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혼하러 돌아왔다 111화 (111/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11화

엘리자베스가 보기에, 아니, 아마도  재수 없는 조셉 패거리가 보기에도 분명 현재 아카데미에서 가장 능력 있는 학생은 케빈이었다.

지식이라는 축적에서 보아도 그렇지만 실험 설계, 그리고 화학, 약학 분야에서 자신의 주제를 따라가는 뚜렷함도 가장 앞섰다. 물론 뛰어나 ‘보이는’ 논문만 하나 있으면 기본기 없이도 교수가 되는 소위 ‘입만 산’ 교수들이 많다.

그러나 케빈은 그런 측면에서 봐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공동 연구라고는 해도 저온 살균 논문 역시 케빈의 성과였다. 엘리자베스가 살짝 도와주긴 했지만 그건 솔직히 미래에서 가져온 정답을 알려준 것에 불과했으니까.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빈이 답했다.

“문제랄 건 없지만 윌리스가 와서 그러던데요. 전에 뒷배가 빵빵한 고매하신 귀족 나리가 아카데미 부교수 자리를 얻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이렇게 심사 결과 발표 시간이 바뀌었다고. 분명 이번에도 그런 걸 거라고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괜히 질투 나니까 그렇지. 이미 추천서 접수도 다 끝났을 텐데 그게 무슨 상관이 있어?”

“상관이 있을 수도 있죠. 아직은 아카데미에서도 귀족이 제일이니까.”

케빈이 답지 않게 냉소적인 어투로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빈을 가만히 보다가 거칠게 케빈의 머리를 헝클었다.

“멍청하긴. 아카데미에서는 성과가 제일이야.”

엘리자베스의 손이 닿자 케빈이 얼굴이 빨개져서는 푸드득 일어났다.

“아 진짜! 내 머리에 손대지 마요!”

“싫어! 손 댈 거야!”

“이씨! 엘리즈랑 안 놀아요!”

“그래라!”

엘리자베스는 얼굴이 빨개진 케빈을 보며 킥킥 웃었다. 케빈을 볼 때마다 있지도 않은 막내 동생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놀리는 재미에 푹 빠졌다가는 루이 교수님이 돌아왔을 때 실험 시작도 못할 것 같아서 얼른 자료를 챙겨서 실험실로 가기 위해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복도를 걸어가다가 복도 중간쯤에 모여 창 너머로 목을 빼고 있는 신사의 무리를 마주치고 걸음을 늦췄다.

“와, 진짜 예뻐. 이렇게 실제로 본 건 처음이야.”

“처음은 무슨. 너 한때 켄터베리 홀에 출근도장 찍었던 거 모를까봐?”

“시끄러워. 것보다 저 여자, 루이 니콜라스 교수님 연구실에서 나왔다던데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

“의외네. 루이 교수님이 화류계 여자를?”

엘리자베스가 그들의 말에 복도 창 너머를 보자 거기엔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화려한 레이스 모자를 쓰고 소박한 아카데미의 중정에 서 있었다.

앰버 플래스. 아니, 앰버 모건.

엘리자베스가 모자에 가려진 여자의 하얀 피부를 떠올린 순간,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앰버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실크 장갑이 끼워진 가느다란 손을 살짝 들어보였다. 그러자 엘리자베스의 옆에 있던 신사 무리가 낄낄거리며 신나 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자신을 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앰버가 손으로 동굴을 만들어 외쳤다.

“엘리자베스!”

그러자 신사들이 전부 옆에 있던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빨개진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 피크닉 가방을 들고 회랑에 서 있는 앰버를 보는 순간 뒤를 돌아 달아나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걸음을 돌리는 것보다 앰버가 엘리자베스의 뒤를 쫓는 것이 빨랐다.

앰버는 엘리자베스를 붙잡자마자 기둥에 손을 짚고 풍만한 굴곡을 자랑하듯 다리를 꼬며 씨익 웃었다.

“이런 데서 보니까 너무 멋있어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드레스를 차려 입은 앰버와 상반되는 자신의 셔츠와 바지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멋있다니. 비꼬는 걸까?

엘리자베스는 주변 신사들이 다 주시하고 있는 앰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웬일로…….”

“어제 비 맞으면서 왔다가 허탕 쳤다면서요? 내가 분명히 사람을 보냈는데 엇갈렸나 봐요.”

앰버가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표정을 조금도 믿지 않으며 말했다.

“케이가 그래요?”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피식 웃었다.

“설마요. 그냥 어디선가 비에 푹 젖어서 나타나더니 방에 틀어박혀서 안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몰래 들어가 보니까 창가에 이런 게 있어서.”

앰버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가 입고 갔다가 벗어버린 셔츠와 재킷을 피크닉 가방 안에서 꺼내 흔들어보였다. 엘리자베스는 당황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오, 오해하지 마요.”

“무슨 오해요?”

“그냥 갔더니 앰버가 없고, 비를 맞아서 옷이 쫄딱 젖었고…… 그뿐이에요.”

“거기에 오해할 거리가 뭐가 있어요?”

앰버는 여우같은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저렇게 눈을 뜰 때마다 어딘지 멍청한 사춘기 소년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기, 기분 나쁠까 봐요. 혹시 앰버가 없는 집에서 우리 둘이…….”

“야한 짓을 했나 보죠?”

앰버는 엘리자베스가 손을 마구 허공에서 내저으며 부정하자 쿡쿡 웃으며 혼자 회랑을 걷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가 따라오지 않자 앰버는 뒤를 돌아서 피크닉 가방을 흔들며 말했다.

“내가 어제 일로 미안해서 점심거리를 좀 싸왔는데. 같이 식사하고 산책할까요?”

“저, 저는 오늘 급한 실험이…….”

“윽!”

엘리자베스의 완곡한 거절에 앰버가 갑자기 얼굴을 구기며 심장께를 마구 쓸어내렸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갑작스럽고 부자연스러운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까이 걸어가 물었다.

“왜, 왜요?”

“가슴이 아파서요. 데이트 신청을 거절당하다니. 처음이에요.”

“데, 데이트 거절은 무슨!”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또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는 순식간에 엘리자베스의 팔뚝을 감았다. 엘리자베스가 실크 장갑의 야릇한 질감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앰버가 푸스스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랑 가는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눈을 보는 순간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 그래요.”

젠장할! 왜 이렇게 사람을 홀리는 거야!

* * *

앰버와 함께 도착한 곳은 타운하우스와 반대쪽에 있는 벨룬타 공원 옆문이었다. 정문보다는 조금 더 학술원에서 가깝고 한적했다.

엘리자베스는 공원 입구에 서서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관목과 키가 작은 나무들을 보았다.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하니 유모차를 끌고 나와 산책하는 귀부인들도 있었고, 작은 담요를 깔고 그 위에 누워서 밀회를 즐기는 연인들도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배경 뒤로 깔리는 초록색 자연을 보며 연구실에서 화학 약품 냄새를 맡을 때보다 열 배쯤은 건강해지는 기분에 만족스럽게 웃다가 이 공원을 자신이 ‘자연’이라고 여겼다는 사실에 흠칫했다.

엘리자베스는 쉐필드 출신이었다. 깡촌 쉐필드.

쉐필드에서 자연이란 이렇게 누군가가 잘 가꿔놓고 입맛에 맞게 변형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밤이 되면 숲에 잘못 발을 들인 인간들은 늑대의 밥이 되기도 했고 불어난 강물을 섣불리 건너다간 시체도 못 찾을 수 있었다. 숲의 짐승들은 주인을 알지 못했고 늘 굶주려 있었다. 정원을 돌아다니는 자그마한 다람쥐 새끼들과는 달랐다.

그런데 그런 쉐필드에서 살던 엘리자베스가 이 잘 꾸며진 정원이나 다름없는 공원을 보며 자연이라고 생각했다니.

‘나도 도시 사람이 됐나 봐…….’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묘한 쓸쓸함을 느꼈다.

거칠고 위험한 자연이 그리워서 생기는 쓸쓸함은 결코 아니었다. 그냥 인생의 한때가 저물었다는 쓸쓸함이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자연에 익숙해지다 못해 그 자연을 지루하다 여겼던 어린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는 클레몬트라는 이름과 함께 완벽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이제 엘리자베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이 자연의 모조품과 얼마 남지 않은 삶뿐이다.

엘리자베스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앰버가 괜찮은 자리에 벤치를 발견하곤 거기에 얼른 앉았다.

“아휴. 피곤했다 오늘.”

“어디 갔다 왔는데요?”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앰버에게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앰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비밀.”

“무슨 비밀이 이렇게 많아요, 앰버는?”

“내가요? 별로 없는데. 비밀은 엘리자베스가 많은 것 같은데?”

엘리자베스는 앰버에게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앰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하더니 벤치 등받이에 손을 올려놓고는 엘리자베스에게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엘리자베스는 키스라도 할 듯한 그 움직임에 놀란 눈으로 앰버를 올려다봤다.

“내, 내가 뭘요?”

엘리자베스는 애써 앰버의 시선을 피하며 저도 모르게 까마귀와의 키스를 떠올렸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을 떠올렸다. 앰버 모건이 가면 무도회에 왔던 것 같다는 케빈의 말. 그래서 케이 하커가 조셉을 혼내줬다는 말.

혹시 앰버가 엘리자베스와 케이가 키스를 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약혼자의 부정을, 눈치채버렸을까?

엘리자베스는 침을 꿀꺽 삼키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앰버는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뒤로 쓰윽 물러났다.

“그래 보여요. 엘리자베스는 뭔가 숨기는 것 같아요. 원래 비밀이 많은 사람은 티가 나거든요.”

앰버는 그렇게 말하며 벤치를 가려주고 있는 나무 그늘 밖의 땅을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앰버의 옆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모르는 건가. 아는 건가. 아니면 그냥 살짝 눈치를 챈 걸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살짝 앰버를 떠봤다.

“앰버는 질투 같은 거 안 해요?”

“질투요? 한다니까요. 당신한테.”

앰버의 하얀 피부가 엘리자베스를 힐끔 보았다.

앰버는 피크닉 가방을 열어서 사과 하나, 체리 한 움큼, 그리고 샌드위치를 꺼냈다.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피크닉 가방에 들어 있는 잭나이프로 능숙하게 사과에 칼집을 내고는 반을 잘라 자신에게 내미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전생에서 보았던 피투성이가 된 앰버를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사람도…… 죽여봤을까?

엘리자베스가 보기에 두 사람 중 비밀이 많은 쪽은 단언컨대 앰버였다. 엘리자베스는 사과를 집어 들고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아뇨. 그런 질투 말고요. 치정 쪽으로요. 케이 하커가 다른 여자를 만나면 어떨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는 사과에서 흘러나온 과즙을 소매 끝으로 문질러 닦으며 앰버의 매혹적인 붉은 입술이 사과를 우물거리며 하는 말을 들었다.

“재밌을 것 같아요.”

“조금도, 조금도 질투 안 날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피식 웃었다.

“우린 친구라니까요.”

“…….”

“안 믿는 눈치네요.”

“나는 당신이 하는 말이라면 해가 동쪽에서 뜬대도 안 믿어요.”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앰버가 킥킥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