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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08화 (108/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08화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자 케이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나는 신사가 아니라고.”

“너……!”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건 알겠지만 메리가 음식을 준비해놨어.”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소리치려는 순간, 불쑥 다이닝 룸에서 튀어나온 프란시스가 케이를 보며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을까 싶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식사 하고 왔어요.”

케이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담담하게 대답했다. 프란시스는 코웃음을 쳤다.

“시끄러워. 그럼 저 음식을 다 버리라는 거야? 버릇없는 녀석. 어른이 식사를 권하는데 하고 왔어도 먹어야지.”

“…….”

케이가 마지못해 일어나자 엘리자베스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오,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젖기도 했고 빌린 옷이에요. 돌려줘야 돼서…….”

엘리자베스가 펑퍼짐한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프란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에게도 말했다.

“너도 옷을 갈아입어. 예전에 네가 쓰던 옷들을 메리가 잘 정돈해서 넣어놨어.”

“괜찮습니다. 어차피 식사만 하고 갈 거고. 그 옷들은 태워버리세요.”

케이의 싸늘한 말을 들으며 엘리자베스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케이를 힐끔 보고는 다이닝 룸으로 케이를 안내했다.

처음 이 저택을 지을 때 로버트가 억지로 쑤셔 넣었던 거대하고 기다란 테이블에 프란시스와 케이가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메리는 두 사람의 잔에 따뜻한 차를 따른 후 말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세요.”

프란시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메리가 케이에게 애틋한 시선을 보내곤 아래층으로 걸어갔다. 프란시스는 메리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먼저 숟가락을 들어 스프를 먹고 있는 케이를 가만히 보았다. 프란시스는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고 차만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돌아가다니? 어디로 간다는 거니?”

프란시스의 말에 케이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케이는 거만하게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촛대를 가만히 보며 말했다.

“노스 리오든에 타운하우스를 빌렸어요. 다 같이 쓰게.”

“다 같이?”

프란시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네.”

케이는 단답하곤 숟가락을 들어서 스프 그릇을 괜히 소리가 나도록 휘저었다.

프란시스가 말했다.

“다 같이가 누군데?”

“옛 친구들……. 무역회사 사람들……. 그리고…….”

“앰버 플래스.”

프란시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케이가 혀를 차곤 숟가락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냅킨으로 입을 닦아낸 후 말했다.

“이젠 앰버 모건이에요.”

“앰버 모건이든 앰버 플래스든 그 여자는 너랑 어울리지 않아. 화류계 여자라며?”

프란시스의 말에 케이가 피식 웃었다.

케이는 프란시스를 올려다보며 눈썹을 꿈틀했다.

“그러니 잘 어울리죠. 하커 가의 사생아와 화류계의 여자만큼 잘 어울리는 조합이 어딨어요. 혹시 모르죠. 저를 낳은 여자도 접대부였을지.”

케이의 말에 프란시스가 케이를 노려보았다.

프란시스도, 로버트도 케이에게 케이의 친모에 대해 이야기해준 적이 없었다. 프란시스와 로버트가 케이의 친모를 알고는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케이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낳아준 여자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낳은 여자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자신의 생각은 가끔 하는지, 데리러 올 계획 같은 것도 세워본 적이 있는지. 케이는 살아오는 내내 그런 것들을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

“멍청한 짓이야.”

프란시스가 케이를 노려보며 찻잔을 집어들고 말했다. 케이는 별 대답 없이 빵을 찢어 먹기 시작했다. 어제 하루 종일 먹은 게 없는 속에 음식을 짧은 기간 동안 두 번이나 집어넣으니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해도 불행해질 수 있는 게 결혼이야.”

프란시스의 말에 케이는 빵을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그 반대겠죠.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해야 불행해질 수 있는 게 결혼이에요.”

케이는 음식물이 입에 든 채로 장작처럼 두툼한 팔을 식탁 위에 올려놓은 채 피로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우린 절대 불행해지지 않을 겁니다.”

“행복하지도 않겠지.”

“행복하지 않은 게 불행한 것보단 낫잖아요.”

케이는 그렇게 말하곤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

“저 여자는 나를 불행하게 할 거예요.”

* * *

“저 여자는 나를 불행하게 할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들으며 걸음을 멈췄다.

걸음을 멈춘 곳에서 고개를 드니 케빈이 수건을 들고 엘리자베스와 똑같이 다이닝 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케빈이 당장이라도 계단을 뛰어내려 가려는 것 같아서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케빈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올라가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들어야 했다. 케이를 미워할 만한 이유는 단 하나도 놓칠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케이가 자신을 불행의 근원으로 여기고 있다는 건 훌륭한 논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두 사람은 서로를 불행하게 만들었으니까.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배은망덕하다 여겼고,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건방지다 여겼으니까.

그게 우리 두 사람 관계의 본질이니까.

엘리자베스가 가만히 서 있자 케빈이 화가 난 얼굴로 엘리자베스의 발 위에 수건을 내던지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엘리자베스는 몸을 숙여 수건을 잡으려고 했다.

“거짓말.”

프란시스가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 * *

“내 주변 여자들은 하나같이 내 말을 안 믿는군.”

케이의 건방진 말에 프란시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말 같은 소리를 해야 믿지. 그 아이만큼 널 사랑해줄 여자는 없어.”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이미 늦었어요.”

케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케이는 들고 있던 남은 빵조각으로 스프 그릇을 청소하다가 알 수 없는 불덩이 같은 것이 가슴 속에서 치미는 것을 느꼈다.

나만큼 널 사랑해줄 여자는 없어.

엘리자베스가 늘 했던 말이었다.

거짓말쟁이가 누군데.

케이는 얼굴에 삐뚜름한 조소를 걸친 채 프란시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지? 내 아버지도 분명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텐데 말이야. 원래 배신을 마음에 품고 다니는 인간들에겐 사랑이 쉽지.”

케이의 말에 프란시스의 얼굴이 고통으로 비틀렸다. 프란시스가 경련이 이는 입술로 말했다.

“감히. 감히 나한테 그 따위로 말하지 마라.”

프란시스의 붉어진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케이가 천천히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케이가 정중하게 말했다.

“사과드리죠, 프란시스 부인.”

프란시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테이블을 쥐었다. 케이는 자리에서 일어날 것처럼 들썩거리다가 멈칫했다.

다이닝 룸에서 보이는 1층 계단 쪽으로 난 통로에 하얀 수건이 떨어져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케이는 일부러 포크를 툭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포크를 집기 위해 몸을 숙였다. 고개를 내려 각도를 조절했다. 그러자 수건 앞에 있는 작고 하얀 발이 보였다. 케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케이가 표정을 정돈하고 테이블 위로 몸을 일으키자 혈색이 돌아온 프란시스가 얕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사과하지 않아도 돼.”

“…….”

“너한테 사과를 받으면 기분이 나빠지니까.”

프란시스는 그렇게 말하며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프란시스의 시선을 피하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프란시스가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이혼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을 거야. 이혼하고 이런 저택에, 공장에, 거기다 엘리자베스까지. 과분해.”

케이는 하얀 발을 보고 나니 왠지 모르게 다이닝 룸의 벽 너머로 달콤한 숨소리가 자신의 귓가를 맴도는 기분을 느꼈다.

그 보드랍고 젖어 있는 입술이 뱉을 숨. 저 여자의 내면을 모두 통과해서 흘러나온 공기에 묻어 있는 체취와 습기.

케이는 저 여자의 목구멍을 통해서 나오는 것은 독가스라고 해도 마실 마음을 갖추고 있었다.

“네가 나한테 엘리자베스를 보살펴달라고 했을 땐 네가 사랑에 미쳐 신용할 수 없는 상대와 거래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제 보니 넌 내가 아니라 엘리자베스를 믿었던 거야. 그 누구와 함께 있어도 결국 상대의 마음을 얻어낼 아이니까.”

프란시스의 말에 케이는 달콤하고 위험한 상상에서 빠져나와 미간을 찌푸렸다.

“다행이군요. 서로 맘에 든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그럼 이제 나를 불행하게 한 여자 둘이서 똘똘 뭉쳐 오래도록 행복하시면 됩니다. 돈이 궁하다고 들었어요. 공장과 저택으로는 부족한 거 같으니 수표를…….”

케이가 당장이라도 품 안에서 수표를 꺼내어 서명할 듯한 몸짓을 해보일 때였다. 프란시스가 말했다.

“돌아와. 이제 그만 불행해지고 돌아와. 너는 네가 불행하지 않다고 했지만 넌 불행해. 다 보여. 네가 지금이라도 돌아온다고 하면 모두 돌려주마. 네 저택. 네 공장. 그리고 엘리자베스까지.”

프란시스의 말에 케이가 재킷 안에 넣었던 손을 빼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프란시스를 노려보았다. 프란시스는 케이를 보며 붉어진 눈에 눈물을 매달았다.

“나는 사라져주마. 아니, 사라지지 않아도 되니? 응? 그렇다고 대답하면 너희 둘이 이 저택을 쓰는 동안 나는 마구간에서 토비랑 자마. 밤에는 말똥을 베고 자고 낮에는 심부름을 하면서 살게. 말갈기를 빗질하는 법쯤이야 이 나이에도 배울 수 있어.”

프란시스의 말에 케이가 거친 숨을 뱉다 못해 욕지거리를 했다.

“젠장. 닥치세요…….”

케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프란시스는 그런 케이를 보며 말했다.

“네가 마구간에서 잔 세월이 20년이지? 그럼 나도 그만큼 마구간에서 자마. 마구간에서 똥을 치우고 말을 먹이면서 살다가…… 20년 후부터는……. 또 네가 사라지라고 하면 사라지고 그렇지 않으면…….”

케이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앉아 있던 의자를 발로 차버렸다. 콰광! 의자 다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파편이 튀었다.

프란시스는 그 소리에도 조금도 놀라지 않은 눈으로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같이 살자. 셋이서. 우리가 서로의 가족이 되는 거야.”

케이는 프란시스에게 소리쳤다.

“미치셨어요? 아버지가 당신이 미쳤다고 했을 때, 그래서 정신병원에 보내야 한다고 했을 때 시키는 대로 했어야 해!”

케이의 말에 프란시스가 울음기가 베인 목소리로 말했다.

“널 봐. 널 보란 말이야. 이렇게 망가진 채로 어떻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엘리자베스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애초에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왜 날보고 그 아이를 보살피라고 했어.”

케이는 벽 너머로 들려오는 작은 흐느낌을 들었다. 그리고 프란시스가 볼 수 없는 통로 쪽 시야로 작은 발이 꼼지락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그 여자가 불쌍하니까. 집도 부모도 그렇게 목매달았던 신분도 잃고 가난뱅이가 된 게 불쌍했으니까. 난…… 저 여자가 그냥 불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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