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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04화 (104/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04화

엘리자베스는 무슨 거대한 천 뭉치처럼 케이의 어깨 위에 얹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쫄딱 젖은 상태로 앞도 보이지 않는 채로 발버둥을 쳤다.

“이 개새끼! 이 또라이! 넌 자율신경계에 문제가 있어! 그래서 이렇게 통제 불가인 거야! 널 사랑할 게 아니라 널 학술원에 데려가서 해부를 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지금쯤 홀램브로 학술지에서 나를 데려갔겠지!”

엘리자베스가 짐승처럼 포효하는 데도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들고 뚜벅뚜벅 정문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젖은 몸 그대로 문을 활짝 열고 뚝뚝 물을 흘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

엘리자베스는 계단쯤에 도달해서는 더 이상 발버둥치는 것을 포기하고 축 늘어졌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올라가서는 침실 안에 있는 커다란 침대에 엘리자베스를 던졌다. 어제도 보았던 엘리자베스가 예전에 쓰던 방이었고 예전에 쓰던 그 침대였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누웠던 침대에 누워서 잤을 케이가 얄미워서 침대에 던져지자마자 케이를 마구 때렸다. 주먹이나 발로, 탁상 옆에 뭔가가 집히면 그걸로도 때리려고 했는데 딱히 잡히는 게 없었다.

케이의 목덜미에는 금방 상처가 났고 뺨에도 붉은 생채기가 생겼다. 엘리자베스가 발버둥을 쳐도 케이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푹신한 이불을 엘리자베스의 몸 위로 덮고 엘리자베스의 가슴께까지 끌어올린 다음에 그대로 눌러버렸다.

케이가 이불 너머로 제 팔다리를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자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다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케이는 재밌다는 듯이 제 얼굴을 비벼 침을 닦아내고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난폭하기 그지없군.”

“더 난폭해질 수도 있어. 나는 너를 죽여버릴 수도 있어.”

“그러든지.”

케이는 우습다는 듯이 말하며 푹 젖은 머리카락으로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씩씩거리며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뭐 하겠다는 거야? 나를 여기서 강간이라도 해보겠다는 거야? 앰버가 없는 틈을 타서?”

“너를 가질 거였다면 네가 내 약혼녀일 때 가졌겠지.”

“날 물건처럼 얘기하지 마.”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몸을 일으키더니 욕조로 걸어가서 수건을 가지고 돌아왔다. 엘리자베스가 밭은 숨을 내뱉으며 상체를 일으키자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수건을 던지며 말했다.

“네가 물건이었다면 모든 일이 더 쉬웠을 거야.”

케이는 그렇게 말하곤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싶다며 씻고 내려와. 귀족의 예의범절이 뭔지 가르쳐야지.”

케이가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자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넌 절대 신사가 될 수 없어. 교육으로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는 거야!”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코웃음을 치더니 방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고 나가버렸다. 엘리자베스는 혼자 남아서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이불을 쾅쾅 소리가 나게 주먹으로 쳤다. 나중에는 분이 풀리지 않아 이불에 얼굴을 묻고 비명을 질렀다.

“으으으으!”

그때,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엘리자베스의 겁먹은 얼굴 위로 빗줄기의 그림자가 어렸다.

* * *

엘리자베스가 젖은 셔츠와 바지를 벗어놓고 곤란해하는 사이에 문 밖에서 작은 기척이 났다. 엘리자베스가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자 거기엔 따뜻한 물이 잔뜩 담긴 양동이 두 개와 새 수건, 그리고 앰버의 것이 분명한 부드러운 가운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텅빈 계단을 노려보았다.

자기 약혼녀의 옷을 전 약혼녀에게 내놓다니. 당장 케이의 멱살을 쥐고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비를 하도 맞아서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상황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양동이 손잡이 대신 양동이의 몸통을 쥐고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수의 따스함을 느끼며 그것을 방 안으로 가지고 왔다. 양동이의 물을 욕조에 붓고 온도를 확인한 다음 수건과 가운도 들여놓았다.

엘리자베스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돌돌 말아서 틀어 올리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의 온도가 발끝에서 전달되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짜릿함을 느꼈다.

목욕이라니!

엘리자베스는 지난 3개월 간 단 한 번도 목욕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일단 기숙사에는 여자 화장실도 없었으니 욕조가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로킨트 저택에는 욕조가 있었다. 하지만 욕조에서 목욕을 하기 위해 메리에게 온수를 부탁하는 건 왜인지 눈치가 보였다.

로킨트 저택에서 엘리자베스는 언제나 직접 물을 받아서 물수건을 만들어 몸을 씻었고 가끔 발이 퉁퉁 부을 때만 대야에 따뜻한 물을 붓고 족욕을 했다. 그러니 이렇게 몸이 찰방찰방 잠길 정도로 따뜻한 물에서 몸을 푹 익히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물속에서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이런 걸 보면 분노는 따뜻한 물에서 용해되는 수용성 용질과 같은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지금은 케이가 아무리 이상한 짓거리를 해도 너는 짖어라, 나는 쉰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푹 늘어진 채로 빨개진 볼로 협탁에 놓인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3개월 동안 피부는 푸석푸석해지고 눈 밑에는 24시간 어두운 그늘이 사라질 기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엘리자베스는 스스로의 얼굴이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녀는 스스로의 외모를 좋게 평가하는 편이었다. 객관적으로 이 세상 최고의 미모라고 할 수는 없어도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눈매가 살짝 치켜올라갈 때 주는 날카로움이나 편안하게 있을 때 툭 튀어나오는 입술의 반짝거림 같은 것을 좋아했다.

아니, 좋아하려고 노력해왔다. 매일 매일 이 방 안에서 눈을 뜨고 거울을 볼 때마다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스스로를 돌보려고 노력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스스로를 돌보고 아무도 가엾어 하지 않는 스스로를 가엾어 하려고 했다. 아무도 예뻐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지만 나는 나를 예뻐하고 사랑하려고 했다.

그게 외모뿐이더라도, 부식되고 찢어진 내면은 도저히 이어붙이기도 정돈하기도 어려워 스스로도 유기한 상태더라도 외모만은, 그래, 외모 정도는 좋아하고 싶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때를 떠올리며 거울을 보다가 시선을 옮겨 자신의 방을 보았다. 초록색 벽지와 익숙한 장식품들, 창틀의 색깔과 비틀림, 그리고 침대 위의 캐노피 천까지 모든 것이 엘리자베스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엘리자베스는 유리 속에 보관액과 함께 넣어진 장미처럼 향기를 잃어버린 채 모양과 색을 유지한 제 방을 기가 찬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하필 여기에서 지내는 걸까.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케이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인해 이 방과 타운하우스에 갖는 스스로의 두려움이 모두 덮여버렸다는 것은 다행스러웠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내준 또 다른 수건을 펼쳤다. 가슴과 엉덩이를 가릴 정도로 큰 타월로 몸을 돌돌 말고 물을 뚝뚝 흘리면서 아직 젖어 있는 침구로 걸어갔다. 그리고 침구 위에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누워버렸다.

그러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여기서 잔단 말이지…….”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얼굴 위로 목욕의 기운임이 분명한, 아니, 분명해야 할, 더운 기운이 올라왔다.

“……또라이.”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리며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 * *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한참을 내려오지 않자 계단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은쟁반에 따뜻한 스프와 빵을 데워 올려두었지만 그걸 가지고 올라오진 않았다. 대신에 내려오라고 종용하러 계단에 발을 올려놓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엘리자베스가 가운으로 몸을 감싸고 수건으로 머리를 묶은 채 붉은 얼굴로 케이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케이는 가운 아래로 드러난 엘리자베스의 새하얀 맨 다리와 꼼지락 거리는 발가락, 그리고 가운 위로 드러나는 빗장뼈와 쇄골, 물컹한 살점 따위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뭐하는 거야?”

“뭘 하긴 뭘 해. 입을 옷이 없으니까 그렇지.”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흘렸다. 그 말에 케이는 계단을 중간까지 올라가서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뭐가 문제야. 그냥 내려와.”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무신경한 말에 분노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축축하게 젖은 배스 타월을 던져버렸다. 그러자 부드러운 실크 가운 아래로 엘리자베스의 굴곡이 전부 비쳤다. 케이는 그걸 직면하기가 무섭게 욕을 뱉었다.

“젠장. 뭐하는 짓이야.”

케이의 붉어진 귀를 보며 엘리자베스가 코웃음을 쳤다.

“뭘 뭐하는 짓이야. 네가 지금 네 약혼녀의 가운을, 가운만! 외간 여자에게 가져다줬으니까 생긴 일이지!”

“그럼 뭘 가져다줘야 되는데.”

케이는 시뻘게진 얼굴로 항변했다.

“앰버가 이 안을 돌아다닐 때 가운만 입었어? 에드워드가 있을 때도?”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옆얼굴을 보며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그럼 뭘 더 입어? 잠옷 바지……. 를 입었었나?”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내민 가운은 사실 앰버가 한 번도 입지 않은 것이었다. 색깔을 잘못 사서 교환해야겠다며 내놓은 배스 가운을 그냥 집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앰버가 집 안에서 어떻게 하고 돌아다니는지는 솔직히 전혀 기억에 남지 않았다.

“당연하지! 그리고 위에도 가운만 입지는 않거든!”

“뭘 더 입는데?”

“닥쳐, 이 변태야!”

엘리자베스는 소리를 지르며 떨어진 배스 타월을 케이의 얼굴에 던졌다. 아까의 복수였다.

케이는 축축한 배스 타월을 어깨에 걸친 채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 큰 보폭으로 2층으로 올라가 옷방을 찾았다. 케이는 거기에서 자신에게는 꽉 끼는 셔츠와 바지를 찾아서 돌아왔다. 그리고 목욕을 마친 엘리자베스의 몸에 찰싹찰싹 달라붙어대는 실크 가운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셔츠와 바지를 던지다시피 했다.

엘리자베스는 분노로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베스트랑 벨트도 내놔.”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뭔가 말하려는 듯 고개를 돌리려다가 한숨을 내쉬곤 다시 옷장을 파헤쳐 자신에게 가장 작은 베스트와 벨트를 꺼내왔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는 케이에게서 베스트를 빼앗듯 집어 들고는 원래의 방으로 돌아갔다. 엘리자베스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케이의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전 약혼자의 집에서 전 약혼자의 현 약혼녀의 가운을 입고, 안 되겠으니까 이젠 전 약혼자의 옷도 입고, 전 약혼자와…… 했던 키스를 떠올리다니.

엘리자베스는 까마귀 탈을 썼던 그 간교한 개새끼와의 키스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네가 너라는 사실을 몰랐다니 믿어지지가 않아.

케이 하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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