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10화
“싫어.”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케빈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요. 그럼 내가 당장 케이한테 가서…….”
“말해서 뭐하게.”
엘리자베스는 당장이라도 외투를 입고 나가 타운하우스로 향할 것 같은 케빈의 팔을 잡았다.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손을 가만히 보다가 신경질적으로 팔을 빼고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럼 남은 시간동안 뭐 할 건데요? 케이 하커랑 지리멸렬하게 싸울 거예요? 지금처럼 이렇게?”
“나쁘지 않아.”
엘리자베스는 익숙한 창문을 바라보았다.
결혼 생활동안은 너의 퇴근을 기다렸고 네가 떠나고는 네가 돌아오길 기다렸고 이제는 네가 떠나길 기다리는, 나의 창문.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며 빗물이 고여 흘러내리는 창틀에 손을 짚고 말했다.
“일단은 퀴닌을 완성할 거야. 내가 지금 집중할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프란시스를 행복하게 해줘야지. 그녀가 계속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있게.”
엘리자베스는 창 너머로 사라져가는 마차 불빛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나 사실 지금 하는 가정교사 일……. 앰버를 가르치는 거야. 4일 뒤에 타운하우스에서 귀족들을 불러서 파티를 한대. 그래서 귀족들의 예의범절을 배우고 싶대.”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이고, 대단한 이해심이네요. 케이의 약혼자도 가르치고.”
“두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미쳤어요?”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정말 미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피식 웃고 말았다. 케빈은 엘리자베스가 웃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내저었다.
“케이 하커가 아니라 케이 하커가 하는 일을 좀 도와주고 싶은 거야. 그냥 잘 됐으면 좋겠어, 두 사람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해요.”
“케이는 꼭 그럴 거야.”
엘리자베스의 단호한 대답에 케빈이 살짝 웃고야 말았다. 엘리자베스가 뒤를 돌아 케빈을 보았다. 케빈은 엘리자베스와 마주 보곤 또 몇 번 웃었다.
웃음이 멈춘 후, 케빈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케빈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케이한테 3개월 후에 죽는다고 말해요. 그럼 저 멍청하고 고집 센 남자도 엘리즈한테 돌아올 거예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서 말 안 할 거야.”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불쌍하다고 말하던 케이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렸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저주보다 끔찍한 말이었고 그 말은 영원히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에 남을 것이었다. 케이가 동정심으로 자신의 옆에 돌아온다면 그땐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삶일 것이다.
케빈이 말했다.
“고집불통.”
“그걸 이제 알았어?”
“……왜 나예요.”
케빈이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하필 내가 당신을 죽일 독극물을 만들어야 하냐구요.”
“네가 할 수 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입을 다물었다.
“나는 하기 싫으니까.”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구요?”
“내가 직접 하긴 싫어. 그러다가 마음이 약해지면 어떡해? 나는 나를 죽일 수가 없어서, 농도를 좀 적게 하면? 그러면 어떡해?”
케빈은 떨리는 손으로 창틀을 쥐고 있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럼 우리 둘 다 하지 마요. 레본 따위, 이 더러운 땅 따위 망해버리라고 해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게. 레본 따위. 이 더러운 땅 따위 망해버리라고 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어.
이 땅에서 내가 없어도 대대손손 잘 살았으면 좋겠는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말이야.
엘리자베스가 헛웃음을 짓는 사이에 케빈이 말했다.
“안 만들 거예요, 독극물 같은 거. 독극물 만들 시간에 치료제 개발에 신경 쓸 거예요. 생쥐 실험으로 안 됐으니까 이번에는 고양이로…….”
“넌 못 만들어.”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노려보았다.
케빈은 몰록의 피로 인해 감염되는 이 극단적인 폭력증상에 대항할 치료제를 만들 수 없다.
왜냐하면 엘리자베스의 예상대로라면 엘우드 밀은 미래에서 왔으니까.
엘리자베스는 그간의 꿈을 토대로 도서관에서 찾아봤다. 격자무늬가 갸흐통 어떤 가문이나 왕조의 깃발은 아닌지. 몇 권이나, 아니, 몇 십권이나 되는 책을 찾고 또 찾았다. 하지만 영원, 상생, 화합, 순환을 의미한다는 이국 종교의 상징물이라는 것 외에는 그 무늬에 얽힌 역사를 밝혀낼 수 없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엘리자베스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 말은 그 깃발은 아직 쓰이지 않은 역사 속에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엘리자베스의 가설은 이것이다.
엘우드 밀은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는 미래의 갸흐통 사람이다.
이 가설에 따른 엘리자베스의 사고 모형은 다음과 같다.
잘 통제된 군국주의 사회 속에서 엘우드 밀은 고도로 훈련받은 과학자로 컸을 것이다.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위험한 실험을 진행했을 것이다.
인간을 몰록으로 만드는 실험을.
그런데 어쩌다 디트리히 폰이 실험 대상체가 되었고 디트리히 폰이 몰록이 되었다.
위험한 실험이니만큼 치료제를 가지고 있었던 엘우드 밀은 디트리히 폰을 치료시킬 요량으로 시간여행기라는 고도로 발전한 과학기술의 정점과 같은 기계를 작동시켜 과거로 도망쳤고 거기서……
디트리히 폰을 놓친 것이다.
치료제를 써볼 타이밍을 놓쳐 완전히 괴물이 되어버린 디트리히 폰을.
논거는 엘우드가 한 말이다.
‘몰록은 나의 업보다, 엘리즈.’
엘우드가 1년 동안 매일 같이 되뇌었던 그 말.
전에 엘리자베스는 몰록을 잡을 수 있는 독극물을 가지고도 몰록을 잡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몰록을 만든 것이 엘우드일 수도 있는 것이다.
몰록을 만들고, 몰록을 이 시대로 데려온 것, 그 자체가 엘우드일지도 모른다. 치료제도 없고 시간여행기도 없는 이 몰락해가는 레본에는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과학기술의 정점을 데리고 와 날뛰면서 이 세계를 망치도록 만든 게 바로 엘우드 밀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반면, 어쩌면 신의 계시 같기도 했다. 레본 따위, 망해버리라는 신의 계시.
“엘우드 밀만이 만들 수 있어. 치료제는.”
엘리자베스의 단호한 말에 케빈이 발끈해서 말했다.
“모든 전염병은 항체를……!”
“시간이 부족하잖아. 네 말대로 이건 전염병이야. 퀴닌 개발 같은 기적이 또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봐?”
엘리자베스가 케빈을 노려보며 말했다.
케빈은 엘우드 밀이 미래에서 왔다는 것, 엘리자베스도 미래에서 왔다는 것은 몰랐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대단치도 않은, 아니, 오히려 현재보다 개 같을지 모를 미래를 알려주는 것은 괴롭힘과 다를 바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울먹거리는 케빈의 어깨를 쥐었다.
“케빈. 나는 치료제를 포기하겠다는 게 아니야. 그냥 대안을 마련하겠다는 거야. 내가 반드시 엘우드 밀을 찾아낼 거야. 그분이 치료제를 가지고 있어. 그것만 있으면 사실 독극물 따위 쓸 일도 없어. 생쥐 반응으로 독극물은 만들어낼 수 있잖아. 초록색 발광 입자를 가진…….”
케빈이 거친 손길로 엘리자베스의 손을 떼어냈다.
“거짓말. 엘리자베스는 거짓말쟁이예요.”
케빈은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계단을 뛰듯 내려갔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뒷모습을 보며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곧 계단 아래에서 콜린이 올라오다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아, 두 분을 방해하려던 건…….”
무슨 방해? 엘리자베스는 해소되지 않은 자신의 가슴 속 격랑을 가라앉히며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 콜린이 무거운 풍로를 낑낑거리며 들고 올라오는 것을 보며 계단으로 걸어가 함께 풍로를 들었다.
“이걸 여기까지 혼자…… 엣취!”
엘리자베스는 비를 맞은 탓에 으슬으슬하게 올라오는 한기를 느끼며 재채기를 했다. 콜린이 혀를 차며 말했다.
“도련님께서는 가셨어요. 인사도 없이 말이에요.”
“알아요. 봤어요.”
“매정한 분이에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정만이랴. 엘리자베스는 풍로를 낑낑거리며 밀어두곤 3층에 둔 장작을 가지러 가는 콜린을 불렀다.
“콜린. 내가 부탁할 게 있는데요…….”
* * *
다음 날 아침에 출근했을 때는 케빈이 뚱한 얼굴로 먼저 연구실에서 엘리자베스를 맞이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코를 훌쩍거리며 케빈에게 인사했다.
“일찍 왔네? 어제 늦게 갔잖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비어 있는 루이 교수의 자리를 힐끔 보며 말했다.
“덕분에 연구할 게 늘어서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주려고?”
케빈은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될 지도 알 수 없어요. 초록색 발광 물질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몇 가지 추려보긴 했는데 얼마 전에 홀램브로 학술지에 갸흐통 출신의 여성 교사가 남편과 함께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했다는데, 이게 방출하는 방사선이라는 파장이 생명체의 체세포를 죽일 수 있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며칠 전 도서관에서 읽었던 학술지의 논문을 떠올렸다.
홀램브로 학술지에서는 분기별로 그 분기의 이오페아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논문을 심사해서 실었고, 연말쯤에는 시상식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저번 분기에 실렸던 방사선의 발견으로 이오페아 대륙에서 최초로 여성 과학자가 홀램브로 상을 받게 되는 날이 올 거라는 신문 기사를 접하고 뒤늦게 논문을 찾아본 것이었다. 스스로를 그렇게 지칭하기는 아직 부끄럽지만 과학자들이란 원래 자신의 분야가 아니면 과학이든 뭐든 티끌만큼도 관심이 없는 작자들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논문의 내용을 생각해보며 자신은 읽고도 독극물에 쓸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는 열띤 얼굴로 라듐에 대해 설명하는 케빈의 옆모습을 보았다. 엘우드 밀의 말대로 케빈은 천재를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의 노력을 갖춘 인간인 것이다.
케빈이 말했다.
“어쨌든 그래서 이걸 조심해서 실험에 써보겠다는 거죠. 생쥐실험이니까 일단은 미량이면 될 거고, 만약 된다고 해도 전용 보관통이 필요해서 어떨지는 모르지만.”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논문 속의 라듐은 상당히 위험한 물질이었다. 하지만 특수 물질을 갖추고 있다면 라듐도 사용할 법한 가치가 있었다. 미래에서 온 엘우드 밀이라면 분명 방사선을 차단할 만한 장비 속에 라듐을 보관했을 것이다.
“무거워도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요. 내가…… 치료제 만드는 것보다 독극물 만드는 게 더 힘들어요. 더.”
케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우. 안 그래도 복잡해 죽겠구만!”
케빈이 천장을 바라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쿡쿡 찔리는 심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케빈은 머리를 헝클이며 대답했다.
“큰 건 아니고요. 그냥 3일 뒤에 있는 심사 결과 발표요. 시간이 오전에서 오후로 바뀌었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바뀌는 게 왜 문제인가. 어차피 케빈이 부교수가 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