이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앰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생각을 해낸 사람이 나뿐이겠어요? 다들 당신이 신문에 이름을 실었을 때 떠올린 생각이에요. 그런데 당신이 위험해지는 걸 케이가 놔둘 리가 없죠.”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앰버의 말은 틀렸다. 케이 하커는 엘리자베스가 위험해지는 게 아니라 평민들의 일에 끼어드는 게 싫은 것이다. 케이 하커는 언제나 엘리자베스와 케이를 ‘우리’로 묶는 것을 싫어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텁텁한 입안에 건조한 숨을 들이마셨다.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앰버가 엘리자베스를 힐끔 보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요. 당장 결정해달라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 제발 지금 바로 거절하지 말아줘요.”

“……앰버.”

“……엘리자베스는 지금 이대로 열심히 자기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에게 도움이 돼요. 여성 과학자에, 퀴닌 개발자라니, 훌륭해요.”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에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앰버는 다 먹은 사과를 손쉽게 등 뒤로 던져 버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무서워. 거절당하는 건 마음 아파요. 그러니 대답은 나중에 해요.”

목숨이 아까워 거절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앰버가 말하는 보통선거란 적어도 이번 봄에는 일어날 수 없는 변화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남은 시간은 겨우 3개월. 엘리자베스는 3개월 후에 발생할 그 어떤 것도 책임질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심각한 표정을 다르게 읽은 듯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전환했다.

“오늘은 수업 생략이에요. 어제처럼 허탕칠까 봐 미리 말해주러 왔어요, 사실.”

“왜요?”

하루가 급한 상황인데! 엘리자베스는 엄청난 비밀을 들어버린 이 시점에서 수업을 미룬다고 하니 더 초조해졌다.

“할 일이 좀 있어서요. 이번엔 케이도 없을 테니까 집에서 쉬어요. 알겠죠?”

“그럼 수업료는…….”

“내 사정으로 쉬는 거니까 수업료는 당연히 지불해야죠.”

엘리자베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대답을 미뤘다. 안 된다고 해야 하는데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엘리자베스의 투명한 표정을 읽은 앰버가 피식 웃었다.

“세상에, 이 귀여운 모습을 케이한테 말해줘야…… 아, 안 되겠구나.”

앰버는 말을 하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엘리자베스가 귀여운 건 나만 알아야겠어요. 이젠 케이랑 나랑 연적이니까. 내가 엘리자베스를 차지하고 싶으니까요.”

연적이라는 말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상한 여자! 정말 정말 이상한 여자!

엘리자베스는 빨개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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