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혼하러 돌아왔다 109화 (109/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09화

케이가 오만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은 그 여자가 얼마나 왕족인 걸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몰라.”

“엘리자베스는…….”

“그 여자와 그 여자의 부모가 얼마나 감쪽같이 나를 속였던지. 타운하우스는 빚더미에 올라 있고 그 여자의 부모는 그 여자를 사교계에 데뷔시키고 드레스를 사 입고 도무지 용도를 알 수 없는 장식품을 사느라고 돈을 탕진했지. 어찌나 대단한 장식품이던지. 모두 왕족의 유서와 기품이 깃들어서 팔아치울 수가 없었어. 왜겠어. 이제 그런 왕족의 유서와 기품을 사주는 곳은 없으니까. 그건 전부 망해버린 레본의 증거물일 뿐이니까. 허울만 좋은 쓰레기. 그게 바로 레본의 왕족이고, 그 여자의 부모고, 그 여자니까.”

프란시스가 케이에게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엘리자베스는 주저앉아 있던 몸을 비틀비틀 일으켰다.

케이가 하는 수많은 말들 중에 제일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었다. 내가 불쌍하다는 말.

엘리자베스는 수치심으로 물든 얼굴을 하고 계단을 돌산을 오르는 심정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발끝에 수치스러운 삶의 행적을 주렁주렁 매단 것처럼 무릎이 무거웠다.

케이가 전부 알고 있었다니. 자신과 자신의 부모의 삶이 얼마나 거짓되었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니.

하긴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직접 타운하우스를 산 저 못된 녀석이. 제 치부를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이제 어떻게 케이 하커를 개자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멍청하고 어리석은 데다 허영에 둘러싸인 전 약혼녀마저도 불쌍히 여겨준 저 녀석을.

그러니까 네가 나빠.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삶에 허덕거리며 3층까지 기어 올라가 흐느끼기 시작했을 때, 케빈이 엘리자베스에게 걸어왔다.

네가 무조건 나빠.

너를 미워할 수도 없고 욕할 수도 없도록 나를 동정한 네가 나빠.

“엘리즈. 엘리즈…….”

케빈의 목소리에도 엘리자베스는 한참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 * *

프란시스는 거대한 덩치의 케이 하커가 이리 저리 날뛰는 것을 차분한 눈으로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걸 어떻게 알게 됐니?”

“그 타운하우스를 제가 샀으니까요.”

케이가 뒤를 돌아서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이제 작고 하얀 발은 사라진 뒤였다. 프란시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걸 왜 샀어? 네가 아는 동정심의 의미와 내가 아는 동정심의 의미는 심히 다른 것 같구나.”

“그럴 수도요.”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를 내던지다가 테이블 모서리에 찍힌 오른손을 보았다. 화끈거리는 것이 불덩이에 휩싸인 것 같았다.

케이가 손을 들어 커프스 링크를 바닥에 던지고 오른손을 꺼내자 고름과 섞인 묽은 피가 주룩 흘렀다. 툭, 툭. 핏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본 프란시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이는 프란시스를 노려보며 다가오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프란시스는 자리에 굳어서 말했다.

“팔이 왜 그래?”

케이가 말했다.

“좀 다쳤어요.”

“좀 다쳐서 그렇게 피가 흐른단 말이야? 세상에. 재킷을 벗어봐.”

케이는 셔츠 겨드랑이 께에 피가 고이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그만 갈게요.”

“로버트니?”

케이가 제가 걷어찬 의자를 억지로 벽에 기대 세워놓고 돌아섰을 때 프란시스가 말했다. 케이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물었다.

“뭐가요.”

“네가 엘리자베스한테 돌아올 수 없는 이유 말이야. 언제나 로버트였지?”

프란시스의 말에 케이가 뜨끈뜨끈한 재킷 안 오른팔을 만지며 벽에 이마를 댔다. 재수 없는 여자. 프란시스가 말을 하고 또 할 때마다 케이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프란시스가 말했다.

“너희가 약혼했을 무렵엔 로버트가 공작부부의 신분을 악용해서 이런저런 위험한 사업에 뛰어들었고, 또 너희가 파혼하고 나니 로버트가 엘리자베스를 이용하려고 하는 거겠지.”

프란시스의 말에 케이가 피로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그리고 벽에 기대서 더 해보라는 듯이 프란시스를 음울한 눈으로 보았다.

“켄드릭이 술에 취해서 난동을 부렸어. 이 저택에서. 엘리자베스가 두들겨 팰 걸 가지러 올라간 사이에 켄드릭이 그러더구나. 로버트가 엘리자베스를 죽이라고 국왕을 종용한다고 말이야. 아무리 클레몬트 성씨를 빼앗아도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왕족의 핏줄이고, 서열 순위를 가질 수 있는데다가 국가 전복적인 신약을 개발한 인간이라고 로버트가 매일 국왕에게 속닥거린다고 했어.”

프란시스는 거칠어지는 숨소리로 심장께를 문지르다가 다 식어빠진 홍차를 마셨다. 그녀의 손이 벌벌 떨렸다. 금단 증상이었다.

케이는 그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이국의 부족들이 레본의 무역회사와 거래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레본의 무역회사가 들여온 대마 때문이었다.

자연 상태의 대마를 품종 개량해 강력한 중독증상을 일으키게 하는 마약으로 만들어 이국에 판 레본의 무역회사들 때문에 부족민들이 아직도 금단 증상에 시달리거나 삶이 피폐해졌다고 케이를 죽이려던 부족장이 말했다. 부족장은 케이에게 호의적이었던 자신의 아들을 보내 협상하는 척해놓고는 그 새벽에 케이의 배에 군대를 보냈다.

독이 묻은 곡도에 당했을 때, 순식간에 팔 전체가 파랗게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케이는 생각했다.

결국 썩는구나.

아주 예전에 썩어버렸던 영혼과 달리 육체는 이제야 썩기 시작했구나.

‘미망으로부터 진리로 나를 인도하소서.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나를 인도하소서. 죽음으로부터 영원으로 나를 인도하소서.’

케이는 그나마 케이에게 호의적이었던 부족장의 아들이 쓰러진 자신에게 자신들의 언어로 속삭이는 말을 들으며 아루쉬라는 까만 피부의 남자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죽음으로부터 영원이라니.

케이는 죽음을 원했다.

사라짐을 원했다.

이 까만 피부의 남자가 믿는 종교가 말하는 내생 같은 것보다야 차라리 레본의 사제들이 말하는 지옥이 나았다. 내생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엘리자베스를 만날 수도 있었지만 지옥에서는 엘리자베스를 만날 일이 없었으므로.

케이에게 해줄 수 있는 처치를 다했다고 말하며 아루쉬는 케이에게 어색한 발음의 레본어로 물었다.

‘본국에 놓고 온 처자식이 있나? 연인은? 유언을 남기고 싶다면 지금 말해요. 이제 당신의 목숨은 죽음의 신의 변덕에 달려 있소.’

케이는 그 순간에 유언을 남길 상대로 단 한사람을 떠올렸다.

그 여자에게 유언을 남긴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케이는 수많은 말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의식으로 튀어오르는 문장들은 이런 것이었다. 케이에게 낯선 선상 위의 까만 밤하늘에 하얀 물감이 있다면 꼭꼭 눌러 쓰고 싶은 문장들.

너 때문에 내 세상이 변했어.

너는 나 때문에 너와 너의 세상이 변했다고, 그 변화가 퍽 마음에 든다고 말했지만 나는 아니야.

내 세상은 너이기 때문에,

그런 네가, 내 세상이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렸기 때문에,

나는 불행해.

나는 한없이 불행해질 거야.

살아남더라도 죽더라도.

케이는 아루쉬에게 말했다.

‘없어. 내가 유언을 남길 상대도, 유언이랄 법한 말도.’

아루쉬는 고개를 끄덕이고 케이에게 수면 성분과 진통 성분이 들었다는 약을 먹였다.

케이는 그날을 떠올리며 프란시스를 보았다. 케이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프란시스는 그런 케이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 뒤로 내내 생각했지. 왜 로버트가 엘리자베스를 죽이려고 할까. 그런데 생각하다보니까 질문이 잘못 됐더라고. 왜 로버트가 엘리자베스를 살려뒀을까. 나는 그렇게 물었어야 하는 거야.”

프란시스의 말에 케이가 눈을 감았다. 케이의 상처에서 흐른 피는 어느새 가슴팍으로도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프란시스가 말했다.

“로버트는 너를 협박하고 싶었던 거야. 로버트는 제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가 누군지 알고 있으니까. 로버트는 멋대로 공장과 저택을 미쳐버린 전 부인에게 줘버리곤 무역회사를 만들어 이오페아의 돈을 긁어모으고 있는 너를 두려워하고 있어. 당연하지. 그러니 전처럼 마구간에서 재울 수도, 발로 찰 수도, 헌 옷을 입히고, 공장에서 과로하게 만들며 자존심에 상처를 낼 수도 없어진 다 커버린 제 아들에게 채울 목줄이 필요한 거지. 로버트 같은 남자들은 애정이라는 감정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 애정이란 이용해먹기 좋은 감정이니까.”

케이는 프란시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열이 나는 팔을 쥔 채로 조소했다.

“훌륭한 소설이군. 소설가로 등단하셔도 될 겁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결론이 뭔지 알아? 결국 너는 엘리자베스를 사랑한다는 거야.”

“그런데 어쩌죠. 저는 소설은 안 읽습니다.”

케이는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대충 닦아내고 벽에서 힘겹게 몸을 뗐다. 그리고 프란시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 그만 해요.”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왜요. 나를 죽이려고 했던 주제에 대체 왜.”

케이가 팔을 쥐고 도망치듯이 다이닝 룸을 나가자 프란시스가 그런 케이의 등에 대고 말했다.

“넌 내 아들이니까.”

프란시스의 말에 케이가 고개를 돌려 프란시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헛소리야.”

“나한테 어머니라고 했잖아. 네가.”

프란시스가 케이를 노려보자 케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신음에 가까운 웃음소리를 흘렸다.

“내가 왜 그날 당신을 어머니라고 불렀는지 알아?”

프란시스는 케이의 몸에서 나오는 짐승 같은 위험한 기운을 감지하고 몸을 움츠렸다. 케이는 당장이라도 프란시스의 목을 졸라 비틀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완력을 갖춘 팔로 제 머리를 헝클이며 말했다.

“그게 당신이 가장 죄책감을 느낄 만한 말이기 때문이야. 지난 20년간, 나를 때리지도 나에게 욕을 하지도 않았던 당신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 나를 직접적으로 썩어들어 가게 만들었던 당신이 적어도 그 말에는 죄책감을 느낄 것 같았기 때문이야. 당신이 한 말을 돌려주지.”

케이는 비틀린 미소를 활짝 지으며 프란시스를 죽여버릴 것 같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아들? 감히. 감히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

케이는 문을 뜯어낼 듯이 열고 비가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는 밖으로 걸어갔다. 프란시스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거기 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또 내뱉었다가 외쳤다.

“메리! 메리!”

프란시스가 꺽꺽거리며 한참 부르자 메리가 지하에 딸린 주방에서 달려 나왔다. 프란시스가 메리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당장 저 아이에게 외투를 가져다줘. 당장!”

“마님……. 마님!”

* * *

로킨트 저택의 3층 창 너머로 엘리자베스는 비를 뚫고 달려 나가는 케이와, 케이에게 외투를 가져다주러 달려나온 메리를 내려다보았다. 토비는 마차 안팎을 닦아낸 듯 보이는 헝겊을 들고 거칠게 마부석에 올라타는 케이를 말리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저 고집 센 남자는 메리와 토비를 물리치고 마차를 몰아 달리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의 등 뒤에서 케빈이 말했다.

“케이 씨에게 말해요. 내가 말하기 전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