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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05화 (105/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05화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상처를 본 순간 케이가 까마귀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니, 어쩌면 케이를 발표회에서 마주친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키스할 때부터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두운 목소리와 그 속에 담긴 한없는 욕망이 가면으로 덮인 덕에 더더욱 명확하게 드러나서, 그 욕망이 전부 나를 향한 것이라는 것이 좋아서 모르는 척했는지도 모르겠다. 네 말대로 남자는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여선생을 생각하면서도 몽정할 수 있는 생명체일 텐데도.

그렇다면 너의 키스도 그저 정복이나 점령의 의미를 가졌나.

3개월 만에 만난 몰락한 왕족이 된 전 약혼자에게 키스하며 너는 혁명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로킨트 끄트머리에 살면서 여전히 너를 기다리는 여자를 희롱하는 것, 그리하여 이미 망해버린 왕족의 가문을 다시 한번 수치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것, 그건 얼마나 사회전복적인 상상인가.

아니다. 이런 상상은 너무한 것인지도 모른다.

너는 적어도 그렇게 쓰레기 같은 새끼는 아니고 약간만 개새끼니까, 그냥 자비를 베푼 것인지도 몰랐다. 과거에 너에게 매달리며 사랑을 구걸하던 여자가 엉엉 울면서 너를 잊을 수 있게 키스를 해달라고 빌었으니까.

여전히 지옥 속을 헤매는 듯한 표정으로 남자들에게 희롱 당할 뻔한 여자를 구해내서는 자신이 구원자라는 역할에 아직도 배정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나를 안았는지도 모르겠다.

불쌍한 엘리자베스.

부모를 잃고 사랑하는 남자도 떠나보내고 이제는 공녀 자리조차 잃었으니 미쳐버리면 어쩐다. 다리를 다친 새가 처마 밑으로 들어왔을 때 내치지 못하는 귀부인의 여린 심정처럼 내 앞에 섰던 너의 심장도 잠시 말랑해졌는지도.

알량한 동정으로 그 새가 인간의 체취를 묻히고 숲으로 돌아가 잔인하게 먹혀버릴지라도. 그런 건 너의 뇌리를 스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바지를 입고 낡은 가죽 벨트로 가장 조이는 구멍에 벨트를 채워보았다가 실패했다. 대신 가죽 벨트를 꽉 당겨 커튼을 묶는 끈처럼 그냥 대충 바지 위로 묶었다. 그 바람에 손이 새빨개졌다. 엘리자베스는 쓰라린 손바닥을 서로 맞부딪쳐 그 쓰라림을 극대화시키며 생각했다.

개자식.

너의 행동이 차라리 정복감이나 동정이 아니라 취기였기를 빌어. 너는 술도 담배도 안 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위스키에 절어 있는 상태였길 빌게. 술은 아니었어도 잠깐 무도회의 분위기에 취해 너도 나를……

나를 못 알아본 것이길 빌게.

무려 4년 동안이나 너만을 사랑한 여자를 잊어버린 것이기를 빌게.

너의 냄새, 목소리, 피부결과 머리 색, 눈동자 색을 보는 순간 까마귀 가면 아래의 얼굴이 너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던 나와는 달리 너는, 너는, 너는,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개새끼니까 나를 잊어버렸을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엘리자베스는 봉긋하게 드러나는 가슴을 숨기기 위해 베스트 단추를 꽉 채우고 거울 앞에 섰다.

펑퍼짐한 항아리 같은 짙은 회색의 바지, 목까지 채운 헐렁한 셔츠, 검은 베스트.

지금 엘리자베스의 꼴은 엘리자베스의 인생과 닮았다. 맞지 않는 것들과 부조화하면서 고통 받는 엘리자베스의 인생.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며 한 뼘은 남는 것 같은 셔츠 소매를 돌돌 말아서 걷어 올렸다. 아직 젖어 있는 머리는 더 탈탈 털어서 부스스하게 만들었다.

그냥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너도, 너의 여자도, 두 사람이 바꾸려는 이 나라도.

엘리자베스는 망쳐버린 제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몇 번이나 기도했다.

다들 지옥에 떨어지게 해주세요.

나랑 같이.

어쨌거나 다 함께 지옥에서 만나게 될 그날까지 엘리자베스는 절대로 제가 먼저 두 사람의 키스를 기억하는 양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앰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 * *

엘리자베스가 1층으로 내려갔을 때는 케이가 대체 어떻게 한 건지 따뜻한 스프, 빵, 거기에 허브와 버터를 바른 대구까지 구워서 한 상을 차려놓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차려놓은 상 위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것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에게 음식 솜씨가 있었나? 신혼생활 내내 케이와 밥을 먹어본 것이 손에 꼽는데다가 리오든 귀족들은 결코 스스로 음식을 해먹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 엘리자베스의 끔찍한 요리 실력도 드러날 일이 없었고 케이의 요리 실력을 검증할 일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케이는 엘리자베스는 물론이고 에드워드보다도 음식을 잘 하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힐끔 본 스프의 모양과 부엌에 진동하는 냄새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으며 얼굴을 붉혔다. 그때 소파에 앉아 있던 케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콧대 위에 놓인 작은 안경을 보고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거대한 덩치의 케이가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은 퍽 우습게 느껴졌다. 마치 안경을 쓴 불곰 같다고 해야 되나.

엘리자베스가 웃자 케이가 소파에 머리를 기대곤 엘리자베스를 노려봤다.

“뭐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케이 쪽으로 걸어갔다.

엘리자베스가 걸어오자 케이는 자신이 들고 있던 코트를 티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손에 들고 있던 바늘과 실은 그 위에 포개어놓았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뭐해?”

“코트 단추가 떨어져서.”

“……바느질을 할 줄 알아?”

엘리자베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케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일한 곳이 옷의 원료를 만드는 공장이었어.”

“방직 기계를 돌리는 거랑 단추를 다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엘리자베스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언뜻 봐도 꽤 훌륭하게 꿰매진 단추를 보았다.

“옷 가게에 면포를 대러 가면 잔심부름을 시켜. 꼭 심부름이 아니더라도 보고 배우는 게 생기지.”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물어볼 뻔했다. 그럼 왜 손수건에는 수를 그딴 식으로 놨어? 처음 수를 놔보는 사람처럼. 핏물도 베어났었잖아.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서 케이를 내려다보았다.

‘앞뒤가 하나도 안 맞아.’

엘리자베스는 케이라는 인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케이는 안경을 벗고 눈꺼풀 위를 꾹꾹 누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능숙한 손길로 접시를 꺼냈다.

“우리 훌륭한 가정교사께서 귀족들은 제 손으로 집안일을 하면 안 된댔지만 아직 사용인을 구하지 못했으니까 어쩔 수 없어. 커피 내려줘?”

케이는 제 몫의 생선과 스프, 그리고 빵을 담으며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얼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아니…… 어…… 원래 리오든에서는 커피랑 빵이랑 스프랑 생선을 같이 내오면 안 돼.”

“그래. 알겠어.”

케이는 담담하게 대답하고는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뭐에 홀린 듯이 스프를 입 안으로 가져갔다. 야채와 콩, 다진 고기를 넣고 끓인 스프였는데 별 다른 조미를 한 것 같지 않은데도 풍미가 살아 있었다.

맛있어.

엘리자베스는 경기에 패배한 선수가 된 기분으로 입맛을 다셨다.

맛있어서 불쾌했다.

신혼 생활 내내 엘리자베스는 이 요리사가 밖에서 퍽퍽한 빵과 곤죽이 된 스프를 먹을까 봐 늘 걱정해왔던 것이다.

“요리는 어디서 배웠는데?”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이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배운 게 아니야. 공장에서 다 같이 먹을 음식을 만들다보니까 할 줄 알게 된 거야. 스프는 무조건 오래, 여러 번 끓이면 맛있어져. 너무 끓이면 죽이 되지만.”

케이의 말을 들으며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스프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빵에 적셔 먹을 정도는 남겨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지 않았더라면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뒤를 돌기 전에 이미 스프 그릇의 바닥을 보았을 것이다.

케이는 뒤를 돌자마자 스프 그릇을 내려놓는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치곤 피식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최대한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원래는 스프 그릇을 들고 먹으면 안 돼.”

“그래. 그럴 것 같아.”

“지금은 배가 고프니까, 그리고 나는 이 집 손님이 아니라 납치된 거니까 그냥 먹은 거야.”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케이가 내미는 커피잔을 받았다. 커피잔이 따뜻했다. 홍차 잔을 데우라는 말을 듣고 난 케이가 잔을 데운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괜히 부드러워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차가운 눈으로 케이가 따른 커피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때 케이가 말했다.

“잘 어울리는군.”

“뭐가?”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올려다보자 케이가 왜인지 모르게 웃음을 참는 얼굴로 말했다.

“내 옷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놀림거리가 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치수가 안 맞아.”

“치수가 안 맞는 건 제외하더라도 잘 어울려. 신사 복장이 너에게 말이야. 어제도, 그제도 셔츠에 바지를 입었잖아.”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다 따르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 케이를 노려보며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지금 놀리는 거지?”

“아니.”

“맞잖아.”

“왜 사람 말을 안 믿는 거지?”

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쪽 팔을 테이블 위에 거만하게 걸친 채로 엘리자베스를 빤히 보았다.

“넌 못 믿을 사람이니까.”

“어쨌거나 넌 신사에 잘 어울려. 켄터베리 홀에서도 말했잖아. 굳이 역할을 정하자면 네가 신사고 내가 무희라고. 신사한테 희롱당하는 무희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 때문에 나쁜 기억들 속에 파묻혀 있던 희귀하고 반짝거리는 보석 같은 좋은 기억이 파헤쳐졌음을 깨달았다.

제 손에 묻은 말똥을 닦아주던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를 보고 사랑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던 케이 하커.

엘우드를 찾아서, 그래서 이 개 같은 병을 치료하고 나면, 그러고 나면 케이의 진심을 확인하고 함께 새로운 미래를 발견할 거라고 믿었던 희망찬 밤.

엘리자베스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딜 봐서. 나는 신사들처럼 거만하지 못해.”

“그쪽 자질이라면 충분해.”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이 생선에 포크를 심듯이 박고 나이프로 썰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그걸 보자마자 케이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케이는 맞은 것보다도 경쾌한 소리를 듣고 놀라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러자 엘리자베스가 오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생선은 위쪽부터 먹는 거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엘리자베스가 생선을 위부터 천천히 썰어 먹자 케이가 가만히 엘리자베스를 보고 있다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가 놀라서 케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이미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정확히는 입술 위에 동그랗게 난 스프 자국을 문질러 닦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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