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12화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웃는 동안 왠지 모르게 창피해져서 불퉁한 얼굴로 벤치에 기대서 하늘을 노려보았다. 한참이나 웃던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뚱한 얼굴을 보고서야 심호흡을 하며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그래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엘리자베스가 아닌 여자한테는 안 줄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에 고개를 돌려 앰버를 살짝 보았다.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잘 지키고 있을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걱정 같은 건……!”
엘리자베스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문득 어딘가를 보고 말을 멈췄다.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살피다가 의아한 눈으로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러자 거기엔 사교계에서 가장 유행하는 옷을 입은 두 남녀가 서 있었다. 그중 남자 쪽은 앰버도 아는 얼굴이었다. 앰버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윌리엄 씨.”
윌리엄 경이라니까! 엘리자베스는 경과 씨를 구분하지 못하는 앰버에게 호통을 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앰버의 인사에 윌리엄 조쉬는 그 뱀처럼 간교한 눈을 얼른 활처럼 휘게 만들고는 앰버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앰버는 못 말린다는 얼굴로 조쉬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놓았다. 윌리엄은 앰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앰버 양. 당신이 없는 동안 리오든에는 해가 뜨질 않았어요. 리오든의 해가 사라졌으니 말이에요.”
“여전하시네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엘리자베스는 이 광경을 불쾌한 얼굴로 보는 조쉬의 뒤에 서 있는 여자를 보았다. 드레스 가게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이름이…….
“제 소개는 안 해주시나요? 윌리엄 경?”
어린 귀족 영애는 불쾌함을 미소로 애써 덮었으나 완벽하게 성공하진 못했다. 영애가 어중간한 미소로 말하자 윌리엄이 얼른 영애를 에스코트하는 자리로 돌아가 말했다.
“아, 멜리사 양. 이쪽은 앰버 양입니다. 앰버 양, 이쪽은 멜리사 양이에요.”
아, 멜리사 솔턴.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여자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프란시스에게 못되게 굴었던 영애였다.
멜리사는 윌리엄에게 앰버를 소개 받자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쓰윽 엘리자베스 쪽으로 다가왔다.
“이쪽은 소개해주시지 않으셔도 돼요. 이미 아는 사이니까요. 그렇죠, 엘리자베스 양?”
멜리사는 퍽 다정한 얼굴로 엘리자베스의 옆에 앉았다. 그 바람에 멜리사의 어깨가 엘리자베스의 어깨에 닿았다. 엘리자베스는 우리가 아는 사이라는 게 이 정도였나, 싶은 생각을 하며 어느새 미간을 찌푸린 조쉬를 보고 말했다.
“맞아요. 아는 사이예요. 그런데 두 분은…….”
엘리자베스가 조용히 말하자 멜리사가 엘리자베스의 말을 끊어먹으며 말했다.
“근처 타운하우스 다과회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그런데 윌리엄 경이 산책을 가자고, 가자고 졸라서 억지로 나왔지 뭐예요. 정말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재주가 있어요.”
멜리사는 짐짓 못 말린다는 듯이 윌리엄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엘리자베스 쪽에 딱 붙어서 앰버를 보며 물었다.
“앰버 양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켄터베리 홀에서도 윌리엄 경이 자주 앰버 양을 데리고 나가려고 수작을 부리지 않았나요?”
켄터베리 홀이라는 단어에 엘리자베스는 어깨를 움찔했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굳이 앰버 플래스가 앰버 모건이 된 이 시점에서 켄터베리 홀을 언급하는 것, 그리고 신사들이 무희에게 불건전한 목적으로 나갈 것을 권할 때 쓰는 표현인 ‘데리고 나가려고 수작을 부렸다’라는 말을 쓰는 것이 꿍꿍이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앰버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윌리엄 씨는 켄터베리 홀보다는 올라운드 클럽에서 자주 뵀던 것 같은데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올라운드 클럽에서 보았던 빨간 책이 꽂혀 있는 밀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참정권 운동과 무정부주의는 다른 거라고 윌리엄 조쉬는 분명 선을 그었지만 결국 혁명가들이란 엘리자베스로서는 비슷비슷해 보였다. 어쨌거나 종교와 계급에 반대한다는 면에서는 실제로 유사한 점이 있기도 하고.
엘리자베스가 앰버의 말에 골몰하는 사이에 일그러진 표정의 멜리사가 말했다.
“앰버 양은 켄터베리 홀뿐 아니라 클럽에서도 일하셨나 봐요?”
이건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엘리자베스가 뭔가 할 말을 떠올리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앰버가 말했다.
“아뇨. 클럽 앞에서 담배 피울 때 가끔 불을 빌렸어요. 나한테는 수작 같은 건 걸지 않던데요. 늘 수작에 성공한 여자랑 같이 있어서.”
앰버가 그렇게 말하며 가만히 멜리사를 보았다. 멜리사는 앰버의 말에 잠시 벙쪄 있다가 금방 멜리사 자신이 수작에 성공한 여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멜리사가 앰버에게 항변하고 싶은 얼굴로 뭔가 말하려고 할 때, 윌리엄이 멜리사의 손을 잡아 자신의 팔을 쥐게 했다. 그러곤 앰버를 보며 씨익 웃었다.
“착각이었을 거예요. 내 수작에 넘어온 분은 이분뿐이니까.”
윌리엄의 말에 멜리사는 살짝 누그러진 얼굴로, 그러나 여전히 토라졌음을 드러내고 싶은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는 아무래도 벤치보다는 시원한 잔디밭에 앉고 싶어요. 실례했어요. 앰버 양. 엘리자베스 양.”
멜리사는 재빨리 인사를 건네곤 윌리엄의 팔을 놓고 잔디밭으로 걸어갔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에게 말했다.
“비위가 좋으시네요.”
귀족 영애라니. 누구보다 귀족을 혐오하는 주제에 말이다.
윌리엄이 엘리자베스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비위가 좋을 게 있소? 나는 예쁘면 다 좋아하는 편이오.”
“남자들은 다 그런가 보죠?”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의 저급한 말 때문에 솔치노에서 케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예쁘면 다 좋다는 말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고 윌리엄을 노려보았다. 윌리엄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여자들도 다를 바 없던데. 내가 예쁘니까 다들 넘어와 주는 게 아닐지…….”
윌리엄의 말에 앰버가 실소를 터트렸다. 윌리엄이 앰버의 얼굴을 보며 과장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고귀한 앰버 양은 다르겠죠.”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안 고귀하다는 거예요?”
“고귀랑 가장 먼 곳을 가리키라면 나는 단언컨대 이쪽이오.”
윌리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손으로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는 불쾌한 얼굴로 그의 손가락을 탁 쳐냈다.
“사람을 손가락으로 면전에서 가리키다니!”
윌리엄은 얻어맞은 손을 쥐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은 힘이 너무 세. 대체 왜 이렇게 세지?”
“알 거 없어요. 빨리 가요. 멜리사 솔턴 양이 당신을 기다리느라고 목이 빠지는 것 같으니까.”
엘리자베스는 저 멀리 잔디밭에서 부채를 펴곤 애써 윌리엄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빳빳이 고개를 들고 앉아 있는 멜리사 솔턴을 가리켰다. 그러자 윌리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앰버에게는 예를 갖춰 인사하고 엘리자베스에게는 손가락질을 한 번 더 한 뒤에 사라졌다.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서 윌리엄을 노려보았다.
윌리엄이 사라지고 나자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잠시 물끄러미 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요?”
“둘이 무슨 사이예요?”
“누구 둘이요?”
“윌리엄 씨랑 엘리자베스요.”
“씨가 아니라 경…… 것보단 우리가 무슨 사이랄 게…….”
엘리자베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앰버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가끔 데이트하는 사이인가요?”
앰버의 질문에 엘리자베스가 화들짝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
“아뇨?”
“그럼 더 큰일이네요.”
앰버는 속이 탄다는 표정으로 피크닉 가방 맨 아래쪽에 있던 작은 유리병 코르크를 열었다. 그 안에서 찰랑거리는 것의 정체는 향만 맡아도 알 수 있었다. 위스키였다.
앰버는 위스키를 한 모금 먹고는 엘리자베스에게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술은 정말 사양이다.
“근데 왜 큰일이에요?”
“왜긴요. 천하의 윌리엄 조쉬가 엘리자베스를 저런 눈으로 보고 있잖아요? 둘은 같이 잔 사이도 아닌데.”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선정적인 어휘 선택에 놀라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도 산책로에는 두 사람 밖에 없었다.
“앰버!”
“바람둥이의 하나뿐인 사랑이라니. 그건 너무 여자들한테 매혹적인 상품이에요. 케이한테 경고해줘야겠어요.”
“대체……!”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표현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내저었다. 이 이상한 여자의 뇌구조는 대체 어떻게 되어 있을까? 케이 다음으로 뇌구조가 궁금한 사람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멜리사 솔턴과 시시덕거리는 윌리엄 조쉬 쪽을 바라보며 앰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앰버의 동지는 얼마나 많나요?”
혹시 거기에 윌리엄 조쉬도 들어가나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은근히 돌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동지요? 우린 군대도 아니고 무슨 해적도 아닌데요? 우린 그냥 ‘우리’예요. 서로를 동지라고 부르진 않아요.”
윌리엄 조쉬는 그들의 친구들을 동지라고 부르던데. 할 말이 없어진 엘리자베스가 입맛을 다시자 앰버는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며 말했다.
“엘리자베스도 언제든 ‘우리’가 될 수 있어요. 엘리자베스만 마음먹으면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헛기침을 했다.
내가? 내가 참정권 운동을?
엘리자베스는 학술원 앞에 서 있던 팻말을 든 여자를 떠올렸다.
“전 별로 전투적인 사람이 못 돼요. 그런 건 당신처럼 전투적이거나, 아니면 케이처럼 돈이 많은 사람들이 하는 거잖아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당신만큼 전투적인 사람은 리오든에 또 없을 거예요.”
“무, 무슨 소릴!”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에 얼굴을 살짝 달구곤 제 뺨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앰버를 곁눈질로 보며 말했다.
“어쨌든……. 저는 노동 권리니 뭐니 그런 것도 모르구요.”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시곤 눈을 가늘게 뜨고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노동 권리요?”
“네. 노동 운동 같은 거잖아요. 그렇죠?”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두리번거리면서 하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살짝 웃었다.
“노동자라……. 엘리자베스가 생각하는 노동자라는 건 어떤 사람이에요?”
“그냥……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엘리자베스는 제약 공장에 가끔 가면 만나는 작업복을 입은 우락부락한 남자들을 떠올렸다. 그들에게서는 케이에게서 나는 진한 땀 냄새 같은 것이 났었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거리의 부랑자들이나 뒷골목의 창부들의 권리는 누가 챙겨주죠? 그들은 공장 노동자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