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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07화 (107/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07화

“아, 토비는 지금 위층에…… 케빈 씨랑 싸우고 있어요.”

메리가 그렇게 말하며 토비를 부르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케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케빈 씨?”

그때 콜린이 말했다.

“제가 풍로를 가져오겠습니다. 벽난로는 어제부터는 밤에도 뗄 일이 없을 것 같아서 청소해뒀거든요. 비까지 오니 두 분이 몸을 덥히시려면 시간이 걸리실 거예요.”

훌륭한 집사답게 콜린은 두 사람의 몸 상태를 먼저 살폈다. 엘리자베스가 콜린에게 짧게 고맙다고 말하는 사이에 위층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쿵쿵쿵!

발소리가 천둥처럼 계단 전체를 울리고, 곧 토비가 얼굴을 드러냈다. 토비는 천둥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와 놓고는 케이를 보자 몇 걸음 남긴 채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도, 도련님……?”

새까매진데다가 더 커진 케이를 본 토비의 얼굴이 겁에 질렸다. 가장 탐나는 사탕을 손에 쥐었다가 빼앗긴 어린 아이처럼, 토비는 케이가 케이가 맞는지 고민하는 듯했다.

토비가 그렇게 굳어 있는 사이에 토비의 뒤를 따라 내려온 케빈이 계단참에 서서 케이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분노에 찬 얼굴을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케이는 토비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얼굴이 왜 그래?”

토비는 케이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에 케이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얼른 뛰어서 케이를 꽉 껴안았다. 토비는 시뻘게진 눈으로 케이를 꽉 안고 케이의 거대한 어깨에 얼굴을 부볐다.

“도련님이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어요. 무역회사에 구직을 했다가 돌아오지 못한 놈이 몇인데요.”

토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메리의 말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했다. 무역회사가 얼마나 험한 일인지 엘리자베스를 빼고 나머지 사람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케이의 손은 이국에서 당한 거예요. 그곳 부족장이 처음에 배가 들어오는 걸 반대했거든요. 독이 묻은 곡도에 당해서 케이가 죽을 뻔했다고 들었어요.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도 팔은 잘라내야 할 거라고 했는데, 부족장 승계자쯤 되는 인물이 케이를 좋게 봐서 협정도 맺고 케이의 팔도 고쳐줬어요. 주술사라고 하더군요.’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팔에 난 기다란 상처를 떠올렸다. 그 상처가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었을까. 무의식중에 케이를 걱정하는 스스로에게 환멸이 났다.

엘리자베스는 서러워지는 기분을 참고 말했다.

“토비가 나를 구해주다 다쳤어. 1년 동안 관리만 잘해주면 깊은 흉터가 남진 않을 것 같은데 말을 안 들어. 네가 잔소리 좀 해.”

엘리자베스가 퉁명스레 말하자 케이가 토비를 제 몸에서 떼어내고는 토비의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케이는 토비의 흉터를 자세히 살피며 말했다.

“구해줬다고?”

토비는 케이의 질문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레이디를 위해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에요.”

토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위대한 일이었지. 토비의 기지가 아니었으면 그날 폭도들한테 당했을 거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힐끔 그녀를 보았다.

폭도.

케이는 잠시 무슨 생각에 골몰하다가 토비의 머리를 마구 헝클이더니 슬며시 웃었다.

“남자 얼굴에 흉터 하나쯤은 자랑거리지. 남자가 됐구나. 토비.”

케이의 거친 손길에 토비가 사냥개처럼 낑낑거리며 웃었다. 토비는 키득거리며 케이의 얼굴에 난 생채기를 가리켰다. 아까 엘리자베스가 침대에서 낸 것이었다.

“이것도 자랑거리로 남긴 거예요?”

토비의 질문에 케이가 씨익 웃었다.

“그럼.”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다가 어느새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는 케빈과 눈이 마주쳤다.

토비가 말했다.

“비가 너무 들이치니까 마차 안을 정리해놓을게요.”

토비는 그렇게 말하곤 밖으로 나갔다. 메리는 이미 먹었다는 케이와 엘리자베스의 말에도 불구하고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 바람에 문 앞에는 케이와 엘리자베스, 케빈만이 남았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딱딱한 얼굴을 보며 불안해졌다. 오늘 오후에 케빈에게 했던 말 때문이었다.

그녀가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 속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케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요, 케이 하커 씨.”

케빈은 신사처럼 손을 내밀었다.

케이는 그것을 보더니 피식 웃고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긴. 이틀 전에도 봤잖나. 감동적인 발표였네.”

케이의 목소리에 담긴 조롱 투에 케빈의 눈썹이 꿈틀했다. 케빈은 입술에 살짝 일어난 경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사업가들이란 돈밖에 모르죠. 과학적인 지식은 개뿔도 없으면서.”

“과학자들은 알거지들이면서 자기들이 고귀한 줄 알지.”

케이는 케빈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대꾸했다. 엘리자베스는 두 사람 사이의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을 완화시키기 위해 케빈에게 말했다.

“오늘은 고마워. 너무 늦어서 미안해, 케빈.”

“고맙긴요. 와서 한 거라고는 맛있는 거 얻어먹고 등 따시게 앉아 있던 것뿐인데요, 엘리즈.”

케빈은 과하게 다정한 어투로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케이가 중얼거렸다.

“엘리즈?”

케빈은 왜인지 모르게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불쑥 손을 내밀어 엘리자베스의 젖은 머리카락을 살짝 만졌다.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요, 엘리즈.”

“어? 어…….”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손길보다는 케빈의 걱정 어린 눈빛이 더 당혹스러웠다.

케빈은 가끔 엘리자베스가 논문에 숫자를 잘못 쓰면 펜을 든 엘리자베스의 손등을 찰싹찰싹 때리기도 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에게는 케빈과의 접촉이 별로 감응을 주지 않았다.

“수건 가져다줄까요?”

“아니, 그 뭐……. 콜린이 가져올 텐데…….”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케이를 힐끔 보고 응접실을 가리켰다.

“일단 앉자. 응접실에.”

케이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까 프란시스가 한 말 때문에 아직도 저렇게 화가 난 걸까?

엘리자베스는 작고 멍청한 두더지가 된 기분으로 응접실로 걸어갔다. 그러자 케빈이 재빨리 엘리자베스를 앞지르더니 엘리자베스가 앉으려는 소파를 뒤에서 뺐다.

“뭐 하는 거야……? 나 엉덩방아 찧으라고?”

엘리자베스가 놀라서 말하자 케빈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의자 빼주는 건데요?”

“……소파는 빼주는 거 아니야.”

케이가 피식 웃었다. 케빈이 헛기침을 하며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건너편 소파에 앉아서 삐뚤어진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케빈이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그, 그래도 빼줄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빈이 빼주는 소파에 아주 불편하게 앉았다.

“어때요? 추워요, 엘리즈?”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

케이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코웃음을 쳤다. 케빈은 케이를 휙 노려보았다.

케이가 말했다.

“엘리즈? 그게 뭐야?”

케이는 분명 엘리자베스를 보고 말했으므로 엘리자베스가 대답하려고 했지만 케빈이 엘리자베스를 앞서서 말했다.

“별칭이죠. 그러니까…… 애칭! 애칭!”

케빈은 콧구멍을 벌렁거리면서 말했다. 케빈이 너무 흥분해서 말하는 바람에 엘리자베스는 ‘애칭’이란 애인들 사이에서 부르는 호칭을 일컫는 어휘임으로 우리 사이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고 정정해주는 것을 잊고 말했다.

“그러시겠지.”

케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케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케이를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우리 엘리즈가 감기에 들기 십상이니까 위에서 담요라도 가져와야겠어요.”

우리 엘리즈? 엘리자베스는 아까부터 케빈이 보여주는 호의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실 엘리자베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크나큰 실수를 한 건 아닐까? 그래서 엘리자베스를 분쇄기에 넣고 갈아버리기 직전에 케빈이 자비를 베푸는 건가?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계단으로 올라가는 케빈을 보았다.

그때 케이가 나지막이 말했다.

“저 새끼 뭐야?”

케이의 목소리에 담긴 날카로운 적의를 느낀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 새끼가 아니라 케빈이야. 너도 본 적 있잖아.”

“내가 봤던 건 소년이었지. 네 옆에서 발정난 개새끼처럼 돌아다니는 저런 수놈을 본 건 아니었는데?”

케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케이의 몸에선 왜인지 모를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고 그 열기 탓에 케이의 내면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엘리자베스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케빈은 열여덟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이야. 넌 열아홉이었지만, 어쨌든.”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말에 코웃음을 치자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구겼다.

“왜. 그냥 어린애야.”

“열여덟 짜리 소년들이 여자를 보고 무슨 상상을 하는지 알면 그런 소리를 핑계랍시고 대진 않을 걸.”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소파 등받침에 뒤통수를 기댔다. 마치 머리가 아프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호기심 정도야 있겠지.”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놓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케빈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싶어서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케이는 집요하게 말했다.

“호기심 정도가 아니야. 내가 열아홉 때 널 놓고 얼마나 불결하고 더러운 상상을 했는지 알아?”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다들 어디론가 사라진 차라 응접실엔 분명히 두 사람 밖에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반응에도 미동도 하지 않고 오만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모욕적일 정도로 매혹적인.

엘리자베스는 이 남자를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케이가 자신을 희롱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지지 않기 위해 말했다.

“모르겠는데. 말해주든지.”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는 열기에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이야?”

엘리자베스는 어쩐지 대화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여기면서 대답했다.

“당연하지.”

“……싫어.”

“것 봐. 넌 그냥 날 놀리려고 말을 지어낸 거야.”

“아니야.”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마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 갈색 눈동자 속에 든 욕망 같은 것을 읽었다.

엘리자베스는 본능적으로 케이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케이를 자극하기 위해 말했다.

“그럼 말해봐.”

“어디서부터 말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도발에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듯 물었다.

“전부 다. 옷을 벗기는 것부터 시작하든지.”

“옷은 이미 벗고 있지.”

케이의 여유로운 목소리에 엘리자베스가 소리쳤다.

“케이 하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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