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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06화 (106/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06화

케이는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건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자베스는 스프 자국이 묻은 채로 고고하게 굴었다는 게 창피해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케이를 노려보며 케이의 손을 쳐냈다.

케이는 잠시 굳어 있다가 천천히 제 손을 빼내더니 스프가 묻은 손을 제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제 손가락을 핥는 것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신사가 할 짓이 아니야.”

“난 신사가 아니래도.”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뺨을 때리고 싶어지는 기분을 눌러 참으며 말했다.

“나가야겠어. 시간이 늦었고 비도 얼추 그치는 것 같으…….”

엘리자베스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천둥이 큰 소리를 내며 하늘을 울렸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나이프를 놓쳤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다가 대구 껍질을 통째로 질겅질겅 씹으며 일어났다.

“맘대로 해. 넌 흐린 하늘을 보고도 맑은 하늘이라고 스스로를 속여 넘길 희대의 사기꾼이니까.”

케이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의자를 집어넣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화가 났다는 걸 알았는데, 왜 화가 났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맘대로 자길 놀려놓고 이젠 화가 났다니.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질려가는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엘리자베스가 빵을 스프에 듬뿍 적셔 씹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케이 하커는 어느새 재킷을 입고 엘리자베스에게도 재킷을 내주었다. 엘리자베스는 재킷을 사양할까 하다가 어차피 내일 돌려주면 되겠지, 생각하며 재킷에 팔을 꿰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어깨에서 한 뼘씩은 남는 듯한 재킷을 입은 건지 걸친 건지 싶게 덮은 채로 말했다.

“오늘 수업료는…….”

“수업료 얘기 좀 그만해.”

“받겠다는 거거든! 이 수모를 당했으니까 받아야겠어!”

엘리자베스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잠시 그런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곤 문을 열었다. 그러자 번쩍거리는 번개 불빛과 함께 비가 새어 들어왔다.

엘리자베스는 막상 잘 데워진 몸으로 저 진창에 뛰어들 생각을 하니 한숨만 나왔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꼿꼿이 편 허리로 문 앞에 섰다.

문 앞에 서니 더 가관이었다.

“당연히 마차는 거절하시겠지.”

케이는 비꼬는 말투로 진창을 같이 바라보며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왜 거절해? 내가 너한테 청혼이라도 받았어? 마차 따위야 받을 수 있어.”

엘리자베스는 강단 있게 말해놓고 청혼이라는 글자를 꺼낸 것을 후회했다. 청혼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엘리자베스는 엉망진창이었던 두 사람의 청혼이 떠올랐고 그게 결국 모두 엘리자베스의 고집 때문이라는 사실 역시 뇌리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생각으로 또다시 혼란스러워지는 머릿속을 정돈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케이가 조롱기가 섞인 말투로 말했다.

“마차를 받고 청혼을 받지 말았어야지. 멍청하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수도 있을까?”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굳어진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웠고 문 앞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모양새가 마치 무도회에서의 그날 같은 느낌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딱딱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정신이야?”

“아니.”

“그런 것 같았어.”

엘리자베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자 케이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 마구간으로 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빗속에서 능숙하게 마차에 말을 매는 것을 보았다. 사용인이 필요 없는 솜씨긴 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재빠른 손길 덕에 빗속에서 오래 떨지 않고 케이가 열어주는 문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마부석 쪽으로 나 있는 창을 열어 케이에게 말했다.

“어떻게 운전해? 빗길이잖아.”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러곤 마구간에서 꺼내온 듯한 플랫 캡을 쓰며 대답했다.

“알아서 잘.”

엘리자베스는 케이는 평범한 대답도 얄밉게 하는 재주가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기억해내고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차양도 없는 마부석에서 케이가 말을 몰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타닥타닥 마차 천장에 닿아 튀어오르는 빗소리를 들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한 케이에게 말했다.

“로킨트로 갈 거야.”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마차의 속도를 줄이고 엘리자베스 쪽을 보았다.

“그래.”

케이의 대답에 엘리자베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원래 주말에만 가는데 오늘은 로킨트로 가야 해.”

엘리자베스는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오는 것을 느끼며 케이에게 말했다. 케이는 별 대답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조금 더 목소리를 키워서 말했다. 꽉 메인 목소리가 나왔다.

“프란시스가 아파.”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고집스러운 어깨를 보았다. 비싸 보이는 재킷을 타고 흐르는 빗물도 말이다.

“미안해. 네가 나를 로킨트에서 지내게 한 건 전부 프란시스를 돌보라는 의미였을 텐데. 내가 그러지 못했어.”

케이는 능숙하게 말을 몰다가 입을 열었다.

“……죽는다고 하나?”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좀……. 그냥…….”

엘리자베스는 등받이에 몸을 더 푹 기대면서 이 등받이로 몸이 빨려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파. 아픈 거야.”

“……죽고 싶어 한다는 뜻이군.”

케이의 담담한 말에 엘리자베스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녀가 결코 쓰고 싶지 않았던 단어를 케이가 말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대단치도 않은 일이야. 남편의 사생아와 매일 같이 얼굴을 보며 살아야했던 귀부인이 얼마나 되겠어.”

케이의 말을 들으며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 때문이 아니야.”

“그렇겠지.”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케이의 말을 믿지 않듯 케이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거짓말쟁이들. 우리는 서로를 거짓말쟁이로 여기는 거짓말쟁이들이야.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 *

프란시스는 로킨트 저택 1층 응접실에서 발은 스툴에 올리고 몸은 소파에 기댄 채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책 위로 얼굴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드디어 키스할 남자를 구한 거니, 엘리자베스? 네가 괜찮은 남자를 만나서 밤을 새고 들어온다면 축복해주고 싶지만 비오는 날엔 집에 들어올 거라면 더 일찍 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특히나 네 손님이 집에서 기다리는 동안엔 말이다. 그 재미없는 꼬마 과학자 씨께서는 밥 먹는 내내 알아듣지 못할 말만 하느라고…….”

저벅, 저벅.

프란시스는 빗물을 털어내는 소리 사이로 들리는 두 개의 발소리를 듣고 의아함을 느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젖은 머리를 털어내는 엘리자베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등 뒤의 사내를 힐끔 바라보았다.

문틀에 닿을 것처럼 커다랗고 얼굴에 표정이라곤 없는 갈색 머리카락, 갈색 눈동자를 가진 사내.

케이는 무감한 얼굴로 제 것이었던 저택의 내부를 처음 보는 것처럼 살펴보다 프란시스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숙였다.

프란시스는 그 사내를 바라보며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엘리자베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엘리자베스가 궁지에 몰린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요. 우연히 만나서 태워달라고 했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프란시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우연히?”

“네. 우연히.”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눈을 피하며 재킷에 묻은 물을 털어냈다. 그러자 프란시스가 눈을 돌려 케이를 보았다.

케이가 말했다.

“비슷해요.”

케이는 그렇게 말하곤 프란시스를 아주 짧게 위아래로 훑어보곤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프란시스가 케이가 돌아서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차라도 마시고 가. 비가 많이 오잖니. 차 마실 동안 그칠지도 몰라.”

프란시스의 말에 케이가 우뚝 멈춰 섰다. 케이는 몸은 돌리지 않고 고개만 돌려 대답했다.

“오늘 새벽까지 그칠 기세가 아니에요.”

케이가 그렇게 말하며 문고리를 잡자 프란시스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넌 늘 그런 식이야!”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사이, 메리의 일을 도우러 같이 주방에 들어갔던 콜린이 메리와 함께 나오다가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쳤다. 프란시스와 케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각도였으므로 엘리자베스는 얼른 입가에 조용히 하란 뜻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케이가 문고리에서 손을 떼자 프란시스가 더 세게 케이를 몰아붙였다.

“무덤덤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 사람을 교묘하게 괴롭히지! 너는 늙고 힘도 없는 내가 이제는 전 남편의 사생아가 빗길에 마차 사고라도 당할까 봐 걱정까지 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고얀 녀석! 당장 들어와! 당장 들어와서 차를 마시라고!”

프란시스가 그렇게 말하며 케이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메리와 콜린을 스쳐 다이닝 룸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가만히 서서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프란시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메리와 콜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케이와 눈이 마주친 메리는 순식간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말았다. 케이는 그런 메리에게 야박스러울 정도로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군.”

결국 메리는 그 말에 폭발해서 케이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퍽 때렸다.

“도련님! 대체 이게 얼마 만이에요! 해적과 전쟁을 하다가 오셨다면서요!”

“전쟁?”

전쟁이란 무슨 말이고, 대체 왜 메리가 케이의 소식을 자기보다 많이 알고 있는 걸까?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메리는 엘리자베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눈물만 흘리며 케이의 팔꿈치를 잡고 말했다.

“대체 어쩜 편지 한 통을 안 하실 수가 있어요?”

메리의 말에 케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편지가 가는 곳이 아니었어.”

케이의 대답에 메리가 한 소리를 더 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콜린이 메리 앞으로 슬그머니 나와서 말했다.

“돌아오신 겁니까?”

콜린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보았다.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콜린의 말에 엘리자베스도 묘한 기대감을 가졌다. 그게 프란시스를 위함이라고 포장하고 싶었지만 엘리자베스도 알았다. 그냥 죽기 전에 케이 하커를 옆에 두고 자꾸만 보고, 대화하고, 싸우고, 괴롭히고 싶은 거라는 걸.

케이가 대답했다.

“그냥 데려다주러 온 거야.”

케이의 대답에 콜린과 메리가 살짝 실망한 얼굴을 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느낀 엘리자베스가 짐짓 담담하게 말했다.

“토비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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